중국 정치인들은 시(詩)나 성어(成語)를 쓰기 좋아한다.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강택민, 후진타오, 원자바오 등 중국 근현대 정치지도자들의 권토중래(捲土重來),우공이산(愚公移山),유비무환(有備無患),고장난명(孤掌難鳴),흑묘백묘(黑猫白猫),화평굴기(和平崛起)등은 백 마디를 뛰어넘는 날카로움과 깊이를 가진 성어다.
그런데 시진핑 주석은 성어(成語)보다는 시(詩)를 즐겨 쓰고 있다. 중국어 표현상 때로는 풀어 이야기하는 것보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시(詩)를 인용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중 정상회담 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신라 말의 대석학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바다에 배를 띄우다)’를 인용하며, 당나라 시인 왕지환의 '관작루에 올라(登觀雀樓)'라는 한시 서예작품 한 점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해서 국내에 화제가 됐다. ‘(白日依山盡/黃河入海流:해는 서쪽으로 기울고/황하는 바다로 흐른다//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천리를 내다보려는 자는/한 계단 더 오르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국가주석이 '괘석부창해/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長風萬里通·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라는 앞부분을 인용해 유명해진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다음에 나오는 '승사사한사/채약억진동(乘槎思漢使/採藥憶秦童·뗏목 탔던 한(漢)나라 사신이 생각나고 불사약 찾던 진나라 아이도 생각나네)'라는 구절이다.
중화사상이 뇌리에 박힌 중국 지도자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시 주석이 최치원을 언급한 것을 '한·중의 오랜 유대'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만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다. 동아시아의 문명 표준이 다시 중국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도 직시하고 훌륭한 조상에게서 배우라는 권유로 들리는 것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21세기에 최치원에게서 배우라‘는 중국의 지도자의 범해 시 인용에 대한 호응은 이미 한국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좌파는 중국이 만들고 있는 '새로운 중화질서'에 편입되자고 주장한다. 중국의 커지는 경제적 위력을 실감하는 우파는 '친중(親中)' '지중(知中)'을 역설하며 중국어 배우기에 열심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중국의 동의 없이 어렵고 미국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점점 줄어든다며 통일 한국은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학자도 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수천 년간 중국을 어떻게 상대할지가 가장 큰 대외적 고민이었다. 겨우 한 세기 남짓 잊고 지냈던 중국 문제가 다시 우리 민족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음을 실감하게 되는 작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복잡해진 국제정세는 우리의 선택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중국은 지금 과연 당나라 그때처럼 동아시아의 문명 표준으로 떠오르고 있는가? 실리적 측면뿐 아니라 긴 역사적 관점에서도 대중(對中)관계를 사활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다. 
 [수필가 / 이경순 전 KM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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