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남 (徐大男) 편집위원

 

 

 

 

 

 

치맛바람 감싸는 한줄기 바람에도 싸늘하게 깊어만 가는 가을이다.
꽃은 눈으로 지지만 낙엽은 가슴으로 진다는 늦가을 동짓달이기도 하다.
이맘때면 을지로나 종로 청계천 광화문 및 명동근처에 직장이 있는
샐러리맨들의 점심시간은 늙으나 젊으나 직위 고하간 아주 특별하다.

보통 12시가 되기전에 눈치껏 서둘러 미리 사무실을 빠져나가서 12시쯤에
이미 북새통을 이루는 근처의 아무 식당에서나 후루룩으로 한끼를 해결하고 나선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시간 정도에 걸쳐 저마다 운동삼아 짧은 여행(?)을 즐긴다.

오늘은 어디로 갈거나 동료끼리 삼삼오오 짝을 짓기도 하고 나홀로 데이트로
성지순례(명동성당에 들러 남산을 바라보며 경내 벤치에서 망중한 즐기기)를 가거나
문화재 탐방(인사동 부근의 골동품 가게나 미술품 및 갤러리 등 눈팅 구경)을 하거나
고적답사(덕수궁 창경궁 경복궁등 고궁 관람을 하거나 벤치 휴식)를 떠나기도 한다.

50여년 전부터 덕수궁 정문 앞과 돌담장길을 수도 없이 오가면서도
정작 궁 경내에 들어가 본 적은 손꼽을 정도로 아주 드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명동성당의 성지순례나 인사동 골동품거리의 문화재 탐방보다
오늘은 덕수궁 고적답사를 하기로 출근길부터 마음을 굳혔다.

서소문 해산물 콩나물국집에 들러 진짜 콩나물 시루같이 옹색한 자리에서
혓바닥을 최고의 RPM으로 돌려가며 호호불어 한 뚝배기를 단숨에 해 치운 후
덕수궁을 곁눈질을 해보니 무관복으로 차려입은 문지기들의 행렬이 요란하다.
먹는건 공짜가 없지만 들어가는 데는 경로우대로 온 곳이 대개가 무료인지라
덥썩 들어갔으나 어쩌면 이게 그 옛날 덕수궁이 맞는가 싶게 초라하기 짝이 없다.

오로지 돌담길을 따라 하늘높은 고목들의 행렬은 60년대와 여전했으나
덕수궁 미술관 석조전이나 중화전도 그 옛날 그모습으로 반갑긴 했지만
주위의 높은 건물에 밀려 역시 초라하고 쓸쓸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한가지 왈칵 웃음과 함께 반가운 것은 아직도 그 옛처럼 석조전앞 분수대였고
가느다란 물줄기가 늦가을 양광에 반짝이며 그래도 있는 힘 다해 가을하늘로
젊은이 오줌줄기 처럼 쏘아 올리는 모습이 앙징맞고 대견스럽긴 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해서 홍수처럼 번지는 유머버전도 많고 다양해졌지만
옛날만 해도 여럿이 단체사진을 찍을 때마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덕수궁 분수처럼 물나오게 잘 박아 주이소 ! " 하던 기억들이 새로운데도
저리 보잘것 없는 서너개 물줄기를 두고 분수대 분수대 하며 인구에 회자됐던게
현대화 대형화 첨단화에 밀려 이젠 보잘것 없고 허탈스럽기까지 했다.

학생시절 밤이면 가끔 찾아와 여학생들과 장난질하던 숲들은
50여년이 흐른 지금 어찌 내가 당신네들의 과거를 알겠냐는듯 아무런 말이 없이
가을볕에 잎새를 일렁이며 이젠 노인이 된 나를 맞으며 몹씨도 수줍어했다.

단숨에 한 바퀴를 둘러보고 사무실로 오는길 시청앞 서울광장은 조용했고
가로질러 잔디를 밟고가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이 한가롭고도 평화롭기만 했다.
오늘은 한번도 전철을 타지않고 도보로 걸어다니며 몇 군데 업무를 마치고
고적답사까지 끝내고 귀사해도 옆구리에 찬 만보기는 아직 만보가 멀었다.

또 내일은 성지순례, 문화재탐방, 고적답사중 무엇을 택할까 생각하며
여유롭게 혼자서 거리를 걷는 동안 힐끗 유리창에 비치는 내 모습이
오늘따라 무척 바싹 여위어 늙어보이고 주름살이 늘긴 했어도
늘 BMW(Bus Metro Walking)를 타고 나홀로 데이트는 즐겁고 의미있고
그래서 난 오늘도 지금의 내 나이를 사랑하며 또 이렇게 하루를 배웅한다.
 

저작권자 © 쉬핑뉴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