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위기가 닥치면 단결해서 극복하는 데는 뛰어나다. 마치 끓는 물이 담긴 냄비(pot)에 던져진 개구리가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쇼크(충격)나 위기가 없어도 잘 대응하는지 의문이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와 같이 냄비 밖으로 뛰어나가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한국 보고서'를 작성한 리처드 돕스 매킨지 연구소장의 말이다.

우리나라의 현 상황은 외부적 요인으로 한국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발을 담그고 있다. 줄타기를 잘 해야 한다. 또 다른 요인으로 ‘블랙스완(Black Swan:극히 드물지만 일단 상황이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을 주는 현상)’인 북한의 불안전성이다.

내부적 요인은 고비용(고임금)문제이다. 우리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은 대만과 비슷한 2만 달러 수준인데 구매력평가(Purchasing Power Parity)로는 1인당 소득은 3만5000달러로, 대만의 3만8000달러보다 적다. 그런데도 대졸자 초임은 우리가 세 배나 높다. 대만의 대졸자 초임 월급은 1000달러 내외인데 우리 돈으로 100만원 수준이다. 우리의 사회 전반 급여 수준은 대만보다 두세 배 높다. 그만큼 경쟁력이 없다는 얘기다.

또 다른 요인으로 강성 노조다. 대만에는 정치색 짙은 강성 노조가 없다. 대만은 경제적으로 중국 의존도가 우리보다 훨씬 높은데 대만의 웬만한 기업은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근로자들이 임금을 올려달라고 하면 생산을 중국으로 이전한다. 그러다 보니 지난 12년 동안 대만의 임금은 거의 동결 수준이다.

대기업 강성노조가 주도하는 고비용 구조’와 함께 ‘시장테스트를 받지 않는 정부 부문의 비대화’도 한국의 경제의 위협요인이다. “신(神)이 내린 직장, 신도 모르는 직장이라는 이들 직장의 특징은 급여가 높고, 근무조건이 훌륭하며, 직장 안정성이 높다. 이런 직장은 정부의 입김이 센 공기업이나 금융기관이다.

이들 기업들은 시장의 테스트를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노조의 힘이 더욱 실린다. 얼마 전 모(某) 공기업에 신임 사장이 출근하는 첫날, 노조가 출근 저지운동을 벌이며 신임 사장 길들이기를 했다. 새로 부임한 사장은 노조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게 공기업의 현실이다. 국내 금융권, 특히 주요 은행들도 마찬가지로 정부 지분이 없어도 업무 성격상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보호도 받고 있다. 그러면서 시장 경쟁력은 키우지 않고 비효율성만 더욱 커지고 있다.

또 하나 정부부문에서 무니만 개혁인 공무원연금은 적자가 더욱 커져 국민세금이 현 정부서만 15조원 들어가며, 국민연금 받는 사람(상놈)과 공무원(양반)으로 갈라놓아 대국민통합에도 역행하고 있다. IMF 위기 같은 때 장롱 속에 숨겨둔 금붙이를 들고 나오는 행렬은 영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2013년 한국 경제는 위기를 맞고 있다. 그룹 반열에 올라 있는 대기업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다. 웅진. STX. 동양그룹이 차례로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샐러리맨 신화 중 하나였던 박병엽 부회장의 팬택도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또 다른 중견 대기업들이 다음 타자로 아웃될 처지에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사실의 ‘부도 도미노’는 1977년에도 겪은 적이 있다. 당시 한보그룹. 삼미. 진로. 대농. 기아. 해태 등이 연속적으로 무너지면서 그해 말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에 치욕적인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하지만 지금 많은 기업이 무너져도, 우리가 다시 IMF 위기 같은 것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외환 보유액도 상당하고, 경상수지도 흑자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IMF 당시 강경식 재무부장관 말대로 ‘펀더멘털’은 괜찮다. 그러나 이런 거시 안전망은 국가 부도를 막을 순 있어도, 글로벌 무대에서 차례로 무너지고 있는 한국 기업들의 몰락을 중단시키지 못한다.

1997년의 부도가 성장시대에 취해 대기업이 과다한 차입과 방만한 경영을 한 탓이라면, 올해 진행되고 있는 대기업의 몰락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이 백기(白旗)를 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STX와 팬택은 조선. 휴대폰 등에서 중국의 저가 공세를 견디지 못했고, 웅진과 동양은 글로벌 시장에서 비즈니스 모델을 발견하지 못하고 국내의 과잉 업종에 뛰어들었다가 넘어진 경우다. 돈을 벌지 못하니까 빚이 늘어나고, 이 빚을 시장에서 기업어음(CP)등으로 돌려 막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것이다.

경제 전문가 가운데는 지금이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보이지 않았던 중국 변수가 현실화됐다는 의견이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아직 중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글로벌 무대에 등장하지 않아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지금 우리 대기업들은 무섭게 치받고 올라오는 중국 기업들에 막혀 곳곳에서 좌초하고 있다. 삼성처럼 중국보다 몇 수 앞선 기업들은 살아남아서 막대한 이익을 내지만, 중국과 거리를 벌려 놓지 못한 기업들은 중국의 저가 공세에 시달리며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막연한 불안감이었던 중국의 위협이 드디어 눈앞에 닥친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중국의 공격을 받은 기업들 가운데 ‘약한 고리’가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이 2013년 한국 경제의 현실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출구전략 여파로 신흥 시장에서 빠져나온 자금이 한국으로 몰리자 외국인들이 순매수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주가를 끌어올렸지만, 이들이 사들이는 종목은 몇몇 글로벌 기업에 국한돼 있다. ‘바이 코리아’ 훈풍에 취할 법한 국내 자산운용업계 펀드매니저들의 목소리도 조심스럽다. 삼성. 현대차 등 몇몇 그룹을 빼고 나면 나머지 그룹들이 과연 장기적으로 생존이 가능한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기업의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자본주의의 자연법칙이지만, 우리는 노쇠한 기업들을 대체할 만한 신흥 글로벌 기업을 키우지 못한 채 위기를 맞고 있다. 경제 민주화와 창조경제의 구호는 요란하지만 이 속에 절박한 위기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무섭게 추격하는 중국 기업에 덜미를 잡힌 우리 기업들이 나가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부도가 나지 않았지만 지금이 위기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규제를 풀고 비즈니스 환경을 국제화해 새로운 기업을 키우고, 기존 기업의 활로를 열어줘야 한다.
[수필가 / 이경순 전 KM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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