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남 편집위원
학창시절 수박 겉핥기로 공자(孔子/BC 551~479)의 논어를 대충 읽은 후 최근 우연히 세계유교전파협회가 10년 전에 발행했던 한ㆍ중ㆍ영ㆍ일 4국어대역판 논어(論語)를 묻혔던 필자의 서가에서 발견, 공자 재조명을 의식하고 73세에 마감한 공자보다 둬 살이나 더 살며 지금 다시 읽다 작금 난세의 고르디온 매듭을 풀기 위해선 중국의 성서라 일컫는 논어를 온 국민이 너나 할 것 없이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경전으로 재삼, 이른바 '공자의 말씀'을 마음 깊이 되새겨 보기를 간절히 권유하는 의미에서 필요한 부분을 정리해 본다.

옛 말에 삼구(三懼)라 해서 임금이 두려워해야 할 세 가지를, 첫째, 아랫 사람의 말을 참고하지 않는 일, 둘째, 연로해서 교만해 지는 일, 셋째,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일을 꼽았다. 공자도 위정자는 백성을 위해서 첫째,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둘째, 군비와 병력을 확충하고(足兵) 셋째,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것(民信)을 들고 이 중에 어느 하나를 버린다면 먼저 첫째와 둘째고 마지막 셋째의 믿음은 절대 버릴 수가 없다 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나라를 바로 세우고 다스리는 위정자 첫째 덕목은 백성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라 한 것.

공자가 이르기를 "백성들을 법률과 법령으로서 이끌고 치안을 형벌과 규칙으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법망을 빠져나가는 행동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게 되고 덕으로써 백성을 교화시키고 예로써 다스리면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생기며 스스로 올바른 행동을 하게 된다." 고 했다. 공자는 "나는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學), 서른 살에 뜻을 세워서 홀로 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而立). 마흔 살에 어떤 일에도 미혹되지 않게 되었고(不惑), 쉰 살에 천명의 이치를 알았으며(知天命)' 예순 살엔 귀로 들으면 무슨 말이든 시비를 판별할 수 있게 됐고(耳順), 일흔살이 된 지금은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을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됐다(從心)" 했다.

공자께서 안연(顔淵)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란 군주가 채용해 주면 관직에 오를 것이며 필요가 없게 되면 은퇴하는 것이다. 이런 수양을 쌓은 사람은 나와 너 뿐인 것 같구나" 자로(子路)가 이 말씀을 듣고 여쭈었다. "만일 공자님께서 삼군을 거느리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공자께서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고, 걸어서 대하를 건너가며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과는 나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일을 앞에 두고는 신중을 기해야 하며 책략을 짜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이면 함께 일할 것."이라고 했다.

또 공자께서는 상복을 입은 사람을 보시면 비록 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태도를 고쳐 숙연하게 애도의 뜻을 나타냈다. 의식용 관을 쓴 사람이나 맹인을 만나면 비록 잘 아는 사이라도 반드시 예의 바르게 예모를 갖추었다. 수레를 타고 있을 때, 상복을 입은 사람과 마주쳤을 때에는 수레의 부분에 가로로 댄 나무 횡판에 기대어 경례를 했다. 또한 나라의 지도와 호적의 공문서를 나르는 사람에게도 수레 위에서 예를 갖추었다. 다른 사람의 초대를 받아 훌륭한 요리가 나오면 반드시 얼굴을 정색을 하며 일어나서 사의를 표했다고 한다.

중궁(仲弓)이 계(季)씨의 가신, 집사가 되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일하는 관원들의 선두에 서서 일을 분담시키고 , 작은 허물은 용서해 주며, 우수한 인재는 발탁하여 등용시키고, 이어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어떻게 찾아내서 발탁하고 등용하느냐고 질문하자 "네가 잘 아는 사람들 중에서 이 사람이면 괜찮구나 하는 인물을 발탁하여 쓰면 된다. 그리하면 네가 모르는 인재도 남들이 그냥 내버려 두겠느냐? 반드시 추천해 올 것이다"라고 일렀다.

위나라의 군주가 "선생님을 모셔다 국정을 맡긴다면 선생님께서는 우선 무엇부터 착수하겠냐"고 묻는 자로(子路)의 질문에 "우선 반드시 명분을 세우겠다. 규범과 도덕이 번성하게 일어나야 형벌이 알맞고 적절하지 않게 적용된다" 고 했다.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는 것. 그러하기 때문에 군자는 하나의 명분을 세울 때마다 반드시 이치나 사리에 맞는 말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장차 위정자가 되려면 농사일을 알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한 번지(樊遲)가 곡식 기르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자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농민들이 농작물 재배법을 더 잘 알고 있다."고 겸손해 했고 이어 다시 채소밭 가꾸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자 "나보다 숙련된 원예농가에게 물어보라" 며 백성 위에 있는 사람이 신의와 도덕을 존중해서 확실히 실천하면 백성들이 윗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백성들은 제 자식을 업고 모여들 것이며 그러면 자기 스스로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지혜도 일러 주었다.

한번은 염유(苒有)가 조정에서 물러 나오자 공자께서 어째서 오늘은 이리 늦었냐고 묻자 "정무가 많아서 거기에 매달려 늦었다"고 답하자 "계씨의 집안 일이었구먼. 만약 그것이 정무였다면 비록 내가 공직에 있지 않아 관여하지 않아도 내 귀에 들어왔을 것"이라며 공직자가 본연의 업무 외에 윗 사람의 사적인 일에 동원된 잘못을 꼬집기도 했다. 또 정나라에서는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에는 우선 대부인 비심(裨諶)이 초고를 잡았고 대부인 세숙(世叔)이 자세히 검토하고 난 후에 의견을 제출했으며 그것을 다시 외교관인 자우(子羽)가 자구와 내용에 손을 댔고 마지막으로 동리에 사는 자산(子産)이 문장을 윤색을 하여 최종 원고를 매듭지었다고 설명했다.

노나라 군주 정공(定公)이 "한마디 말로 나라를 융성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공자는 "그렇게 들어맞는 말은 없고 그러나 비슷한 말로, 어떤 사람이 군주가 되어 나라 다스리기도 어렵지만 신하가 되어 군주를 모시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말을 음미하면 답이 될것이라고 했다. 한편 "나라를 멸망시키는 말이 있냐?"는 물음에도 딱 부러지는 말은 없으되 누가 "나는 군주가 되고 나서도 별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거역하지 않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면 "군주의 말이 선하고 바른데 아무도 어기는 이가 없다면 좋겠으나 만일 선하지도 바르지도 못한데 어기는 이가 없다면 이 한마디가 나라를 멸망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로 답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자는 사람들에게 오래 칭송 받는 것은 부유한 때문이 아니고 덕행때문이라 했다.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말 4천필을 가진 부국의 군주였으나 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누구 한 사람도 그의 덕을 칭송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수양산 기슭에서 굶주려 죽었지만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들을 칭송하고 있다고 시경에서 적었다. 또 군자는 도덕이나 마음을 쓰면서 좋은 삶을 살려고 하고 소인은 토지나 집을 지키면서 풍요로운 안태를 바라지만 군자는 형법이나 정치를 생각하고 책임질 각오를 하는데 소인은 은혜만을 목마르게 생각한다고 나무랐다.

한번은 자로가 군주 섬기는 방법에 대해 묻자 "속이지 말아야 하며 성심 성의껏 모시되 얼굴 기색을 살피지 말고 면전에서 간(諫)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옛 사람들은 자기 수양을 위해 학문을 했지만 지금 사람들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예를 얻기 위해 학문을 배우는 것 같다고 했고, 내자식을 진실로 자애스럽게 생각한다면 고생스러운 일을 많이 시켜서 사람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내가 충성을 바치는 임금일수록 임금의 잘못을 깨우쳐 바로잡아 주어야 진정한 충성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며 따끔히 일침을 놓기도 했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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