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인현 교수
지난해 9월 1일 개시된 한진해운의 회생절차는 많은 국민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파산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연매출 8조원, 외화가득 5조원 규모의 세계 7위 정기선사이며 40년 역사를 자랑하던 국내 1위 해운기업이 이렇게 사라지다니 안타깝다.

한진해운이 기대한 회생에 이르지 못하고 파산에 들어가게 된 것은 부채가 너무 많았기 때문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회생절차 전 10조원으로 알려진 부채가 회생절차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늘어나 30조원이나 됐다. 늘어난 부채에는 회생절차개시 신청과 더불어 시작된 하역회사의 하역작업 거부, 압류를 피하기 위한 회항 등으로 발생한 채무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만약 하역회사의 하역비 지급을 보장하는 법제도가 마련됐다면 부채도 이렇게 늘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한진해운이 회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한진해운의 경영진이나 정부의 근시안적인 결정을 비난하곤 하지만, 그토록 중요한 정기선에서의 정시성을 보장하는 법제도를 갖춰두지 않은 데에도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진해운 사태 이후 정기선 분야에서 정시성을 보장하는 문제는 공익적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정기선사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정기선사 단체와 정부가 힘을 합해 하역비 지급보장 기금제도를 만들어 운영해야 한다는 논의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기금제도는 국내 정기선사들이 협정을 통해 기금을 형성하고 운영하게 된다. 정기선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더라도 그 마지막 항차에 실린 운송물의 하역작업 비용은 지급이 보장되도록 하자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다.

정부는 해운법 등에 정기선사들이 하역비 지급을 보장하는 기금을 갖추도록 의무화한다. 그런 다음 하역회사는 이 기금운용자에게 자신의 하역비용을 직접 청구할 권리를 법률에서 부여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보장제도를 갖춘 정기선사에 대해서는 보장증서를 발급해 준다. 정기선사는 이 증서를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국내외의 하역회사들에서 충분한 신용을 얻게 될 것이다. 또 예정대로 자신의 수중에 운송물이 배달될 것이 보장되므로 화주 측도 좋아한다. 결국 기금제도가 완성되면 우리 정기선사는 국내외적으로 화주들에게 신용이 높아져 안정적인 운송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어떤 외항정기선사가 4000TEU(1TEU=20피트 컨테이터 1개) 선박 50척을 운항하는 경우 총하역비(TEU당 100달러)는 약 2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 정기선사가 회생절차에 들어가면 공적 기능을 하는 기금운영자는 은행에서 차입해 하역회사에 하역비를 먼저 지급한 다음 회원들로부터 기금을 갹출해 차입금을 갚으면 되므로 초기에 마련해야 할 금액은 수십억원이면 족할 것이다.
선주가 파산하는 경우 4개월치의 임금과 퇴직금을 보장하기 위해 운영되는 ‘선원임금채권보장기금제도’(선원법 제56조)가 선주들이 갹출하는 기금에 의해 잘 운영되고 있으므로 이를 벤치마킹하면 제도 도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진해운 사태 이후 화주들은 자신의 운송물이 실릴 선박을 운항하는 정기선사의 재무구조를 운송인 선정의 중요 요소로 보고 있다. 이를 반영해 해운 얼라이언스(alliance) 내부에서는 자체에서 다른 정기선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갈 때 하역 등 안전한 운송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얼라이언스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내부 도움을 받지 못하므로 자체적으로 신용을 회복하는 제도를 갖고 있지 않으면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그래서 하역비 지급보장 기금제도의 도입은 한국에서 더 긴요하고 화급을 다투는 사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본 칼럼은 한국경제 시론에 실린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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