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남 편집위원
'대한민국 어디로 가고 있나' 제하의 고려대 교우회가 주최한 월례강좌(제390회)에서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주필(철학과 75학번)이 밝힌 "우리 시대 가장 큰 과제는 언론 개혁"이란 지상 중계 글을 읽고,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 국민 모두가 관심 가질 문제일 뿐 아니라 해운물류업계 종사자들도 앞으로 더 밝게 살기 좋은 사회와 발전된 조국의 튼튼한 미래 정립의 동참을 위한 언론의 수요자 입장서 올바른 식견과 언론관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더욱 실감하며 횡설수설 황혼연설로 몇 자 술회한다.

한마디로 최근 대한민국 정세와 관련하여 최근 10여년간 언론사의 질적 저하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점이 지적되고 언론계가 과도한 경쟁구도를 기대하면서 제도권 언론으로서 중용과 팩트에 관한 기본적인 자세가 약화됐다는 사실을 정 주필도 강조 했다. 심지어 언론이 사건을 만들어 내는 세상이 되고 있다는 가공할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필자가 일선 기자로 정부 부처를 출입하던 6~70년대에는 너도 기자 나도 기자, 사이비 기자가 난무, 사회혼란을 야기할 때 언론탄압이란 일부 저항 세력을 무릅쓰고 정부가 프레스카드(보도증)를 교부하고 이의 소지자에 한해 취재에 응하도록 조치했던 시절이 회상된다.

1971년, '언론자율정화에 관한 결정사항'을 통해 당시 윤주영(尹胄榮) 문화공보부장관이 신문협회, 통신협회, 편집인협회, 기자협회 등 언론단체에 공한으로 기자증 발급자격을 발송, 소속사로 부터 교부 신청을 접수받아 기자의 취재활동에 있어서의 사회적 공신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란 명분으로 적격 여부를 심사하여 보도증을 교부했었다. 이를 취득한 기자는 43개 일간신문 3,800명, 7개 통신사 461명, 49개 방송국 643명 등 모두 4,184명이었고 탈락된 나머지 2,287명, 32.3%가 기자직을 떠나게 되었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이같이 국가가 기자의 자격을 실사, 그 자격을 인정후 허가하고 아울러 기자의 동태 파악을 위한 자료로도 활용했다. 특히 당시 지사 또는 지국이나 보급소란 이름 아래 지방주재 기자들의 비행이나 사이비 행위가 철퇴를 맞게 되고 일부 신문사들의 자동 폐간을 유도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같은 배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 지방 교랑 준공식에 참석, 점심시간에 가장 힘들게 일한 작업 현장의 핼멧 쓴 근로자들이 식사를 못 하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그 까닭을 물으니, 교량 하나 준공행사에 서울과 지방 원근 각지에서 참석한 기자들이 너무 많아 당일 발급 식권이 동이 난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이래선 도저히 안되겠다고 결심하고 언론에 손을 댔다는 후문이 있기도 했다.

당시 경향 각지의 일부 사이비 언론들이 지프차에 신문사 깃발을 나부끼며 관공서나 공사 현장을 찾아 다니던 광경은 그 시대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무관 제왕의 탈을 쓰고 부패한 관료들의 토속비리에 영합하여 금품을 갈취하던 사례들이 비일비재했고 영예로워야 할 기자직이 부정적으로 비쳤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금품 수수로 부터 자유로운 내부적 건강함이 전제돼야 한다. 특히 공급자의 일방적 편의에 의한 뉴스나 정보 제공자는 공정성에서 정의로운 매체의 대열에 합류해서 안된다. 수요자가 선호하고 기자 스스로가 취재원을 능가하는 언론고시 출신이란 자긍심이 밑받침 돼야 당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건강함은 여론의 다양성에 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은 언론의 자유에 못지 않게 그에 따른 정당함과 책임 속에서 가능하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제4권력으로 불리는 언론이 갖는 파급력이 지대하기에 신문과 방송을 함께 경영하며 한 성향으로 보도를 하면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의 사회 미덕인 다양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원적 요소로 인식돼 온 표현과 언론의 자유는 마땅히 보장돼야 하고, 한편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공정성을 요구하지 않듯이 언론에는 공정성이라는 개념의 설정이 어렵다는 논리가 지배적이긴 하다.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이며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제11조)도 언론의 자유를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로 누구나 자유로이 발언하고 기술하고 인쇄할 수 있게 했다. 또 언론과 출판의 자유에 대한 보장을 처음으로 명문화한 1791년 미국 수정 헌법도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을 못하게 규정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미국 모두 그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규제하며, 특히 영국은 언론은 자유이지만 표현의 자유는 엄격하여 아직도 왕실의 존폐 주장에 대해선 금기시하고 있어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신봉하는 국가들도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는 원칙에 전제되는 절대적 가치의 일부는 통제돼야 한다는 사상이 지배적이다.

필자는 거창하게 헌법적으로 언론자유 보장을 시도한 1647년 영국국민협정(Agreement of the People) 및 1689년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나 전세계 언론자유 신장과 언론인들의 인권보호 목적으로 구성된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s Sans Frontieres/RSF), 그리고 우리의 헌법(제21조 4항) 및 언론 기본법(제21조)이 규정한 언론의 자유와 그 제한(헌법 제37조) 및 공적책임(언론기본법 제3조)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더구나 언론이 정치권으로 부터 자본으로부터, 윤리로부터의 독립성 문제나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정규재 주필이 지적했듯 취사선택을 통한 편향적 보도로 국민들을 우롱하듯한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을 개탄하며 신문, 공중파, 종편방송이 설립 목적에 걸맞는 정정하고 정확하며 정의로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짜라시니 쓰레기니 심지어 종편이 '종일 편파' 방송의 줄인말이라는 시쳇말은 노년의 필자 가슴을 저미는 안타까움의 하나다. 한 때 신문과 방송이 쏟아내던 광우병 공포와 FTA 괴담 그리고 메르스 광풍 등은 아직도 우리의 눈과 귀엔 또렷하다. "글은 쓰는 사람이 주인이고, 말은 만들고 듣는 사람 모두가 주인" 이랬는데 그때의 신문과 방송은 지금 무슨 답을 할까 궁금하다. 칭찬에 발이 달렸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달렸단데, 과거는 수정도 보완도 있을 수 없고 모름지기 이를 받아들일 뿐이기에 오보나 편파는 엄격히 배지돼야 한다.

제작비 적게 드는 영상 프로들의 농담 따먹기 수준의 토크쇼나, 너도 나도 변호사란 이름으로 출연하는 TV쇼에서 알량한 법률상식으로 석학인양 아무나를 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위인들은 기초적인 상식인 '미확정 범죄의 무죄추정 원칙'도 모르는지 이사람 저사람을 화제에 올려 속된 말로 껌씹듯 하는 모습은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는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자만, 거만, 오만, 교만 등 4만으로 가득한 폴리페서들의 페단틱한 시국이나 정국 토크는 문외한 필자가 듣기에도 진력난다. 언론이란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모두가 '같이(together) 있어야 가치(value)있는 사람'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게 또한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이럴 때일수록 기억나고 더욱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60년대 젊은 실습 기자시절 '여론(Public Opinion)'의 저자로 젊은 프레스맨들에게 우상적 존재였던 세계적 컬럼리스트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 1889~1974)의 명언 "모두의 의견이 비슷하다는 것은 아무도 머리를 쓰지 않고 있다는 것과 같다(Where all think alike, no one thinks very much)"를 반추해 본다. 그리고 "말하는 권리가 자유의 시작일지는 모르지만, 그 권리를 소중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설파하며 미국의 사상 형성에 공헌했다고 평가받던 위업을 돌이켜 본다.

아울러 CBS 이브닝 뉴스 앵커로 방송사에 길이 빛나는 월트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 1916~2009)란 전설적 뉴스 캐스트가 전하던 클로징 멘트 "And that's the way it is(세상사 다 그렇고 그런겁니다)" 가 추억으로 회상된다. 1단짜리 기사 한줄을 취재하기 위해 날밤을 새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실 보도와 정확한 정보에 올인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며 알 권리니 알릴 권리를 외치며 굽은 붓으로 내 뱉는 부화뢰동식 글 한줄, 말 한마디가 정의로워지려는 우리 사회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말하고 쓰기 전에 양심과 보도의 원칙에 따라 곱씹어 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끝으로 사회 일각이나 조직에서 확인이나 검증되지 않은 내용, 심지어 이를 날조 또는 확대재생산 유포하는 경우를 들어 풍자했던 우스개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찌르는 송곳은 아무렇지 않지만 찔리는 가슴은 얼마나 아픈지를, 아니면 말고 식의 정제되지 않은 말장난 수준급의 언론을 향해 그 존재의 의미와 사회적 책임을 묻고 싶다.
*방송기자/남의 험담이나 허물을 방송기자처럼 마이크 잡은듯 마구 떠들어 대는 사람
*외신기자/집안이나 조직내 비밀을 외부에 꺼리낌 없이 무턱대고 계속 퍼뜨리는 사람
*편집기자/떠도는 미확인 소문을 자기 멋대로 바꾸거나 가감하여 확대 편집하는 사람
*사진기자/보지도 않은 사건이나 장면을 마구 현장 사진찍듯 엉터리로 전파하는 사람


<편집위원 서대남(徐大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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