默庵 朴鉉奎이사장 회고록 "默庵濟海錄" 발간
90평생 외길 70년을 바다와 함께 한 해운계 큰 별의 산 역사


 

▲ 서대남 편집위원
뵐 때마다 큰 소리로 '충성!" 하며 군대식 거수경례로 인사를 올리면, 작년 7월 개봉 영화 '인천상륙작전'서 맥아더 장군역을 연기한 '리암 니슨(Liam Neeson)' 모습으로 한국 해운업계의 노장군, (재)한국해사문제연구소 박현규(朴鉉奎) 이사장은 육군 하사 출신 필자에게 해운계 총사령관답게 멋진 거수경례로 답한다. 자주 인사차 집무실을 찾아 뵐 때나 해운 및 물류 해양관련 각종 행사장에 가면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이라 이같은 모습에 모두가 오프닝 세리머니 삼아 웃음이 터뜨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사장님, 오늘 경호는 제가 국가원수급 경호 기준에 따라 1급 최근접 경호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로 농담을 이어도 이를 재롱으로 넘기며 웃으시는 어른이다.

'살아있는 해운계의 전설', '한국해운의 큰 별'에 이어 심지어 '해기사 마피아의 대부', '해운업계의 호메이니' 등등 묵암은 한국해양대학을 제1기로 졸업하고 선장을 역임한 마도로스요 해기사 출신으로서 학문적 이론과 현장 실무와 선사 경영을 두루 섭렵한 해운계의 드높은 성좌, 법황적 '리베로'라 불리며 오늘에 이른 영원한 현역으로 구순을 넘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우리 업계 원로중의 원로로 존경과 추앙받기에 합당한 큰 언덕에 우뚝 선 거목의 실록인바 만시지탄이긴 하지만 최근 그의 인생 90년, 해운생애 70년을 되돌아 보는 자전적 회고록을 발간하여 범업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으며 회자되고 있어 필자도 일독을 했다.

영아기의 한국해운이 그간 대내외적인 숱한 질곡과 발전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상위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 해운을 위요한 근현대사 70년은 바로 묵암 박이사장의 퍼서널 해운 히스토리 LCL 밴에다 외연을 넓혀 핵심적 요소와 수치만 서타핑하면 참으로 충만한 FCL 한국해운 역사적 기록으로 차고도 넘치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해운 전체가 입체적이고도 합집학적으로 망라된 회고록을 속독하고 나서 거개가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묵암의 해운의 발자취가 놀라웠다. 그래서 가끔 필자가 "박 이사장님의 체험적 해운 정사 70년에 서대남의 어깨너머 수박 겉핥기식으로 들은 풍월 50년의 야사를 직, 병열하면 파생되는 기록적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여기왔고, 지금은 국가기록원에 귀하게 영구 소장된, 몇 년 전 필자와의 영상기록물 제작시의 대담이 다시 연상되기도 했다.

▲ 회고록 '默庵濟海錄' 앞면 표지
'默庵濟海錄(묵암제해록)'이란 이름으로 해운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번 회고록의 발간사에서 먼저 묵암은 그간 여러 사람이 권유했지만 이를 거절해 왔으나 한편으론 한 시대를 먼저 살고 가는 선배의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뭔가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일했던 연구소 이원철 전무의 끈질긴 권유와 목포해대 김성준 교수의 집필 도움에 힘입어 드디어 회고록이 빛을 보게 됐다고 술회했다. 국가 기간산업으로 해운이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견인차의 동력 중심에서 최선을 다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서울상대를 나와 해운 바톤을 이어받은 장남 박정석 고려해운 대표이사 회장, 서울공대를 졸업한 차남 박주석 경희대 교수, 이화여대를 거친 박선아 감정평가사 등 슬하 세 자녀들의 훌륭한 성장이 큰 보람이며 해운 다음으로 몸바쳐 이끈 로타리 클럽과 관련한 오랜 봉사, 그리고 한국해대 2기로 평생 동지요 동업자인 KCTC 신태범(愼泰範)회장과의 변함없는 동행이 크고 소중한 자산이라고 회고했다.

또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내고 현재 (사)바다살리기국민운동본부를 맡아 봉사하는 조정제(趙正濟) 총재는 축하글을 통해 "묵암은 모교 한국해대 육성에 최선을 다했고 해운입국을 필생과업으로 삼아 해운발전에 지금도 헌신하고 있으며 고 윤상송(尹常松) 박사의 뜻을 이어 무보수로 해사문제연구소 운영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예찬하며 "묵암은 마음 먹은 일은 반드시 이룩하는 소신과 집념이 강한 입지전적 인물이며 일체유심조(一切唯沈造)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좌표로 삼고 평생을 살아왔기에 음수사원(飮水思源)과 낙과사수(酪果思樹)란 옛말을 생각하며 그 공로를 오래 기리고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침묵의 암자에서 오랜 수련을 마친 수도사 같은 분이란 느낌을 받았고 세상을 달관한듯 동요하지 않고 그 누구의 말도 경청하는 모습이 감명스러웠다고 피력하며 묵암의 인간자체와 삶의 행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원한 해운계의 대부, 박현규 이사장은 1927년 7월 3일 경북 영천서 태어나자 마자 경남 울산으로 옮겨 자랐고 울산 향우회장을 오래 맡을 정도로 울산에 대한 애착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일본인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일어 구사에 능통한 것은 성인이 되어 해운업계에 종사하면서 자주 일본을 다닌 탓도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 유학을 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해양대학을 졸업 후 해기 면장을 취득하고 대한해운공사(KSC) 소속 평택호 3등항해사로 첫 승선하여 2항사로 진급 후 자신도 모르게 남조선노동당 포섭 대상자 명단에 올라 검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 경력도 있다고 꿈많던 뱃사람 젊은 마도로스 제복의 해상생활을 회상했다.

또 해운공사 해기계장을 지내며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해공노조 초대위원장을 맡아 선원복지를 위해 투쟁한 이력도 있다고 적었다. 육근 후 다시 배를 타고 동남아 취항 제주호 선장을 포함 8년간의 승선경력을 마감하고 1961년에 해공 해무과장을 맡아 육근을 시작했다.
이어 1964년엔 풍국해운을 설립하여 30대에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제1차 계획조선 신양호 건조에 참여 고려해운 이학철과 합류했던 시절도 회상했다. 2차 계획조선엔 실패하고 3차에서 보리수호를 건조하여 고려해운 전무이사로 취임했고 이어 1980년 고려해운 대표직을 맡자 해운장기 불황이 겹치고 드디어 해운산업합리화란 대 소용돌이를 맞던 때도 소상히 밝혔다. 해운항만청과 한국선주협회가 중심이 되어 재무당국, 금융업계와 함께 해운계의 천지개벽을 통해 부활을 모색했던 가슴 아픈 역사의 재편과정었기에 잊힐리가 없었으리라.

묵암은 해기사이면서도 면학에도 힘써 국민대학 학사 편입으로 법학을 별도 전공, 서울대 서돈각(徐燉珏) 박사와 연세대 손주찬(孫珠璨)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상법이나 해법학회의 기초를 다진 업적이나 윤상송(尹常松) 박사와 함께 한국해운학회를 창립하는 등 학문 분야에도 앞장 서 관여하는 열성을 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같은 한국해대 1기로 필자와 교호한 인사로는 당시 법양전용선 부사장을 역임후 타계한 박현호(朴鉉皓) 묵암의 친형, 이준수(李俊秀) 학장, 정희정(鄭熙亭)도선사, 이용규(李龍奎) 도선사, 허동식(許東植) KR회장,  김동균(金東均) 도선사, 김동화(金東華) 라스코사장, 김상진(金相珍) 부산청장 등등 지금도 면면이 또렷이 시야에 점철된다. 그리고 묵암 회고록 등장 인물 중 필자와 더불어 직간접으로 자기 소속 조직을 위해 함께 참 많은 일도 하고 다투기도 했던 정연세 청장, 최재수 박사, 박순석 위원장, 이헌탁 사장, 김현리 총장, 박원규 회장 제위께도 항상 기억에 담고 있다는 회억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어느 산업분야건 역사라는 공작물은 인물이 그 중심이 되듯 묵암 회고록을 접하고 보니 필자가 종사한 업종이나 조직이 전체를 묶어서 볼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이밖에도 업계는 물론 정부측도 등장하는 인사들의 상당수를 필자도 기억하고 있어 알던 사람이 등장 할 때마다 다시 만난듯 반갑고 거명 자체만으로도 그 시대와 사람을 만나 당시 업무를 다시 함께 하며 호흡하는 것 같은 회상으로 반추됐다. 나이는 15, 6년 밑이지만 60년대 교통부 출입기자 시절,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한국선주협회를 이끌던 주요한(朱耀翰) 회장의 권유로 선협으로 옮겨 약관 20대부터 만나기 시작, 30대를 거쳐 4~50대에 이르기까지 업무차 책상을 마주했던 인물들 기억이 생생히 밀려온다. 특히 선협 해무부장 시절 실습선 후원금 징수를 맡아 악착같이 조속납부를 재촉하여 한바다호와 유달호를 후원하던 기억과 이를 계기로 한바다호를 타고 인도의 갠지스와 콜카타를 비롯 미얀마의 양곤, 그리고 일본의 나가사키와 대만의 키룽항 등을 뱃길로 다니던 일과 신민교(辛玟敎) 학장. 민우홍(閔右泓) 연습감, 허일(許逸) 선장, 배종욱(裵鐘旭) 기관장 등등 이 순간도 함께 한 당시 승선생활과 얼굴이 선명하게 눈앞에 클로즈업된다.

▲ 평생동지 박현규 이사장과 신태범 회장의 정겨운 귀엣말
문무를 겸한 묵암은 그 밖에도 고려대 경영대학원과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고 1982년 모교 한국해대에서 명예 경영학박사를 취득했다. 또 학연 및 업무와 관련된 경력으로는 한국해대 동창회장, 대한해기원협회 부회장, 한국컨테이너수송협의회 회장, 한국해양소년단 부총재, 한국선주협회 부회장, 한국해대기성회 회장, 한국선급협회 이사, 한국해사재단 이사, 한국예선협회 회장, 한국해대발전위원회 회장 그리고 남서울 로타리클럽 회장과 국제로타리클럽 3640 총재를 역임했고 현재도 한국해양문학회 회장과 무애문화재단 이사장 등은 현재도 맡고 있다. 또 생애 크고 작은 공적과 수상 기록이 많지만 1978년 제2회해운의 날에 부총리 표창을 비롯하여 재무부장관 공로표창, 제4회 해운의 날 산업포장, 제6회 해운의 날 5,000만달러 운임의 탑 수상, 제18회 해운의 날 해운의 탑 제1호 영득, 자랑스런 한국해대인상 제1호를 수상했고 2010년에는 한국선주협회 창립50주년 기념 공로패 제1호를 영득하는 영예를 기록했다.

실제 집필을 맡았던 김성준 교수도 대학의 대 선배, 재직시절 조직의 총수, 학문의 길을 선도해준 인생멘토로 모시면서 묵암의 90여년의 생애를 한권의 책으로 정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고백했듯이 필자 역시 영문도 모르고 영문학을 전공하고 경제도 모르며 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해운도 모르며 해운계로 진로를 바꿔 오늘에 이르며 해운변방에서 50년은 족히 묵암의 발자취를 타산지석 삼아 뒤따르며 배우고 익히며 비교적 객관적 입장에서 관조해 왔기에 나름대로 신태범 회장과 함께 두분을 엮어서 그간 듣고 보고 읽은 사실을 쓰고 적을 일이 너무나 많아 필설로 이를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란 생각이 든다.

끝으로 모름지기, 묵암 박현규이사장님의 옥체가 계속 건안 하시와 우리 후진들이 오래도록 모시고 삶의 귀감삼아 영원히 기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간원하고 다음 기회 속편으로 남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더 쓸 기회를 기대하며 아무래도 오늘은 예서 무딘 필을 접어야 할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
 

저작권자 © 쉬핑뉴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