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남 편집위원
1976년 3월 13일 항만청이 새로운 해운행정의 최고 집행기구로 출범하기 전 우선 정부기구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1955년, 해무청장 산하에 감리과, 해사과, 조선과를 거느린 해운국과 수산국, 시설국 등 3국으로 운영됐다. 이어 1961년 정부조직 개편으로 해무청이 교통부로 개편되어 당시 해운국 해사과는 내항계, 외항계, 선원계, 검사계로 업무가 분장 됐다. 1970년 2월 다시 조직법을 개정, 교통부 해운국 산하에는 선박담당관, 통신계획담당관을 비롯하여 내항과, 외항과, 항만진흥과 항만지도과, 선원과, 선박과를 두고 부산항만관리청과 인천, 군산, 목포, 여수, 마산, 울산, 포항, 제주 등 지방해운국을 신설했다.

필자는 당시 1966년부터 제14대 서울시장에 임명돼 불도저란 별명을 얻으며 오늘의 서울을 만든 김현옥(金玄玉)시장의 서울시청 출입 후에 김구(金九) 선생 2남으로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신(金信) 장군이 장관으로 부임한 교통부로 출입처를 바꿨다. 희미하게 확실찮은 기억으로 정영훈(鄭泳薰) 해운국장과 김상진(金相珍) 선박담당관, 김병훈(金秉薰) 내항, 최각(崔角) 외항, 이석환(李錫煥) 선원, 김재승(金在昇) 선박과장과 김준경(金準卿) 항만진흥, 박수환(朴秀煥) 항만지도과장을 상대로 취재를 했고 오용운(吳容雲)의 철도청과 이한림(李翰林)의 관광공사까지 커버를 했었다. 최훈(崔薰), 최장화(崔章和), 장학범(張鶴範), 이원(李元) 사무관도 생각나고 출입기자단 27명은 임유순(任裕淳)의 바톤을 이은 선우만진(鮮于萬鎭) 공보담당관이 맡아 육운, 항공, 관광국을 두루 커버하느라고 무척 애를 썼던 것으로 회상된다.

 
그뒤 주요한(朱耀翰) 회장의 권유로 한국선주협회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1976년 항만청 발족과 함께 그 무엇 보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일은 해운사상 첨으로 온통 해운계가 떠들석 했던 '제1회 해운의 날' 행사다. 1977년 3월 12일, 장충동 국립극장서 '四海躍進'이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휘호를 앞세워 국군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姜昌成) 예비역 육군소장 출신 항만청장이 육군중장 참모총장 출신 최경록(崔慶祿) 교통부장관을 주빈으로 모시고 '제1회 해운의 날'이란 역사적 행사를 41년전 개최하던 그때를 필자는 잊을 수가 없다. 해군참모총장 출신의 선주협회장 이맹기(李盟基) 제독(코리아라인 사장)을 모시고 사무국의 조사, 홍보 업무를 맡고 있던 30대 중반이었다.

1960년 초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의 효율적 시행으로 산업구조의 개편과 광공업의 발전 등으로 국내 생산 규모가 급격히 늘어남과 아울러 수출입물량 증가에 따른 원자재 도입량 급증에 따른 해상물동량 적기 수송을 위해 정부는 UN개발계획(UNDP) 기금에 의한 항만개발계획의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결과 항만건설에는 연속적인 집중투자가 불가피하고 우리의 내자만으로는 방대한 투자규모를 감당하기 어려워 대외 장기저리의 차관선을 찾던 중에 IBRD(세계개발은행)가 부산항과 묵호항 건설에 당시 8,000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던 것이다.
차관 공여 전제조건 '포토 오소리티(Port Authority)' 설립의 권고로 전국 항만의 건설 및 관리업무를 관장할 항만청 설립을 위해 1975년 12월 31일자로 정부조직법을 개정 공포하기에 이르렀다.(법율 제2886호). 드디어 1976년 3월 13일 대통령령 제8019호로 항만청 및 지방항만관서의 직제가 공포되어 '항만청(Korea Port Authority)'과 지방청이 발족됐고 그해 3월 19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263번지 소재 삼양빌딩에서 현판식을 갖고 교통부 외청으로 출범했다. 이어 해운입국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77년 12월 16일자로 명칭을 '해운항만청(KMPA/Korea Maritime and Port Administration)'으로 변경했다.(법률제3011호)

이같이 부산항 BCTOC(자성대컨테니어전용부두) 건설의 자금을 댄 IBRD가 투자금의 환수를 위한 요청에 의해 교통부 해운국과 건설부 항만건설국의 기능을 합해 항만청장으로 부임한 강 청장은 업계 순시 첫 마디가 "항만청장은 비록 차관급이지만 대통령께서 수출입국의 목표 달성을 위한 해상운송의 중요함을 고려, 국무회의에 배석토록 하라는 명을 받았다"며 윤필용 사건의 보안사 시절 실세를 과시라도 하듯 초대 청장으로써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던 인상을 받은 기억을 필자는 지금도 지울 수 없다.

해운계의 행정 수장이 교통부 장관에서 항만청장으로 강등된 건지 아님 교통부 해운국장에서 항만청장으로 격상된 건지 이리송했다. 여하간 개청 첫돌을 맞아 이날을 기념함과 아울러 범국민 해운사상 고취와 홍보를 위한 목적의 다음 해 3월 행사 계획이 전년 세모부터 요란하게 시작되었다. 날자는 3월13일이 일요일이라 하루 앞당겨 12일 토요일로 결정됐다. 정부측은 항만청 국과장급 전체를 위시하여 행사준비 실무책임은 행정관리담당관, 훈포장 상신은 총무과장, 대외 홍보는 정부측은 당연히 공보담당관으로 정했다.

업계 홍보는 필자가 실무 책임을 맡고 선주협회를 주관단체로 하여 해운.항만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산하 전 업체가 참여토록 했다. 소요 경비는 업종의 비중에 따라 적의 배분, 갹출하여 선주협회가 일괄 지출토록 집행을 위임하는 방식을 택했다. 우선 관심은 항만청 신설 1주년 기념에 맞춰 대통령 휘호를 내려받는 일이었다. 대통령도 컨테이너 부두 신설에 관심이 많았던 까닭도 있지만 항만청 고위 간부들이 청와대 비서실과 긴밀한 협의 끝에 보내온 휘호는 '四海躍進(사해약진)'이란 네 글자였다. 우선 청장 이하 업계 모두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는 몰라 고전을 들추기도 하고 한문학자를 찾아도 가고 관계 원로급에게 해석을 부탁해서 이를 터득하고 난 강 청장은 휘호의 뜻을 업계 및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독려를 했다. 중국 고전에 '四海'는 천하를 일컬음이며, 천하는 곧 세계를 의미하고 이는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해운의 미래상과 당위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부각시키기로 한 것이다. 필자는 우선 이를 정성들여 복사를 해서 전 회원 선사 사장들에게 배부하고 잘 보이는 위치에 걸도록 당부했다.

항만청 진영일(陳永日) 공보담당관은 출입 기자단을 상대로, 업계 홍보를 맡은 필자는 전문지 기자들을 상대로 처음 맞는 해운의 날을 전국적으로 최대한 널리 알리란 지시를 받고 행사를 앞 둔 한 달 전부터 광화문을 비롯한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 등 11개소에 대형 아치를 세우고 서울 시내 5개소에 선전탑을세우는가 하면 식장인 국립극장에도 거대한 현판을 부착하여 행사 분위기를 띄우는데 최선을 다했고 간간히 행사진행 중간 체크를 위한 점검을 일삼았다. 또 기념 패넌트를 만들고 기념우표를 발행하는가 하면 3만6천갑의 기념담배를 만들어 일선 말단 직원에서 부터 등대수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전달했다.

1977년 3월 12일(토) 오전 11시 기념식 당일에는 '해운의 노래'를 작곡하여 연습한 숭의여고생 120명과 경찰악대를 데려오는 등 아침 일찍 부터 전체 준비 요원들이 현장에 미리 나와 주빈 동선을 따라 철저하게 리허설도 했다. 드디어 행사의 막이 오르자 국립극장 행사장은 축제의 물결로 들끓었다. 최장관을 주빈으로 행사가 시작되자 강창성 청장은 "현재 우리의 해운세력은 선복량 3백만톤을 돌파하여 세계 제19위의 해운국으로 발전했고 올해 안에 50만톤을 더 늘여 6억달러의 운임수입을 가득, 1981년까지 선복량 6백만톤, 15억달러의 운임수입을 달성하겠디"고 강조했다.

한국 해운 역사상 최초로 밤양전용선(주)의 박건석(朴健碩) 대표와 조양상선(주) 박남규(朴南奎) 대표의 동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77개의 유공, 해운 및 항만 업체와 종사자들이 개인 포상을 받는 쾌거를 맞았다. 젊은 나이 종이쟁이(?)를 접고 해운계로 디비에이션한 보람과 자부심을 필자 생애 첨으로 만끽한 순간이었다. 1961년 총 10만톤에 불과하던 선복량이 15년만에 30배로 늘어났고 해운관서도 외청으로 독립했으니 할 일도 많았겠지만 당시를 회상해 보면, 선박 도입문제 등 현안을 다루는 당국이나 업계의 자세들이 진지하고 치밀했고 한 집안 살림을 같이 꾸려가듯 머리를 맞대고 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신설 부처라 각 부서별 인력도 많이 필요했기에 행정고시를 거친 사무관도 동시에 다수가 배치되어 활발하게 일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기자실을 떠나 업계 구심단체 선주협회로 앞서 와 있던 필자도 한 식구처럼 어울렸었다. 40년이 넘었으니 여러 보직을 두루 섭렵하며 관리관급 이상으로 봉직했던 이들도 지금은 거의 퇴임했지만 그 당시 항만청에 왔던 17회 공채 출신 손순룡, 김종태, 김성수, 최정상, 허범도, 이기찬, 안세영, 이정환, 이갑숙, 정이기, 최낙정, 이용우, 서정호, 박원경 등으로 더러는 간혹 지금도 만나면 70년대의 추억을 함께 더듬는 노스탈지어 말벗으로 옛 얘기로 수런대곤 한다. 어느덧 희수를 맞고 보니 젊기도 했거니와 그때 그 시절이 참으로 좋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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