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칼럼
[서대남 편집위원 칼럼]玄永源회장과 鄭周永왕회장, 사돈간의 엄동설한 '새벽 해장국 미팅'
쉬핑뉴스넷  |  webmaster@shippingnewsnet.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2.26  07:51:2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 서대남 편집위원
필자가 삼성그룹을 설립한 전 이병철(李秉喆) 회장(1910~1987)과 함께 건국 후 사기업의 양대 산맥을 이뤄 오늘날 한국경제의 초석을 세운 전설적인 전 현대그룹의 왕회장 정주영(鄭周永) 회장(1915~2001)과 사돈간인 현대상선 현영원(玄永源)회장(1927~2006)을 동시에 한번쯤 회상해 보는 까닭은, 두 분 모두가 고인이 된지 오래지만 가끔 나 혼자서도 "그래, 그래서 그 분이 남다르고 그렇게 큰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거야" 를 되뇌이며 나름대로 흥미롭게 들은 두 분의 이야기 한 토막을 회상함으로써 한국 해운 및 조선을 중심으로 정 회장과 현회장을 다시 한번 기리고 돌이켜 보는 계기로 삼는다.

그는 우리나라의 건설분야를 개척했고 조선공업을 일으켰으며 자동차 공업의 활로를 열어 'HYUNDAI'란 깃발을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드높이 휘날려 경제대통령이란 별칭에 걸맞게 대기업 총수로서 성공한 역사적 인물이자 현대상선과 현대중공업 및 현대미포조선 등 해운관련 조선공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발전 성장시킨 공적으로도 너무나 유명하다.
'나의 삶 나의 이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제하의 회고록 머리말에서 정회장은 "나는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노력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지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로 시작해서 인류 역사나 세계 각국의 발전사를 보면 지구상의 많은 국가, 기업들이 흥망성쇄를 거듭해 오고 있는데 이의 근본적인 이유는 국가나 기업의 중추를 이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진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가에 달렸다고 피력하고 있다.

   
▲ 故 정주영 회장
5천 년 역사를 표본으로 보아도 그 긴 역사를 통해 진취적인 기상이 살아 있을 때는 대륙으로 한없이 발전해 나갔었지만 그 기상이 꺾인 후 육지나 바다로도 뻗어나갈 생각은 않고 좁은 땅 안에서 집안과 형제끼리 서로 다투는 데만 세월을 허비하기도 했다고 개탄하며 그 예로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 근대는 스페인 포르투갈이 선진 대열에서 자취를 감췄고 로마제국이 사치와 부패와 게으름이 극에 달해 국방조차 용병에 맡겼다가 패망했다고 개탄했다. 그래서 불굴의 개척정신, 창의적인노력, 진취적 기상을 기업정신으로 삼았던 위인이었다.

1992년 겨울이니까 26년 전쯤 얘기다. 호남 출신으로 영남 출신부인 김문희(金文姬/1928~)씨와 결혼 후 장인, 김용주(金龍周)씨의 바톤을 이어 받아 신한해운 경영을 맡아 오던 현영원씨는 1984년 해운산업합리와 과정에서 현대상선과 합쳐 동사 회장직을 맡고 있을 때 들려준 정주영 회장과의 이야기 한 토막이 지금도 필자에겐 잊혀지지 않아 필을 들게 됐다. 우선 보성고를 나와 연세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한 정회장의 5남 정몽헌(鄭夢憲/1948~2003)과 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인 현회장의 2녀 현정은(玄貞恩/1955~)이 1976년 결혼을 함으로써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 된 건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다.

   
▲ 故 현영원 회장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으나 92년 늦가을 부터 현대 현회장이 한달간인가 병원에 입원을 해서 치료를 하는 바람에 무두가 궁금해 했다. 그러던 어느날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와병중 문병을 못 갔던 탓에 사무국 박창홍(朴昌弘) 전무이사와 상무이사 필자는 사무실로 뒤늦게 문안 인사를 갔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현회장이 스스로도 정회장에게 너무나 놀랐다며 들려주는 스토리는 대충 이렇다. 퇴원 후 오랜만에 전화를 받은 현회장에게 그간 바빠 병문안도 못가서 퍽이나 미안하다며 간단히 식사라도 나누며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하더란다. 감히 어떤 사돈인데 싶어 이것 저것 묻는 정회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걸 사돈 형편대로 정하시면 따르겠습니다"는 식의 화답을 했단다.

오간 대화를 재구성해 보면, "내가 대통령에 출마해서 지금 막바지 선거유세로 한창 바쁘니..."로 시작해서 만날 "장소는 수원 어디 해장국집이 좋겠습니다", "날자는 모레로 하고 시간은 새벽 4시로 합시다"로 얼떨결에 약속은 했지만 사돈 형편대로 하라고 한 바람에 토 한마디 달 겨를도 없이 일방적으로 장소와 날짜와 시간과 메뉴까지 정해진 것 까지는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엄동설한 새벽 4시에 맞춰 약속 장소에 가려면 새벽 2시엔 자택을 출발해야 했고 그러려면 운전기사는 12시 자정에는 서둘러 자기 집을 출발해야 현회장 댁에 2시 안에 도착해서 픽업을 해야 여유있게 약속 시간을 맞출 수 있었기에 긴장된 마음에 뜬눈으로 기다리다 출발을 했다고 했다.

12월 춥고 캄캄한 밤길을 달려 새벽 4시쯤에 약속 장소에 당도하니 정회장은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더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더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오르는 해장국집이 문을 열자 첫손님으로 개시를 하고 악수를 나눈 후 깍두기에 달랑 해장국 한 그릇씩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그간 밀린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잠시 후에 정회장은 그곳 시장 일원의 새벽 선거유세를 하러 홀연히 떠나더라고 했다. 사돈끼리 고작 30분간의 새벽 퇴원 위로연(?)을 위해 수원을 갔다가 급히 되돌아오는 길엔 라디오에선 이미 높은 함성의 정회장의 선거유세가 요란했다고 했다. 그리고 사무실에 와서 텔레비전을 켜니 벌써 수원 유세를 끝내고 금세 울산으로 내려가 양팔을 치켜 들고 선거구호를 외치며 유세차를 타고 시가지를 누비고 있는 걸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당시 현회장은 사돈끼리 높낮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워낙 거물급인데다가 나이가 12년이나 위에 또 딸 가진 입장이고 보니 을의 처지를 자처하는 듯 했고 게다가 정회장이 희수가 넘은 나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디서 그런 힘과 정열과 용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를 유심히 듣고 있던 박전무와 필자도 과연 정회장은 동화속의 거인처럼 철인이란 어휘 밖에는 달리 표현 할 방법이 없다고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 해에 수억씩 뇌물을 주려니 차라리 내가 직접 대통령을 하는 게 낫겠다"고 정계 진출 이유를 밝혔던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후보는 민자당 김영삼의 997만표(41%), 민주당 김대중의 804만표에 이어 388만표(16%)를 얻어 3위에 그쳤지만 국민당을 창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의원을 거쳐 제14대 대선에 출마했던 것.

강원도 통천 송전의 아산(峨山) 마을에서 태어나 열네살에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돌밭을 개간하는 농사일부터 시작했던 정회장과는 달리 현회장의 가계도는 천양지차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호남 최고의 명문 집안에 갑부 출신으로 할아버지 현기봉(玄基奉/1855~1924)은 진사시에 급제한 영암지역 최대 지주와 유지로 활동했고 경성 해동물산주식회사와 목포창고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근대 영암지역에서 으뜸가는 부호였다.
아버지 현준호(玄俊鎬/1889~1950)도 명치대학을 거쳤고 선친으로부터 7,000섬을 수확하는 토지를 포함하여 전재산을 물려 받아 호남을 대표하는 기업가에 고위 관료도 역임하고 호남은행을 설립하여 은행장을 지낸 갑부 세습자였다.

그렇다 보니 장남인 현회장은 왕자처럼 자라 광주고보를 거쳐 서울대학 영문과를 졸업후 한국은행을 거쳐 대한제철과 신한은행을 경영하다가 1984년 해운산업합리화 과정에서 현대상선과 합쳐 회장직을 역임했고 해운업계 최고의 명예직 수장인 한국선주협회장을 역임했으니 해운인으로서는 가장 럭키한 일생을 보낸 셈이다. 선주협회 회장단회의 오찬 단골이었던 옛 당주동 세종빌딩 근처서 송하(松河)란 한정식집을 경영하던 동향 출신의 박 모 여사장은 어릴 때 현회장댁 저택은 궁궐로 생각했고 거기 살던 왕자(?)에게 이렇게 식사를 제공하는 영광은 감개가 무량하다고 회고하던 토박이 전라도 사투리는 새삼 기억에 새롭기만 하다. 정회장과의 결정적 인연은 대한제철 경영시 자금 사정이 어렵던 현대건설에 철근 공급을 한 게 계기가 됐고 그 인연이 자녀들까지로 이어져 사돈간이 됐으니 인연치고는 보통 인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교통부를 출입하며 해운업계를 중점적으로 취재할 때도 사실 두 사람을 만날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필자가 선주협회로 옮겨와 조사부장으로 일할 때 현대조선이 최초로 그리스의 리바노스로부터 수주한 26만톤급 대형유조선(VLCC) 세척이 1973년 오일쇼크 여파로 건조후 인도를 포기하자 전화위복이랄까, 1976년 현대상선의 전신, 아세아상선이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눈여겨 봤기에 정회장에 관한 이야기는 적어도 조선분야만 해도 몇 권의 대하소설로도 부족하겠다. 국적 회원 선사들이나 외국 선주들이 신조선 진수나 인수식을 가지게 되면 으례 선주단체 실무자로 여러번 참여할 때 리셉션 행사장에서 정회장을 볼 기회는 많았고 늘 인자하게 웃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현회장을 비롯한 주변에 관해서도 60년대 후반부터 50년은 족히 해운업계 변방을 서성거렸기에 이미 희수에 이른 필자에게는 26년전 전해들은 이 짧은 겨울 새벽 해장국 이야기를 두 회장을 기억하는 모두에게 전하고 싶다. 그리고 정회장의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전국경제인연합회(FKI) 회장을 맡아 여의도에 새로운 회관을 건립했고 산하에 전 산업을 망라하여 업종별 정보를 교환하는 실무조직 '산업정보조사위원회'를 격려하기 위해 19층 난초홀에 모아 가끔 오찬을 베푸는 자리에서 "젊은 여러분께 당부컨데, 나 같으면 월급날 우선 급여의 30%를 떼서 먼저 은행에 저축을 한 나머지 봉투를 들고 집으로 가겠다"던 평생 잊혀지지 않는 충고가 재산을 모으진 못 했어도 "가진 건 없지만 부족한 것 또한 전혀 없다"며 오늘을 살아내는 필자의 호구지책 좌우명이 된 같기도 하다.

현회장의 경우는 신한해운 사장 시절, 북창동(?) 어딘가 업무 협의차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오렌지 쥬스 한잔까지는 좋았는데 서랍에서 큰 선물이라도 주듯 조심스레 겨우 양답배 한개비를 살며시 꺼내 건네주던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자랑할 일도 많았지만 가끔 필요시 이력서를 받아보면 몇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여러개의 명예직함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또 그중에서도 필자가 기자출신이란 걸 아는 터였는지 자신도 동아일보 이사직함 소지자임을 만날 때마다 강조하던 기억이 새롭고 원목수송을 하던 신한해운 시절 특별히 필자와 친근했던 강대홍 상무와 손정남 부장이 생각나기도 한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쉬핑뉴스넷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낙수(뒷이야기)
많이 본 기사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쉬핑뉴스넷  |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23길, 47 미도파광화문B/D 601호  |  대표전화 : 02)6228-5750  |  팩스 : 02)6499-0668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등록일) : 서울 아 02761(2013.08.20)  |  발행일 : 2013.09.01  |  발행인·편집인 : 정창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창훈
Copyright © 2013 쉬핑뉴스넷.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