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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남 편집위원 칼럼]첫 항해, 한바다호, Keelung항, 그리고 '아이스 바나나'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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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30  0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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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남 편집위원

과일가게 또는 식탁이나 뷔페에서 바나나를 보면 필자는 늘 지룽(基隆/Keelung)항이 생각난다. 
그간 타이완을 몇 번 가긴 했지만 뜻밖에 이번에 다시 이곳을 간 건 아마도 40년쯤은 되는 것 같고 이유같지 않은 이유지만 몇 년 전 부산항 출항 75,000톤급 Costa Cruise 소속 Victoria호를 타고 오키나와(沖繩)를 다녀 온 적이 있지만 이번에 다시 143,000톤급의 Princess Cruise 그룹의 Majestic호를 타고 오키나와를 가게 된 건 출항지가 옛 지룽항이라 다시 한번 그곳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종이쟁이 출신 선주협회 조사부장을 어느날 갑자기 선기장 경력의 마도로스가 맡아도 모자랄 전혀 생소한 분야의 해무부장직으로 보직을 변경시키는 바람에 졸지에 짝퉁 해기사가 된 필자는 첫 고행으로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한국해대 연습선 '한바다호'를 타고 난생 처음 입항한 항구가 지룽항이었기에 첫사랑처럼 늘 잊혀지지 않는다.
게다가 배에서 내리던 첫 날 우선 눈에 띄고 신기했던 건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보기 드문 바나나가 너무나 흔했고 이를 싼 값에 얼마든지 맘 놓고 사먹을 수 있어 참으로 신났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고 이를 계기로 팔자에 없는 배와 인연을 맺고 살아온 온갖 상념들이 편린처럼 떠오른다.

고향에서 낙동강을 나룻배로 몇 번 건넌 게 승선 경력의 전부인 필자로선 우선 제대로 밥벌이를 하려면 승선 경력을 쌓아야 했기에 그 첫 훈련으로 선원수첩 없이 열외 승선이 가능했던 한국해대 35기생들에 묻어 42일간의 원양실습에 합류하여 난생 첨 항해길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희미한 기억으로 당시 신민교(辛玟敎/8E) 교수가 학장직을 맡았었고 연습선 한바다호 조직은 연습감에 민우홍(閔右泓/7E) 교수, 그리고 허일(許逸/15N) 선장과 배종욱(裵鍾旭/22E) 기관장, 유대근(柳大根) 통신장을 비롯하여 지금도 얼굴이 떠오르는 곽규석(郭圭錫/28N), 박석주(朴錫柱/28N), 문경만(文慶萬/28E), 김시화(金是和/30N), 이중우(李重雨/31N),  이태우(李太雨/32N) 사관, 그 밖에 여러 갑판과 기관 부원들이 함께 타고 갔던 추억이 생생하다.

또 좌학과 실습과정 후 해기사 면허를 취득하고 선사에 취업 배정을 하거나 해외 취업문제를 협의 결정하는 해무 및 해원 관련 행정적인 문제는 실습과장 민병언(閔丙彦/10N) 교수와 이은영(李銀泳) 실습계장이 필자와 함께 늘 협의 결정하던 생각도 나고 갑자기 타계한 민교수의 차분하고 온유하던 모습이 갑자기 눈앞을 스친다.
사실 필자가 당시 한바다를 타고 나간 또 다른 이유는 한국해대 한바다호나 목포해대 유달호의 승선 근무 요원들의 급여 수준이 일반 상선에 못미쳐 연습선 후원회를 만들었고 필자가 국내 입항 모든 선박들로부터 부담금을  강제 징수하는 악역(?) 세리(稅吏)역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연습선이 부두에 닿으면 보통 한 항구에 2박 3일간 정도 체류했던 것 같다. 크루즈 여행시 쇼우 패스(shore pass)를 발급받아  기항지 투어를 하듯 필자는 별도 인원으로 승선한 해대교수 1명, 의사 1명과 함께 3인조 외인부대를 이뤄 지룽항을 돌고 다음 날은 타이페이(台北)를 갔고 고궁(故宮) 박물관과 장개석(蔣介石)의 중정기념당 등을 구경했다.
이어 인도양을 거쳐 인도의 갠지스강과 캘카타, 그리고 버마(미얀마)의 랭군(양곤)에 기항하여 아웅산 묘소를 참배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일은 필자 방문을 교우회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고 당시 초대 대사 이계철 선배와 코트라 초대 무역관장 장소웅 친구가 우리 3인조를 대사관저로 초대, 남국의 정서를 무르 녹이며 밤새 여흥을 베풀어 줬던 후대였다.

또 인도의 갠지스강과 캘카타, 이어 돌아오는 길엔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원폭 현장을 둘러본 기억이 나고 귀국하니 통행금지가 폐지된 기억도 난다. 그러나 배를 타고 한 달 반을 첫 경혐으로 원양을 항해하는 과정에서 모두에 언급했듯 필자 생각에는 지금도 당시의 바나나 풍년을 맞았던 기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고향을 언제 떠났노 / 바나나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외롭구나"
별다른 보직이 없는 승선이고 보니 긴 항해중 무료한 시간을 장기를 두거나 냉장고에서 언 바나나를 혼자 꺼내 먹으며 소일했고 바나나에서 느끼는 열대 상징성이 김동명(金東鳴)의 옛 시 파초(芭蕉)를 생각나게 했었다.

요샌 너무 흔해 백화점 지하 식품코너나 대형마트는 물론 재래시장 구멍가게, 심지어 길거리 노점상에까지 지천으로 널려있는 게 바나나다. 그러나 40여년 전만 해도 한사코 달랐다. 과일인지 채소인지는 잘 모르지만 필자에게 바나나는 너무나 귀하신 (?) 존재였다. 사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어릴 때는 물론 어른이 돼 애들을 키우면서도 바나나는 이름과 생긴 모양만 알았고 그것도 그림책에서나 봤지 먹어본 기억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기억에 없는게 아니라 진짜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서울서 부산으로 내려가 부두를 떠날땐 섣달의 추운 날씨였는데 지룽항 도착하고부터는 계속 더운 날씨에 기항지마다 우선 눈에 띄는게 바로 바나나였고 동승한 학생들과는 떨어져 혼자 낯선 항구와 거리를 걸으면서 필자의 관심은 온통 바나나에만 집중했던 기억이 전부다. 싼 맛에 우선 두서너 다발을 사서 점심 저녁 한 두끼를 바나나로 배를 채웠고 당시 그리도 귀한 바나나를 언제고 마음놓고 실컷 먹을 수 있다니 그저 신나고 황홀한 기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먹다 남은 건 배로 들고 와 선실의 침대옆 작은 책상에 올려두고 밤참으로도 바나나를 주식으로 먹었다.

인도의 캘카타항(콜카타항)과 버마(미얀마)의 랭군항(양곤항)을 가려면 항행시간이 보름 정도가 걸린대서 출항 전날 우선 비축용 바나나를 산더미처럼 크게 한보따리 샀다. 선실에서 오래 갈무리를 할 방법을 골돌히 연구끝에 시험삼아 몇 송이를 냉동실에 넣어 얼려서 먹어봤다. 그 귀한 바나나를 얼려서 아이스 바나나를 만들어 먹으니 차겁고 혓바닥서 사르르 녹는 맛과 향이 기가 막혔다. 언 다음에 껍질 벗기기가 힘들어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미리 껍질을 벗겨 그릇에 담아 얼렸다 꺼내 먹기에도 아주 편했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늘 바나나를 볼 때마다 40년전 옛 생각이 나서 언제 다시 저 바나나를 얼려서 먹어보리라 맘만 먹다가 마침내 설명절을 기해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지난 설을 며칠 앞두고 손주들이 오면 세뱃돈에 더 해 이 할아버지가 기가 막히는 아이스 바나나를 몰래 만들어 짠! 하며 깜짝 쇼를 해서 "우리 할아버지가 최고!" 란 명성과 스포트 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리라. 야무진 꿈이었다. 옆방 권사에겐 신고도 없이 몰래 냉동실을 살짝 살짝 열어보기를 수십여번. 드디어 디데이가 왔다. 설날 아침 추모예배를 끝내고 세뱃돈을 건넨 후 "아이스 바나나 짠 ~!!" 하고 꺼낼 순서가 임박했다.

"다음은 빅 하고도 스페셜 이벤트로 이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세계서 젤 맛있는 아이스 바나나를 선물하겠습니다" 란 오프닝 멘트가 떨어지기도 전에 필자 예하 분대원(?) 모두 9식구중 이 할아버지를 제외한 8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바나나는 필요없어요. 안먹어요!" 라고 외쳤다. 손주녀석들 보다 애비 애미들이 한술 더 떠 "요새 누가 바나나를 먹어요!" 란 한심하고 기가 차다는 말투에 필자는 아연실색,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했고 괘씸하기 이를데 없었다.
바나나는 커녕, 생일날이 아니면 계란 하나도 구경하기 힘들던 시절의 필자가 작심하고 만든 기획상품 '아이스 바나나'.

냉동실 밖을 나와 이벤트 행사에 참가하지도 못하고 혐오식품 취급을 받으며 손주들로부터 거부당했던 참으로 처연한 "아이스 바나나의 굴욕" 을  상상이나 했으며. 계란이나 김치가 혐오식품 취금을 받는 세상이 됐다니 누구를 탓할까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난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朴木月) 선생의 아들, 서울대 박동규(朴東奎)교수가 오래전 외부 강의서 들려 준 이야기. 자랄 때 어느날 아침상에 자기 밥그릇에는 놓인 계란이 아버지에게는 안 보이자 이에 화가난 목월 선생이 까닭을 물은 즉 어머니 왈 "여보 오늘은 우리 동규 생일날이잖소". 계란을 부자 밥상에 나린히 놓기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음을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무슨 동화속에 나오는 얘기 정도로나 알지 않을까?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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