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출신 趙重勳이 쌓아온 해운왕 金字塔의 침몰을 哭하노라"


▲ 서대남 편집위원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미망인(未亡人) 모씨(某氏)는 두어 자 글로써 침자(針子)에게 고(告)하노니, 인간 부녀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금 이십 칠 년이라.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神)을 겨우 진정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

이는 1832년 순조(純祖 32)때 유씨 부인(兪氏婦人)이 바늘을 의인화하여 제문(祭文)의 형식을 빌어 쓴 수필의 시작 글로서 중고 시절에 국어책에서 배운 기억이 새롭다. 일찍 과부가 된 아낙이 슬하에 자녀가 없이 오직 바느질에 재미를 붙이고 지내다가, 시삼촌께서 건네 준 바늘 쌈지를 애지중지 써 오다가 마지막 남은 한개를 부러뜨리고는 그 애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읊은 글로, 이 조침문(弔針文)이 필자에겐 특별한 사연과 추억이 있어 더욱 생생하게 남달리 오래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학교가 늦어 1962년 초 상경 신입생 시절, 향토장학금(?)이 넉넉치 못해 교문 앞 제기동에 부산서 함께 올라온 친구와 함께 부엌도 없는 단간방을 전세로 얻어 차취를 시작했을 때다.
당시 서울 생활서 제일 어렵고 힘든 일이 연탄을 제때 갈아 불을 꺼트리지 않는 일이었기에 수업시간에도 연탄불이 걱정되면 자취방이 바로 교문 앞이니까 살며시 나와 불구멍 맞춰 아궁이 연탄을 갈고 난 다음 다시 강의를 듣기가 일쑤였다. 연탄불이 꺼지면 그 비통함은 이루 형언키 어려웠고 수업 보다 연탄이 더 중요했고 특히 겨울철이면 냉방 동태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연탄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탄 노이로제에 걸려 지내던 어느날, 오죽했으면 학교 신문에 이 조침문을 패러디해서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오호애재(嗚呼哀哉)라, 꺼진 연탄을 곡(哭)하노라!"로 시작하는 '조탄문(弔炭文)'을 투고하기에 이르렀다.
웬걸, 온통 내겐 너무나 영광스런 난리가 났다. 학교 신문에 조탄문이 실리자 중앙 일간지와 지방 신문들까지 연탄 때문에 고생하며 꺼진 연탄을 애통해 하는 자취생의 애환을 만화가들의 컷까지 곁들여 전재를 했기 때문. 여기 저기서 전화가 오고, 특히 신촌과 효창동 여학생들이 동정어린 쌀과 연탄, 그리고 김과 버터를 사들고 찾아오는 게 아닌가. 지금도 필자는 그 시절 조탄문으로 해서 친구들의 입에 회자되는 기분 좋은 추억을 안고 산다.

그러나 컴의 자판에 앉아 뭔가를 떠올려 글을 쓰려는 오늘 이 순간의 비통한 심경은 웬지 더욱 형언키 어렵다. 젊은 나이에 당시 교통부 출입 기자를 계기로 근대 한국해운의 원조격인 '대한해운공사(大韓海運公社)', 약칭 '해공(KSC/Korea Shipping Corporation)'을 드나 들었다. 1967년 쯤을 전후해서 대한항공공사와 대한조선공사, 대한통운 등 4개 국영기업을 민영화 할 때 한양학원 김연준(金連俊/1914년 함북 명천 태생, 연희전문 출신) 이사장이 '64년 당시 대한석유공사 울산 정유공장에 이어 '69년께 호남정유를 설립할 무렵, 막후 협조 관련 건으로 해서 1968년 해공을 인수하게 됐었다.

언론계와 국무위원 등 막강 경륜의 주요한(朱耀翰) 회장이 이맹기(李盟基)의 뒤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해공과 대한일보와 함께 바깥 활동에 나섰고 해운계를 대표하는 구심단체, 한국선주협회 회장도 맡았었다. 김현옥(金玄玉) 시장의 서울시와 이택규(李宅圭) 청장의 관세청 등을 거쳐 출입처를 교통부로 옮겨 가니 김신(金信) 장관, 이재철(李在澈) 차관, 김정학(金正學) 육운국장, 정영훈(鄭泳薰) 해운국장, 민영환(閔永煥) 항공국장, 이한림(李翰林) 관광공사 사장 등이 포진해 특히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뒷받침하는 해운국이 활발했고 경제지 특성상 해운분야를 집중 취재를 한 탓에 해공에도 자주 들러 백용흠(白龍欽), 박재혁(朴在赫) 등 해공 근무 1세대 해기사들을 더러 만난 기억이 난다.

돌이켜 보면 해공 발족은 해무청 황부길(黃富吉) 해운국장이 앞장서 해륙 운수업을 하면서 일본 '대판상선(大阪商船: MOL)'의 대리점도 경영하던 김용주(金龍周)를 위원장으로 하고 실업인 강일성(康一誠), 기아(起亞) 창업주 김철호(金喆鎬), 수산업 설경동(薛卿東), 여객선업 김종섭(金鐘燮)을 위원으로 하여 일본이 남기고 간 조선우선(朝鮮郵船) 접수로 출발했다. 1910년 합병 당시 조선적 등록선박은 기선 40척 7,815총톤, 범선 48척 5,779총톤에 불과했지만 해공이 교통부 직영 선박까지 인수함으로써 창립 당시 보유선박은 27척 37,496G/T(48,907D/W)에 해상 1,912명, 육상 460명으로 닻을 올렸었다.

1949년 12월 창립총회에 이어 1950년 정식 발족했고 초대 사장은 김용주를 선임, 해운공사법 폐지로 민영화 절차를 거칠 때까지 지속됐다. 도쿄고등상선학교 출신 황부길(黃富吉)을 비롯 이시형(李時亨), 윤상송(尹常松), 고베상선 출신 이재송(李哉松) 성철득(成鐵得) 등이 초기 해공 해기사 인맥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해운에 관한 국책을 수행함으로써 해운의 진흥발전을 기도함을 목적'으로 출범한 해공은 제3공화국 시절 공화당의 백남억(白南億) 당의장, 김성곤(金成坤) 중앙위원장, 길재호(吉在號) 사무총장, 김진만 (金振晩) 재정위원장 등 막강 4인방 시절 1968년께, 필요한 주식 매입 자금에 대한 은행융자, 5년간 정기항로 결손 보조금과 외화획득 장려금의 집중 교부, 기타 특혜 부여를 포함한 지원각서가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 연명으로 작성, 교부하며 민영화된 해공은 사주 김연준의 사위 홍문신(洪文信)을 경영 일선에 내세우기도 했다가 곧 바로 삼성그룹으로 넘기려던 의도와는 딴판으로 다시 경영주체가 바뀌게 된다.

서주산업과 서원농산을 경영하던 윤석민(尹錫民) 회장이 대한선주(大韓船洲)란 이름으로, 뒤이어 한상권(韓相權), 윤회장 동생 윤석조(尹錫祚)도 경영에 참여하여 민영화 이후 제2단계의 변화를 맡게 된다. 한편 이에 앞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대한항공 경영 실력을 인정하여 조중훈(趙重勳) 한진상사 사장에게 항공서 보인 실력을 발휘, 1977년 해운에도 힘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드디어 그해 5월에 한진해운을 발족시키고 18,000톤급 컨테이너선 4척을 발주하게 된다. 한진해운은 1977년 5월 16일에 자본금 3천만원으로 설립됐다. 창업자 조중훈씨는 1945년에 한진상사를 설립하여 1956년 11월에 주한 미8군 구매처와 군 화물 수송계약을 체결하여 발전의 터전을 마련하고 '58년 3월에 (주)한진상사를 설립했었다. 미 군납으로 기반을 다진 한진상사는 1960년대 중반 월남파병을 계기로 월남전에서의 각종 용역사업을 수행하여 많은 이익을 올리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된다.

그리고 1967년 7월5일 대진해운을 설립한다. 이어 1969년에 대한항공공사의 인수, 1972년 4월에 한진관광을 흡수합병, 상호를 (주)한진으로 변경하고 그해 9월에 한국원면창고(주)를 흡수합병했다. 또 1974년 5월부터 인천항에 한진컨테이너터미널을 민자로 건설하여 운영하게 된다. 이렇게 일취월장 운수재벌로서 탄탄한 터전을 마련한 한진그룹은 외항해운업 진출이란 과제를 달성시킨다. 1920년 2월11일, 경기도 인천시 항동 4가 3에서 직물 도매상을 하던 조명희(趙命熙/1985) 아버지와 테천즙(太天楫/1895) 어머니 사이에서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조중훈이 미동소학교를 거쳐 휘문학교를 중퇴하고 인천서 옮겨간 진해선원양성소를 나와 배를 타던 젊은 시절 그리도 꿈꾸던 해운업, 대단원의 첫발을 딛게 된 것이다.

관부연락선도 타고 후지무라(藤村) 조선소에서 수습기간을 를 거쳐 일본 운수성으로부터 2등기관사 자격을 땄고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을 다니며 더 넓은 세상을 본 조중훈의 꿈은 무르익기 시작한 것.
조국의 해방과 함께 트럭 한대를 밑천으로 25세에 한진을 설립하여 육운, 항공에 이어 해운과 함께 조선에 관광과 대학 까지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종합운송기업집단을 이룩했다. 특히 해공의 명맥을 훌륭하게 계승시킨 조중훈은 앞서 1987년 4천억원에 달하는 부채와 인원을 떠안고 대한선주를 인수, 사업성이 없는 노후선은 과감히 처분하고 신형 경제선을 확보하여 운항노선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1995년에는 매출액이 2조원을 육박, 국내 선사중 연속 1위를 기록하며 세계적 정기선사로 우뚝 섰었다.

1995년 조회장이 한국해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선주협회 부산지부장으로 심부름을 했고 1997년 3남 조수호(趙守鎬) 사장이 협회장에 취임하던 이듬해에 IMF파동으로 부산지부 폐쇄와 함께 퇴임하는 비운을 맞았었다. 그러나 한국해운 마음의 고향인 해공이 한진해운에 접목되어 민영화란 두번의 엇박자 시책을 이겨내고 세계적으로 한국해운을 대표하는 대들보 노릇을 하다가 근년 누구의 잘못인지도 모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비극을 맞고 보니 필자뿐만 아니라 해공을 기억하는 해운계 시니어들의 가슴은 미어지듯 비통하고 참담하기 이를데 없어 보인다. '68년 민영화 이래 '80년엔 대한선주로 사명이 변경됐다가 '88년에는 또 대한상선(大韓商船)으로 바뀌고 드디어 한진해운이 인수하여 안정된 제자리를 찾기에 이른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가 20년 전에 발간한 '잃어버린 항적(航跡)'이란 제하의 해운공사 40년(1958~1988) 역사를 읽다가 해공이란 이름이 사라진 걸 두고 누구를 지아비로 만나느냐에 따라 일생이 결정되던 옛 우리의 여인을 빗대, '한국 여인의 운명 같은 대한해운공사의 일생'으로 풍자한 표현에 그 처절함을 공감했는데 이젠 그 흔적마저도 찾기 어렵고 보니 몸담아 일했던 퇴역들이나 필자 같이 50년 이상을 지켜본 관심 많은 시니어들은 아쉬움에 애통하다 못해 참담함은 이루 형언키 어렵다는 생각이라면 지나친 연민일까? 그래도 다시 한번 "오호애재(嗚呼哀哉)에 오호통재(嗚呼痛哉)하며 선원출신 조중훈 회장이 쌓아온 해운왕의 금자탑 한진해운이 해운공사까지 안고 함께 침몰하여 해운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지금 그 한과 슬픔을 삼가 哭하노라"

<편집위원 서대남(徐大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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