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 변호사
요즘 일부 음식점이나 카페에서는 1000원 단위를 생략하고 가격을 표시하는 곳이 늘고 있다. 예를 들어 3,500원짜리 아이스아메리카노는 ‘3.5’로 표시하고, 7,500원짜리 김치찌개는 ‘7.5’로 표시하는 방식이다. 자체적으로 화폐단위를 줄여서 표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식 화폐단위 표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으레 3,500원과 7,500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돈을 지불한다. 우리 화폐의 단위가 너무 커서 불편하다는 자각에서 리디노미네이션(화폐의 가치는 그대로 두고 화폐의 액면을 바꾸는 화폐개혁의 일종) 논의가 사회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62년 마지막 화폐개혁 시행 이후 57년째 화폐액면과 화폐단위가 묶여있지만, 그 사이 국민총소득(GNI)은 4800배 넘게 불어났다. 또한, OECD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1달러당 환율이 네 자릿수(약 1,190원)인 나라이다. 화폐단위를 1000대1로 낮추면 1달러=1.19원이 돼 외견상으로는 원화가치의 절상 효과를 낼 수 있고, 다른 외국 통화와도 유사한 가치를 나타내어 대외신인도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찬성 측의 주장이다.

그런데, 1000원에서 뒷자리 0 세개를 떼어내 1원으로 낮추게 되면,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단위만 바뀌지만, 체감적으로는 화폐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며, 인플레이션 방지 및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서는 그만큼 철저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 화폐가치 하락으로 인한 물가 상승을 어떻게 막을 것이며, 장롱 속에 있을 구권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방책 마련이 화폐개혁 성패의 관건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예를 들어, 5억원짜리 집 한 채가 화폐개혁을 통해 50만원이 되면, 사람들은 기존의 5억과 새로운 50만원을 동일시하지 않고, 오히려 집값이 너무 싸졌다는 인식(이른바, 화폐환상)을 하여 집값이 올라갈 수 있게 된다. 즉, 집값이 100만원이나 200만원으로 올라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 화폐로는 10억원, 20억원의 가치이다. 또한, 저가의 소비재나 생필품에서도 물가상승이 일어날 가능성이 큰데, 900원짜리 음료수를 화폐개혁 이후에는 0.9원에 파는 것이 아니라, 반올림해서 1원에 파는 방식이 일반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듯, 리디노미네이션 이후에 물가상승이 동반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모두 “리디노미네이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가까운 시일 내 추진할 계획도 없다”거나 “지금 논의할 단계가 전혀 아니며 검토한 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섣부른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는 시장에 혼란을 줄 수 있고 화폐 제조 등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관련 법령 개정, 신권 발행, 구권과의 교환기간 내 화폐 병용, 가격 이중표시제 등의 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충분한 사전논의를 통해 국민적 합의가 선행되지 않는 이상, 국가 주도로 무리하게 실행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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