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남 편집위원

2011년께 국내 이름난 걸 그룹 '2NE1'의 히트곡 '내가 젤 잘 나가(I Am The Best)'를 따라 부르면서 우리 해운과 '웨이버'제도, 한때 그 업무를 담당했던 필자를 연관시켜 생각하며 혼자 웃은 적이 있다. 한국 해운계에 1960년대부터 80년대 근무 경력이 있는 시니어들이라면 직접 당해 업무와 관련이 없던 종사자들이라도 한번쯤 '웨이버'란 제도가 있었던 시대를 기억하리란 게 필자 추측이다. 세계적으로 악명 높았던 한국의 웨이버(Waiver) 제도는 전 세계가 경악할 정도로 악법이기도 했고 또한 전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대한민국에서만 시행된 구세기적인 제도였지만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해운의 영아기로부터 성장기의 밑거름이 된 인큐베이터이자 요람 역을 톡톡히 했다는 점에서 한국 해운사의 기념비적 제도였다고 기록하고 싶다.

특히 필자의 경우는 한국선주협회 업무부장이란 주무 부서장 시절 부터 담당 이사와 상무를 거치는 상당기간 이 제도 시행의 악역을 맡은 실무 주역으로 대내외적으로 안팎꼽추와 샌드위치 입장에서 오랜 세월을 시달렸기 때문에 이의 시행에 따른 어려움도 컸고 한편으론 작은 칼자루지만 우리 해운을 방어하는 전위병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힘썼으며 제도의 불이익을 받는 외국선사나 선박대리점업계의 지탄의 대상으로, 또는 무역협회를 중심으로 한 국내 화주들의 공격의 과녁을 벗어날 수 없었던 영욕이 점철했던 그 시절을 추억의 갈피에 고이 접어 회상의 장으로 갈무리 해왔다.

제도 자체가 무리수인데다가 해운진흥법에 근거를 둔 이 제도의 실무를 맡은 민간단체 한국선주협회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고 이 업무를 전담하는 일부 직원들이 말썽을 빚기도 해서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외국 선사 업무를 대행하던 선박대리점 관계자들은 악법에 시달리기도 했고 또 제도의 헛점을 이용하여 이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어 엄격한 제도를 있는둥 마는둥으로 사문화시키려 했던 것도 또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차제에 먼저 이 제도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간략히 살펴보고 이완 관련된 해운업계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에피소드를 곁들여 2회에 걸쳐  대충 훑어 보기로 한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유지되던 우리의 해운세력은 조선우선(朝鮮郵船)의 몇 척 보유선과 정부가 직영하던 선박을 무상 대여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를 면치 못했던 것이 당시 한국해운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1945년 11월 5일 한국해양대학이 설립되고 1949년 9월 20일, 제5회 임시국회를 통과한 대한해운공사법에 의해 1950년 1월1일 해운공사(KSC)가 출범하게 된 역사는 분명 한국해운 발전의 요람이 되어 비록 작금 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세계 7위의 해운세력을 유지하며 부동의 세계1위 조선업과 함께 '한국해운과 조선 건재'의 대들보가 되고 있다.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은 연합국 측의 재무장 방지 대책의 일환으로 일본 선박의 활동을 극단적으로 제한하고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 선박이 미군의 군사물자 수송을 위해 한국의 연안항로까지 진출하여 해상운송의 영역을 넓혀 갔다. 일본 선박의 활동범위가 확대되고 드디어 강화조약의 체결로 외항 활동에 대한 제약이 완전히 철폐되어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자 해송활동이 손쉬운 한일항로에 진출하여 이를 석권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우리 배들은 위축되어 설 땅을 잃다시피 했었다.

이러한 현상을 시정하기 위해 정부는 1953년 1월에 자국화자국선(自國貨自國船) 정책, 즉 국제 교역에서 우리 화물은 우리 선박을 사용하여 수출입 화물을 운송토록 권장하는 제도를 채택하여 시행하게 되었고 억지격이지만 이는 한국해운 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1954년 들어서 무역업자는 수출은 CIF, 수입은 FOB를 우선으로 하는 전통적인 자국화자국선 정책을 원칙으로 하여 1956년에는 대통령의 유시로 이를 적극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일설에 의하면 1936년에 미국의 상선법에 의해 채택된 이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당시 우리나라엔 미국 사정에 정통한 학자나 관리가 적어 국제법을 전공하고 미국서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 박사가 대외정책에 밝아 웨이버제도 도입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걸로 알려지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시행해온 이 제도는 선진해운국이 금기시하는 기국주의(旗國主義:Maritime Flag State)에 위배되는 국기차별정책의 하나로 1990년대 중반까지 외국으로부터 비난과 철폐압력을 받아왔지만 자유경쟁으로 해운을 육성할 방법이 없었던 우리나라로서는 유일한 생존전략이었다는 데 필자는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다.

또 당시 웨이버제도를 강력 시행하게 된 밑바탕에는 강력한 외환정책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 극심한 외화 부족 현상을 겪어야 했기에 수출 CIF, 수입 FOB로만 허가를 함으로써 운송선박 선택권을 한국측에 유보시켜 한국 선박을 이용토록 하고 운임 결제도 한국화폐를 이용토록 했던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기고 외국선에 화물의 운송을 위탁하는 무역업자는 외국선에 지불할 외환을 구할 수가 없어 운임결제가 어렵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펴기에 초점을 맞춘 셈이었다. 따라서 갑류 외국환은행이 취급하던 선사의 경상운항경비 사전지급 인증서도 선주협회가 발급케 했었다.

결론은 운송 대상 화물을 운송할 한국 선박이 없어서 도저히 한국선으로 운송이 불가능 한 때에는 이 권리를 '포기한다(Abandon or Give Up)'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명서(웨이버)를 한국선주들의 중심단체인 한국선주협회가 정부로부터 위임받아 이를 발행토록 하고 이 웨이버를 제시한 때에만 운임 결제용 외환을 배정하게 했던 것은 참으로 그 시대의 억지법이긴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웨이버제도(Waiver)를 '국적선불취항증명서(國籍船不就航證明書)'라고도 불렀는데 수출입화물의 운송 시 가급적 자국선박을 이용케 함으로써 외화를 절약하고 해운업을 발전시키는 고도의 정책지원 수단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겠다.

자국선박이 취항하고 있지 않은 지역이라든가 취항하고 있더라도 선적 당시에 취항하는 우리 선박이 커버할 수 없는 경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를 발급 받아야 만 외국선박에 화물을 선적할 수 있었으니 시행 초기 그 위력은 대단했고 민간 단체인 선주협회에 그 막강한 실력행사를 대행시켰으니 한국에 취항하는 외국 선박회사들이나 이를 대행하는 국내 대리점들은 해운의 근간이 되는 자유항행원칙에 위배되는 이 제도의 악법적인 부당성을 들어 발생하는 아규는 엄청났으나 악법도 법이란 시쳇말이 아니더라도 웨이버는 전가의 보도처럼 당시 한국해운을 감싸주는 옹벽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상선대가 미약한 우리에게 자국선을 보호한다는 범위를 넘어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50년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시행된 이 제도는 그간 법적 근거없이 행정조치로 시행돼 왔으나 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해운진흥법을 제정함으로써 해운협정이 체결되어있는 미국과 서독을 제외한 모든 외국 선박은 우리나라 수출입 화물을 자유로이 운송할 수 없으며 예외적으로 당해 화물을 운송할 한국 선박이 없을 경우만 한국선주협회가 발행하는 웨이버를 발급받아 해상운송이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러나 60년대와 70년대는 웨이버의 위력이 실제로는 한일 항로에만 국한되어 오다가 그야말로 전 세계 해운업계가 놀라 관심을 갖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의해 우리나라의 국제 교역량이 급격히 늘게 되자 이의 국적선 유보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해 1979년에는 해운진흥법을 개정하여 전 정기선 분야와 주요 벌크 분야까지 확대 시행하게 된 것이다. 개정 골자는 항로를 정기와 부정기로 구분, 정기는 종전대로 적용하고 부정기는 '지정화물제도'를 만들어 대통령령으로 지정되는 화물만 적용토록 변경한 것이었다.

웨이버 강화의 취지는 좋았으나 예상조차 못한 부문에서 국제적으로 각종 어필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감당이 불감당 상태에 이른 케이스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최소한 교역 당사국주의 원칙에 대한 배려의 문제, 민간 베이스에서 적취량배분 협정을 한 동맹선의 웨이버 면제 문제, 외국선 운임지급 환전시 웨이버 첨부와 외환관리규정의 상충 등 불거지는 문제가 많아지자 무협이나 화주들은 물론 외국정부의 외교적 압박까지 더해지고 특히 미 연방정부는 이는 명백히 불공정한제도(Anti-Trust Law & Fair Competition Law)이므로 미국 선사 보유 선박의 적취자유를 보장하라는 강경한 요청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또 화주들의 높은 목소리는 화주의 선박 선택권이 제한되면 운임이 비싸지고 바이어 우선원칙에 의거 바이어가 선편을 지정한 경우에는 웨이버를 면제 받는 조항을 삽입하라고 아우성을 치자 결국 이를 수용키로 했다. 게다가 북미항로 다음으로 큰 항로인 구주항로의 경우도 대한해운공사와 조양상선이 FEFC(구주운임동맹) 가입 회원이라 해운진흥법상 민간협정에 해당되어 웨이버 적용이 면제되자 서슬 시퍼런 웨이버는 칼날이 무디게 됐다. 이어 웨이버를 면제받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나라가 해운협정체결을 요구해 왔고 중동국가들은 자국 선박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면 한국선박의 자국 항만 입항을 금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여하간 악법(?), 웨이버 제도는 80년대를 들어서 한국해운 외교의 견인차역을 맡아 화주들에게 선진국들도 이와 유사한 자국선주의를 실시하고 있는 점을 상기시켜 국제 교역업자들에게 자국화 자국선 원칙에 대한 의식을 높여 국적선 우선 사용의 근간이 되었다. 특히 대 국민 홍보대상으로 해운업의 외화획득 내지는 외화유보 기능과 국가기간산업과 전략산업으로서의 중요성을 외치는 실무를 담당했던 필자는 지금도 외항해운업과 아울러 한국해대와 목포해대, 양 대학의 자칭 홍보대사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도 갖고 여생을 잇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너스레를 떨며 산다.(계속)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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