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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남 편집위원 칼럼]"내가 젤 잘 나가" 웨이버 제도의 추억과 회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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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29  07: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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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남 편집위원
일본이 최근 수출우대국가명단 '화이트 리스트(White List)'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함으로써 불거진 양국간의 무역갈등이 첨예화되어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경제의 근간마저 위협받고 있어 국민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정부의 대승적이고 실리적인 외교 통상정책에 관심이 높다. 이어 미국이 중국과의 무역거래에서 적자폭이 커지자 트럼프 행정부가 이의 대응책으로 위안화 평가절하, 지식재산권 침해, 기술탈취 행위등의 타격 작전에 적극 나서자 그 소용돌이 속의 우리 경제는 금융위기 등 새로운 위험국면에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 데다가 또 우리 정부는 '지소미아(GSOMIA, 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군사정보보호협정)'의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양국간의 냉기류는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위치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프랑스, 인도, 영국, 브라질, 이탈리아, 캐나다, 러시아에 이어 1조 5,302억 달러, 세계 12위의 국내총생산(GDP)을 기록하는 경제강국의 반열에 올랐으며 1인당 국민총소득(GNI)도 31,349달러로 세계 30위선에 랭크되어 잘 사는 나라의 하나로 발돋움하게 된 건 사실이고 보면 이같은 배경에서 먼저 우리 해운의 역할과 그 비약적인 발전이 경제발전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는 점을 그 누구도 간과할 수는 없고 이를 뒷받침한 해운력과 해운을 키운 웨이버(Waiver) 제도는 영아기의 우리 해운을 돌본 인큐베이터(Incubator)나 강보(襁褓)이며 요람(搖籃)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아니 벌써, 내년만 지나면 여든에 접어들어 팔순잔치를 준비중인 필자는 생애의 '3대 아이러니', 첫째 ①영문도 모르고 영문학(英文學)을 전공하고, 둘째 ②경제도 모르며 경제신문(經濟新問) 기자를 하다가, 셋째 ③해운도 모르며 해운계(海運界)에 몸담아 밥벌이를 했으며, 아직도 그 변방을 어슬렁대며 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그간 삶의 총 결산 "내 인생의 반은 술 마시는 데에 보냈고, 나머지 반은 술 깨는 데에 보내며 살고 있다"면 필자를 기억하는 말 친구나, 길 동무나, 글 벗이나, 이웃 님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 같고, 특히 1970년대 이후 웨이버 때문에 필자와 크고 작은 인연을 맺었던 업계 지인들을 불러 지금 이 순간부터 50년 전의 희노애락 회상의 여로를 걸으며 추억의 노스탈지어에 함께 젖고 싶다.

교통부 출입기자실을 떠난 필자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편집국장, 상공부장관과 건설부장관을 역임하고 당시 대한해운공사(KSC)와 대한일보 사장직을 수행하며 한국선주협회 회장직을 맡은 작가 주요한(朱耀翰)회장의 권유로 직종을 변경해서 선주협회로 옮겨 앉은지 3년이 되던 1976년 3월 13일, 대통령령 제8018호및 8019호로 항만청 및 지방항만관서의 직제가 공포됨으로써 대망의 해운 항만 행정을 전담할 교통부 산하 독립 외청, '항만청(KPA:Korea Port Authority)이 출범했다. 다음 해 1977년 12월 15일 '해운항만청(KMPA:Korea Maritime & Port Authority)'으로 개편됐다.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 시절 입수된 정보,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십니다. 김춘추도 당나라에 갔다와서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가 화근으로 알려진 이후락(李厚樂) 중앙정보부장의 후계 추대설에 연류된, 육사 8기 동기생 수도방위사령관 윤필용(尹泌鏞) 사건과 하나회 정체를 파헤친, 5사단장과 국군보안사령관 및 3관구사령관을 지낸, 강창성(姜昌成/1927~2006) 예비역 육군 소장이 뜻밖에 재기하여 초대 항만청장으로 부임하여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김정학(金正學) 차장, 배광호(裵光鎬) 해운국장, 성한표(成漢杓)운영국장, 정연세(鄭然世) 시설국장 등이 팀웍을 이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박종규의 대통령경호실장, 이후락의 중앙정보부장, 윤필용의 수도방위사령관, 강창성의 국군보안사령관으로 권력의 견제 및 균형을 유지했고 군부내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정호용(鄭鎬溶), 김복동(金復東)등 하나회 비밀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 일파만파로 온 나라가 떠들썩 했었다. 두뇌가 명석하고 추진력과 의욕이 강한 강창성 청장이 부임하자 실세 군 출신답게 해운세력 확장을 위해 군사 작전을 방불케 저돌적이고도 획기적으로 단기간에 비약적 발전을 시키겠다는 야망이 대단했다.

선사 대표들이 모인 상견례에서 "청장은 차관급이지만 특별히 항만청장은 국무회의에 참석하란 대통령의지시를 받았다"고 강조하며 의욕을 보이던 모습이 해군참모총장 출신 이맹기(李孟基) 제독을 회장으로, 육군참모총장 출신 김용배(金容培) 예비역 대장을 이사장으로 모셨던 육군하사 필자의 눈에 생생하다. 강청장 취임시 6개과와 2개 담당관을 두고 교통부의 하부조직으로 조직되어 있던 해운국은 1976년 3월 건설부와 교통부에 이원화되어 있던 항만 건설과 운영의 효율화를 기하기 위하여 해운항만청이 신설되면서 해운국·운영국 및 시설국의 3개국으로 출발, 1978년 3월에는 재무국을 신설하고 1979년 3월에는 선원선박국을신설하였으며, 수로국으로부터 항로표지(航路標識) 업무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청장 밑에 10개의 지방 해운항만청(인천·부산· 군산·목포· 여수· 마산· 울산·포항· 동해· 제주)과 항로표지용기기의 제작·수리 등을 위하여 항로표지기지창(여수)과, 군산· 제주 항만건설을 위하여 군산항 및 제주항 건설사무소를 두었다. 지방해운항만청에는 9개의 출장소(속초· 삼척· 묵호· 감천· 평택· 여천· 광양· 통영· 거제·온산· 미포· 포항신항· 삼천포· 충무· 장승포· 삼일· 장항· 완도· 서귀포)를 두어 소관업무를 담당케 했다.그러나 대표 선사인 해운공사가 적극적인 투자에 난색을 보이자 원양 컨테이너 항로를 해공 1사체제에서한진해운, 조양상선, 고려해운을 추가하여 4사 체제로 전환하게 됐고 선복량도 늘어나 외형은 크게 확장됐다.

반면, 컨선 정기항로가 과잉선복으로 시황을 악화시키는 단초가 되어 4사 체제 출범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도 하기 전에 좌초할 위기를 맞는다. 해운항만청은 뜻밖의 복병, 컨테이너 선복 오버 문제의 해결책으로1979년 해운진흥법을 개정하여 웨이버제도를 강화 확대시행하게 된다. 1978년 12월 5일 해운진흥법을 개정, 웨이버 발급사무취급요령을 폐지하고 1979년 8월 20일 교통부령 제636호로 '국적선 이용화물 운송조정에 관한규칙'에 의거, '국적선의 이용'에서 '국적선운송화물지정'으로 웨이버 적용을 구체화 현실화했다. 종래의 막연하게 100% 화물유보를 대통령령이 정하는 '주요화물(지정화물)과 정기선 화물만을 국적선으로 운송토록 함으로써 그 대상은 축소하되 현실적인 운용은 강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UNCTAD의 '정기선동맹헌장(Code of Conduct for Liner Conferences)' 등의 발효에 따른 후속 조치, 외국정부, 단체 및 외국운항업자가 국적선에 대해 차별대우를 할 경우의 대항조치와 입항 규제조치 등등으로 엎치락 뒤치락하며 제도와 규칙은 바뀌어도 '화물유보(Cargo Reservation)'나 '화물우선(Cargo Preference)'은 우리의 수출입 시장이 다변화하고 한국해운의 항로망이 범세계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웨이버제도는 운영에 한계를 드러내고 그 실효성은 점차 약화되었다. 그러나 축소와 완화를 수차례 되풀이하면서도 제도 자체는 상징적 내지는 선언적 의미를 상회하는 효과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1979년 8월 29일 고시된 해운항만청 고시 제209호, '국적선 이용화물 운송조정에 관한 요령 제3조 '웨이버빌급에 관한 요령'에서 ①국적선을 이용할 수 없는 경우에 한국선주협회장으로부터 국적선불취항증명서를발급받도록 하고 ②웨이버발급신청은 선적 예정일 5일 전까지 제출토록 규정하고 ③그와 같은 신청에 대하여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24시간 이내에 웨이버를 발급하도록 화주 편의를 도모했다. 이어 1984년 4월 2일 해운항만청 고시 85-15호는 자기화물 50% 이상을 국적선을 이용하여 수송한 화주에 대해서는 일정기간 국적선 이용 의무를 면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78년 4월 10일, 교통부 고시 제12호에 의해 웨이버 발급창구는 종래의 서울, 부산에 이어 대구가추가됐다. 계획조선 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웨이버 제도의 실효성 상실을 방지하고 실익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수입비료의 수송권을 국적선사에 부여하되 계획조선에 우선하고, 5년 이상 장기 운송계약 체결로안정수송체제 확립을 도모했다. 또 제철원료 수송도 포항제철과 협의, 국적선 적취율을 70%까지 높이고 선주협회는 관수물자의 경우 전량을 본선인도가격(FOB)으로 할 것 등을 조달청에 요청했다.

드디어 1979년 6월 8일 대통령령 제9849호로 개정된 해운진흥법 시행령 제11조의 1항에 원유, 제철원료, 양곡, 정부구매물자, 비료원료, 석탄류 등 6개 품목의 수입화물과 합판, 양회, 철강제품 등 9개 품목을 처음으로 국적선으로 운송해야할 '지정화물'로 지정했다. 이어 석유화학공업원료, 액화가스류, 냉동 및 냉장화물을 추가했다. 그러나 비료 100%를 제외하고는 50% 내외의 지정화물 적취율에 만족해야 했다. 해운항만청 창설 1976년의 경우, 국적선 적취율은 수출 40.5%, 수입 38.2%로 총 38.7%의 적취율을 기록했고 웨이버 발급건수는 12,015건에 달했다.

이렇듯 국가정책이 해운육성을 위해 갖은 애를 쓴 탓에 오늘날의 해운세력을 유지하게 된 배경에는 돌이켜 보면 '천하의 악법'으로 외국선사나 화주로부터 협공을 당하며 지탄을 받으면서도 종이 호랑이로 군림하던 웨이버제도가 있었기 때문임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선주협회보 발행과 조사·통계 및 홍보업무를 맡기 위해 자리를 옮겼던 필자가 나중에는 정책관련 주무 부서인 업무부를 맡게 되니 각종 정책업무가 산더미 같은데다 별도로 업무분장에 웨이버발급이 들어있어 민원 실무 책임자 몫을 함께 맡아야 했고 주무부처 교통부와 해운항만청 외에도 재무부, 상공부, 관세청, 국세청, 조달청 관련 업무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밖에 외국 선사의 국내대리점 업계는 물론 화주단체인 한국무역협회와 산하 하주사무국의 카운터 파트부서로, 그리고 도선, 예선업계와 하역업계 및 항계내 각종 운송과 지방 대리점들의 요율 협정도 체결하는등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고 한국선급(KR) 컨테이너부두 운영공사(BCTOC)와의 요율협정에도 참여해야했지만 그래도 일상 업무 외에 민원으로 분류되는 웨이버 발급업무의 실무책임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업무 자체 보다 이의 발급에 선행되는 국적선들의 포지션과 운송 커버 여부 확인에 따른 복잡성과 조속 발급을 재촉하는 국내 대리점들과의 마찰과 분쟁, 규정을 어기고 웨이버 발급 전의 사전 선적 및 이의 확인을 소홀히 하는 지방해운항만청 부두과나 항무과와의 언쟁 등등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어 예비군 훈련을 빠져야 했다.

또 발급창구 일부 직원에게 금품이 수수된다는 소문을 넘어 웨이버발급 차지를 지불한다는 민원이 제기되기도 했고 발급 스탬프가 찍힌 용지가 유가증권으로 거래된다는 정보를 입수, 실제 사실을 확인하고 담당 직원을 파면시킨 일도 있었고 발급지연으로 적기 선적에 지장을 준다는 고발성 민원이 제기되어 필자가 청와대 민정반에 불려가 사실관계를 소명한 일과 검찰로부터 웨이버 없이 불법 선적을 일삼는, 소위 '해적선'으로 불리는 일부 특정 선박의 운영자들의 명단을 제출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던 기억도 지금은 추억이 됐다.

선화주협의회란 협희체를 만들어 무역협회와 선주협회 회장단의 골프모임을 주선하거나 사무국끼리 친목도모를 위해 잦은 접촉을 해도 적과의 동침이랄까 오월동주로 늘 평행선을 그으며 속내를 보이며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느낌으로 일관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해운진흥법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로"내가 제일 잘 나가"는 웨이버제도의 실무 책임을 맡았던 보직 덕으로 필자도 덩달이 잘 나갔던(?) 한때로 기억되는 그때 그 시절이 지나고 보니 새옹지마일망정 흘러간 샐러리 맨의 메뚜기 한 철로 치부하고 싶다.

호적초본 빨리 떼려 면서기에 담배값 건네듯 웨이버 발급과 관련된 업무상 편의를 노리고 식사나 한번, 술이나 한잔, 골프 초대와 명절 상품권 등으로 낮은 직급에 종사했으나 그래도 제법 로비의 대상이 돼 "나도 한 번쯤 잘 나갔던 때가 있었다"고 자위하고픈 건 지난날을 승화시켜 고이 빛내고픈 노욕이거나 아니면 내게 주어진 삶의 날이 크게 많지 않은 아쉬움 때문에설까? 여하간 해운계 50년이 넘는 긴 과거사에서 해무를 맡은 탓에 짝퉁 해기사로 변신하여 지금도 이미테이션 마도로스출신으로 분류되는 아이러니와 함께 필자에게 '웨이버'란 단어는 영원한 향수를 자아내는 바다의 연가나 추억의 소야곡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끝)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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