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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남 편집위원 칼럼]"개천서 태어나 바다서 살다 간 작은 龍" - 國卒 학력의 고등고시 출신 崔在洙 이야기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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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28  04: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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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남 편집위원
1961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 지면 보도,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자 명단 72명 중에는 훗날 7, 80대 시니어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전직(이하 같음) 고건(高建) 총리, 장덕진(張德鎭) 농림부장관, 최동섭(崔同燮) 건설부장관, 이상희(李相熙) 건설부장관, 정영의(鄭永儀) 재무부장관, 허남훈(許南薰) 환경처장관, 송언종(宋彦鐘) 체신부장관, 임인택(林寅澤) 교통부장관, 이진설(李鎭卨) 건설부장관, 서영택(徐榮澤) 건설부장관, 이동호(李同浩) 내무부장관, 이상배(李相培) 총무처장관 및 앞서 사법고시에도 패스한 박찬종(朴燦鐘) 의원 등과 함께 72명 중 72등 꼴찌로 합격한 해운항만청 재무국장 최재수(崔在洙)란 이름 석자도 끼어 있었다.

그후 30년이 지난 1991년 10월 19일 경향신문 18면을 보면 당시 이들 72명은 일반행정에 42명, 경제분야 15명, 외교분야 15명이 포진해 있었고 차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은 무려 20명에 달해 장관급이 9명, 차관급이 11명이나 됐으며 사법과 행정과, 양과에 합격한 사람도 20명에 달했으며 외교를 택한 합격자 중 11명이 대사로 승진했었다. 그는 내로라 하는 명문대 출신들 틈에 끼어 국졸 학력으로 그리도 어렵고 힘든 고시에 합격하여 비록 이사관급, 국장직을 끝으로 공직에서 중도 하차했지만 7세 연하인 필자와는 조직과 업무를 통해 또는 친교상 다른 그 누구 못지 않게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인연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앞으로는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머나먼 세상으로 떠나 보내게 되었다.

2019년 8월16일 20시 17분 해운항만청 부산항무국장과 본청 재무국장을 지내고 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를 거쳐 두양상선 부사장, 한국해양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낸 최재수(崔在洙) 박사가 향년 85세를 일기로 타계한 것이다. 필자가 한때 직장 상사로 모시기도 했고 부산서 각기 다른 조직 근무시절 한 방을 쓰며 홀아비 생활도 함께 했으며 공직 퇴임 후에도 각자 다른 일터를 나가긴 했지만 같은 건물서 자주 만나 소담을 나누며 반(半) 백수로 자주 어울려 노후를 함께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후 두어 해를 병상에서 지내다 홀연히 떠나버려 다시 한번 삶의 무상함을 실감하며 문득 손 위 큰 형이나 친구를 잃은 듯 애석함이 떠나질 않고 뇌리를 맴돈다.

그리도 총명한 그도 강남 한곳 재활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후임 박창홍(朴昌弘) 전무와 병문안을 가서 "최박사님! 서대남과 박창홍인데 저희들을 모르겠어요?" 하고 소리를 질러도 휠체어를 탄 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모습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으니 필자가 대변인으로 절친들에게 그의 문안을 전하던 일도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빈소에 수없이 즐비한 조화도, 먹고 남을 정도는 되게 모은 재산도, 부인과 서울대학을 나온 아들 딸의 애통에도 아랑곳 없이 물끄러미 미소만 짓는 영정사진을 보고 필자가 "최박사님 만년에 서대남에게 술 사주는 재미로 사신다 해 놓고 그냥 가시면 술은 이제 누가 사지요?" 하며 큰 소리를 지른 게 최후의 작별인사였다.

생전에 최박사는 글 쓰기를 좋아 해서 해운 전반에 걸쳐 특정 분야에 관계없이 이것 저것 여러 내용의 저서와 글을 남겼다. 특히 관직이나 교수 시절 담당 전문 분야가 있었지만 퇴임 후 활자나 출판 매체를 통해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하며 숱한 논단과 이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해운 전번에 걸친 해운의 역사나 선박박회사의 사사 등 그가 대표 집필한 간행물이나 자료는 수없이 많지만 수십년은 더 살 것으로 믿고 미뤄 왔는지 몰라도 쌈바디급이면 흔히들 자필이건 타필이건 자기의 삶을 되돌아 보고 자서전 성격의 자신에 관한 글을 남기는데 그는 정작 본인에 관해서는 필자가 현대사기록연구원(원장:송철원) 수석연구원 시절 국가기록원에 영구 보관용으로 대담한 영상 구술자료 외에는 필자가 본 일이 없다.

그래서 어렵고 가난하게 극빈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그래도 꿈을 키워 고등고시를 패스하여 중앙정부 기관의 고급 관리를 지내고 선주단체를 거쳐 대학 교단에서 강의를 하고 해운분야의 정책을 다루며 연구와 집필에도 몰두했던 그를 오랜 기간 가까이서 지켜본 인연과 눈여김을 통해 객관적으로 한 지인의 생애를 돌아보며 추모와 석별의 정을 담아 여기 좁은 지면이지만 2회에 걸쳐 필자의 단상으로 '쵀재수 박사'의 일대기를 집약 정리해 본다. 한마디로 그는 머리 좋고 똑똑하며 분별력 있고 순간적 판단력이 빠르며 무슨 일이고 간에 열심히 하고 또 깊이 파고들어 결과를 끌어내는 외우기에 능한 천재적인 인물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술을 많이는 안 해도 애주가란 호칭을 받을 정도로 필자를 비롯 함께 일했던 지인들과 마주할 때는 늘 술잔이 오갔다. 그리고 해운계에서도 워낙 여러 분야의 직책을 맡았었기 때문에 필자가 한번은 그간 불리어 온 호칭, "선배님, 국장님, 전무님, 교수님, 소장님, 위원님, 박사님, 그밖에 무슨님 무슨님 중에서 제가 무엇으로 불러 드릴까요?"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야 부르는 사람 마음에 달렸지만 '최박사'라고 불리는 게 무난할 것 같다"고 해서 그 이후는 필자가 앞장서 그를 아는 지인들에게 "최박사님"으로 부르자고 통일안을 제시하여 타계하기 전까지 통상 그렇게 불러 왔다.

그는 충남 홍성군 은하면 목현리 본적의 1891년생 아버지와, 그리고 아예 이름이 없이 평생을 살다 간, 같은 고향의 1900년생 어머니와의 4남 6녀 중 3남으로 1935년 9월 20일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 편입하여 수학박사란 별명을 얻고 천재란 소리를 들으며 보통학교를 졸업 후 고향서 10여 명이 국립교통학교에 응시, 혼자 합격했으나 입학금을 내지 못 해 결국은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독학으로 배움과 출세의 길을 택해 1차 관문으로 어렵게 1955년 48명 모집에 48등으로 보통고시에 합격했다. 이어 예비고시를 거쳐 보통고시 합격 6년만에 1961년 합격자 72명 중 "꼴찌면 어떠냐, 합격이면 됐지"라며 또 꼴찌로 드디어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을 한 의지의 사나이요 입지전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고등고시에 합격한 최재수는 '교통학교'에는 못 갔지만 1962년 6월 '교통부'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발령을 받아 수습을 마친 뒤 첫 보직으로 법무관실 법무계장을 맡아 그간 익힌 실력을 발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어 옮긴 자리는 육운국 자동차 운송사업면허를 다루는 보직이었다. 업무 처리 중에 난생 처음으로 돈 봉투가 주머니에 들어오게 되고 쓰고도 남을 만큼의 용돈이 생겼다고 솔직히 당시를 고백했다. 한번은 "홍성 촌놈이 퇴근길 어느 음식점에 초대돼 접대라는 걸 받는데 한겨울인데도 쇠고기 구이에 싱싱한 상추가 밥상에 오른 걸 보고 너무나 신기했다"고 언젠가 술자리서 이를 토로하며 함께 파안대소한 적이 있다.

헌 책방에서 힘들게 구한 교재로 혼자 공부를 해서 최종학력 초등학교 졸업생이 보통고시와 고등고시 예비고사를 거쳐 고등고시에 최종 합격을 한 후 물 좋은 자리, 돈 방석(?)에 안고 보니 당장은 좋으나 승진을 위한 경력 평가를 받기 위해 건국대학교에 입학, 학사를 따고 다시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하여 회계학도 공부했다. 아는 게 죄랄까, 회계를 배운 게 화근이 되어 한번은 일개 사무관이 장관 판공비 내역을 조사한 것으로 밉보여 곤혹을 치렀고 심지어 중앙정보부에 불려간 에피소드도 털어놨다. 얼마 후 해운국의 항정계장을 맡은 게 최재수가 해운과 인연을 맺게된 계기가 됐고 '항만의 공기업화(Port Authority)'란 석사논문이 그를 항만전문 행정가라는 타이틀을 안겨주게 되고 대외적으로 전문 행정가로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관직 10년 째인 1971년에 서기관으로선 최고 직위로 국장급 대우를 받는 교통부 총무과장으로 입신, 우쭐한다. 당시는 국장급에게 지급되던 승용차와 기사를 중앙부서 총무과장은 이와 유사한 대우를 받는 게 일반적 관례였다. 총무과장은 장관의 신임이 두텁고 승진 연한이 찬 사람이 발탁되는 게 관례인데 벼락출세를 한 최재수는 인사청탁과 보직청탁 등 당시 공무원 사회에서 인사문제와 그 난맥상이 공직사회의 분위기를 흐리게 하던 때라 힘들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래 있지 않고 별 볼 일 없는 한직, 법무담당관으로 좌천된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당시 업계와 함께 숙원사업이던 선원법과 선박직원법 등을 정비한 일과 당시 1주에 국무회의와 경제장관회의가 각 두 번씩이라 매번 회의에 앞서 장관에게 안건 설명을 미리 하는 일이 주요 일과였다고 했다.

드디어 최재수는 1973년 8월에 해운국의 꽃이라 불리며 누구나 한번 앉고 싶어하는 외항과장으로 전보되는 영광을 안게 되고 뒷날 그는 이때를 본인의 일생 중 가장 보람있었던 황금기였다고 술회했다. 당시 교통부 출입기자로 활동했던 필자도 그때사 그를 겨우 알게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해운발전이 우리나라 빈곤추방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난을 물리치는 것을 혁명공약으로 내세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뜻을 알만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때 중고선 도입의 신속처리, 각종 규제 복마전의 혁파, 한일해운협정의 지연작전, 해운발전을 위한 대통령과의 정책 교감, 해외 해무관제도의 신설 등을 큰 보람으로 간직한다고 추억했다.

공조직을 비롯한 직장에서 일단 취업이 되면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가 중요하게 마련이다. 승승장구하던 최재수에게 어느날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대형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되돌릴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운명과 마주친 것이다. 1976년 해운항만청 출범으로 강창성(姜昌成) 초대청장이 부임하자 부산지방항만청 항무국장으로 부임, 대망의 국장급으로 승진은 했으나 그는 관복을 벗는다. 옳다고 생각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밀어부치는 자신의 고집불통 때문이라며 뇌물수수 등의 부정이 아니라 떳떳하게 상급자와의 정책견해 차이로 그만 뒀기에 섭섭하긴 했지만 불명예는 아니라며 언젠가 뒤에 밝히겠다고 한 뒤 끝내 밝히지 않고 부산청 항무국장에서 본청 재무국장으로 소환성 전보로 자리를 옮긴 뒤에 관직을 떠난 확실한 이유는 두분이 다 타계한 지금에는 더욱 오리무중이다.

부산근무 시절에는 하역업체 통폐합과 부산항컨테이너터미널운영공사 창립 및 부산항운노조와의 분쟁 해결이란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함께 일을 한 일부 업계 총수들로부터 "당신 같은 사람이 최고 행정책임자가 돼야 한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고 필자도 공감했던 그는 1979년 8월, 제17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용무(龍舞) 김용배(金容培) 예비역 육군대장'이 사무국의 총수로 집무하는 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로 낙하산을 타고 내렸다.
"어디서 날아온 철새냐?"고 비아냥대는 출입기자들의 가십을 막느라고 조사부장으로 홍보업무를 맡고 있던 필자는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낙하산 타고 내려온 철새 치고는 능력과 전문성과 의욕을 갖춘 사무국 책임자로 인정을 받은 쓸만한 철새였다.(다음 계속)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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