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 칼럼
[서대남 편집위원 칼럼] -196,70년대 한국 언론 기자실 풍속도 그 회고와 단상(上)
쉬핑뉴스넷  |  webmaster@shippingnewsnet.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11.27  05:09:3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 서대남 편집위원
작금 활자매체나 전파매체 또는 인터넷 매체의 신문 방송 등 각종 매스 미디어나 매스컴들이 자주 페이크 뉴스나 편향보도 또는 과장이나 오보를 일삼는다 해서 너무나 모욕적인 '기레기'라는 말로 기자들을 입에도 못 담을 어휘로 폄하하고 있음에 즈음하여, 1960년대 후반서 70년대 전반에 걸쳐 '종이쟁이(?)'를 한 경험이 있는 필자에겐 남달리 느끼는 실망이 참으로 크고 또한 안타깝기 짝이 없다. 무관의 제왕이니 사회의 거울이니 민중의 지팡이니 하며 신망받던 기자직이 사이비 기자인양 매도되어 선망은 커녕 권언유착이나 권력의 시녀라는 비아냥으로 내몰리며 나락으로 떨어진 배경에는 물론 자업자득이란 비판과 스스로 성찰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이는 직업의 특성과 언론의 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이해의 부족이란 측면도 엄연히 존재함을 차제에 강변하고 싶다.

거의가 원초적으로 매스컴과 언론을 통해서 알게 된 뉴스나 지식 습득의 고마움은 금세 잊고 자기중심으로 관심이 있거나 우호적인 집단이나 자기 편의 유불리나 득실에 따라 언론을 평가하는 이기주의적 발로가 지배적인 측면도 있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이는 영국의 전국 유력지 The Times나 The Guardian, The Sun, Daily Mail, Financial Times 및 Daily Mirror, The Independent 등의 1면 톱 기사, 헤드라인이 똑 같은 날은 거의 없다는 데서 찾을 수도 있다. 각 신문마다 정치 이념이 다르고 같은 보도자료라도 각기 논조가 다르기 때문이고 이념 성향과 소득 수준에 따라 고정 독자층이 있어 입장이 엇갈리는 까닭이다.

그리고 어느덧 필자 생각은 향수가 되어 그 옛날로 달음질 친다. 그때 그시절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단순하게 옛 한때 그런 시절도 있었다는 아스라한 추억의 소야곡 같은 것. 1972년 쯤일까? 필자가 교통부를 출입하던 시절, 출입기자 27명을 대표하는 D일보 소속 L간사가 어느날, 당시 장성환(張盛煥) 공군참모총장 출신 장관의 바톤을 이어 받아 역임 뒤 최경록(崔慶祿) 육군참모총장 출신 장관에게 바톤을 넘긴, 공군참모총장 출신으로 입각한 김구(金九) 선생의 둘째 아들, 제21대 김신(金信) 교통부장관과 예하 국장들이 배석한 출입기자단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장관님, 이번 국장급 인사는 기자실에서 하겠습니다"라는 진담같은 농담이 예사롭던 옛 기자실의 풍속도에 놀라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따라서 1960년대,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의 대한민국의 중앙부처 기자실과 기자단에 대해 가끔 회상하며 싱긋이 웃는 버릇이 생겼고 차제에 옛 기자실 풍경을 추억하는 마음에서 당시의 실상을 되돌아 보고싶다. 그때는 약관 20대에도 장관부처에 출입하게 되면 기자증 하나로도 특혜받는 프리미엄이 제법 많았었다. 왼손으로 양담배를 입에 물고 오른손으로 국산품 애용을 강조했던 당시 기자들 속성을 시대가 달라졌다고 크게 욕할 생각은 없다. 당시는 자기가 커버하는 부처와 관련된 소관 업무는 물론 그 외에도 기자신분증을 슬쩍 보이곤 무소불위로 어디건 마음대로 드나들며 거드름을 피우는 경우가 적지 않아 "기자면 다냐?" 가 유행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문화행사나 공연장 같은 곳은 취재를 핑계로 자기 뿐만 아니라 덤으로 몇몇 사람을 달고 가기도 일쑤였으니 지금 돌이켜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같은 사례들은 공공연히 자행됐던 웃지 못 할 풍습이요 관행이었다.

그 대신 본연의 업무인 취재 활동은 열악한 여건으로 어려움이 많았고 출입처마다 분야별 전문지식의 단기간 습득에 피가 말랐고 발로만 뛰던 기자들에겐 이동에 따른 위험도 많아 1단짜리 기사 한줄(당시 신문 한면은 세로 총 17단에 1단의 제목은 6자 내지 8자에 본문 활자수는 13자)을 취재하기 위해 가까운 곳은 두 발로 걷고 먼 곳은 어렵게 배차를 받아, 신문사 사기(社旗)를 휘날리며 취재 현장으로 단숨에 달려가야 했다. 취재를 하고 나선 데드라인에 맞춰 대개의 경우 내근자에게 전화로 송고를 하거나 귀사를 해서 기사를 썼다. 핸드폰과 노트북이 있고 각종 송수신 기기가 즐비한 데다가 사무실만 지키고 있어도 귀찮을 정도로 각종 관련 뉴스나 보도자료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지금에 비하면 정말 호랑이 담배피우는 아득히 먼 얘기임에 틀림없다.

필자가 출발한 60년대 후반의 기자실(記者室) 또는 프레스룸(Press Room)은 중앙의 장관부처 또는 차관급 청단위와 정당, 대형 국영기업, 민간 대기업, 금융단, 일선 경찰서 등이 취재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해 준 장소로 1920년부터 일본의 기자클럽 영향을 받아 출입처를 가진 기자들이 결성하여 출입기자단 또는 출입처 기자단으로 불리며 설치됐다. 이어 5.16 이후 박정희 정부가 효율적인 언론을 통한 정책 홍보를 위해 1963년 청와대에 기자실을 설치하고 아그레망(agrément)을 통해 출입기자를 제한도 한 게 시초였다. 초기엔 청와대에 등록하여 취재활동을 하기 위해선 '출입기자등록에 관한 규정'에 따라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 한국기자협회 및 인터넷신문협회, 인터넷기자협회, 한국사진기자협회, 한국TV카메라기자협회, 한국온라인신문협회, 서울외신기자클럽에 가입한 회원사의 추천을 받아야 했고 2000년대는 정권에 따라서 변화가 심해 기자실을 폐지하고 개방형 브리핑룸제도를 도입했고 이어 기자전용 춘추관을 만들어 취재를 전면 개방한 것으로 듣고 있다.

초기엔 기자실이 없어 출입 기자들이 대통령 비서실 안으로 들락이며 비서관이나 행정관들의 근무처를 마구 휘젓고 다니며 취재를 하는 바람에 취해진 조치였다. 나아가 청와대는 기존의 언론 정책서 탈피하여 일정한 시간까지 보도를 금지하는 '엠바고(Embargo)' 제도와, 기록에 남기지 않는 비공식 발언은 취재원이 독자나 시청자의 알 권리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제도와 또 보도진들에게 어떤 상황이나 사건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 취재원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브리핑하는 '백그라운드 브리핑(Background Briefing)' 방식 등 미국식 취재 원칙과 보도 방식을 도입했고 필요시엔 기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보도자료를 전달하는 방법도 병행했다.

그리고 6, 70년대엔 정부 각 부처의 기자실도 출입기자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출입기자단이 가입을 허용한 언론사 기자에 한해 이용이 가능케 하는 등 배타적이고도 폐쇄적인 운영이 끊임없이 문제시 됐으나 이 악질적 취재 카르텔 관행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필자가 일선에서 뛰던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에는 각 부처 출입기자들이 취재 후 마감 시간에 데스크에 모이면 기자실의 평폐가 화제에서 벗어나는 날이 없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지 반세기가 흘렀으니 요즘 사정이 필자에겐 너무나 궁금하고 오로지 도처에 넘쳐나는 각종 정보의 홍수를 접하면 옛날에 사건 사고 현장 또는 완전 봉쇄된 취재원으로부터 한 마디의 말, 한줄의 자료가 아쉬워 정보의 이삭줍기에 목을 매던 시절의 기억이 꿈만 같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뭣 보다, 특히 기자실의 헤게모니는 이를 선점한 몇몇 유력지가 중심이 되어 전횡을 했고 마이너 언론들은 기자실을 맴돌며 눈치나 보고 아예 드나들 엄두도 못냈고 비회원이 간혹 아첨 차원에서 중요 기사나 특종을 취재해서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배당 받은 촌지로 포커를 치고 있는 기세 등등한 고참 기자들에게 상납을 하거나 아니면 심봤다 촌지 케이스를 만들어 기자실에 연결하기를 거듭하게 되면 시간이 흘러 한 해가 저무는 연말에 마지못해 가끔, 이름하여 '총회'라는 비공개 회의에서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가입을 고려하는 예비 명단에 오르게 되고 가입 결정 통지를 받게 되면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감지덕지 하는 것이 당시 기자실 입단 순서요 풍속도였다.

그리고 당시 기자실 주변은 활자매체인 신문과 통신이 크게 설쳤고 회원자격은 중앙 일간지 유력 언론사의 경우는 기자가 바뀌어도 뒤를 잇는 후임에게 자동 승계가 됐으나 부처에 따라서 방송사들은 끼워주질 않아 별도로 기자실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사세가 약한 일부 신문이나 경제지 및 통신사와 지방지 역시 자유로운 기자실 출입은 제약이 많고 굳게 닫힌 심사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취재 보도 관행도 지금이나 예나 다를 바가 없겠지만 영국의 기자들은 엠바고 위반이나 일방적 편집 보도, 사적인 대화내용 보도 등 언론윤리강령을 위반하는 사레가 드물고 또 기자들이 높은 지식과 전문성을 갖춘 데다가 취재 윤리를 철저히 지키기 때문에 공무원과 언론이 서로 믿고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또 철저한 준비와 과학적 브리핑 시스템으로 과장 보도나 오보를 예방하기 때문에 우리식의 아니면 말고식의 추측 보도나 악의성 보도는 드물다고 한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하늘에 별따기였던 60년대 후반, 특히 인문계 전공의 경우 법정계나 경상계 외에는 입사 원서 내기도 힘들던 시절, 유독 전공에 관계없이 응시가 가능한 분야가 언론계이고 보니 많아야 여나믄명 뽑는데 너나 없이 수만명이 몰리는 도떼기 판이 된다. 필자도 1차 서류, 2차 영어 국어 상식, 3차 기사작성, 4차 면접에 걸친 관문에서 운좋게 공채 3기로 턱걸이 합격은 했으나 첫 월급은 지금도 잊혀지지도 않는 '일금 7,000원'이 매월 거르지 않고 제때에 나오니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는 수습기자 시절이 그래도 무척이나 신이 났던 기억이다. 편집부와 교정부 지방부에서 문선과 지형을 배우고 윤전기 도는 모습을 견학하며 내근을 하다가 다행스럽게 외근 기회가 주어졌다. 수습기자들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제일 먼저 출이하는 곳이 간밤에 백차에 실려온 잡범이나 취객들, 밤의 여인들이 실려와 소란을 피우는 험악하고 시끄러운 난장판 분위기에서 길들여지게 일선 경찰서를 먼저 출입시켜 소위 '사스마와리(察廻)' 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철저한 원칙으로 삼는 루틴 신고식을 해야 했다.

6개월 수습기간을 거친 후 어느날 필자에게도 외근 취재부 기자로 활동할 출입처가 배정됐다. 첫 출입처는 육사교장, 상공장관, 국방장관과 국회의장을 지낸바 있는 정래혁(丁來赫) 예비역 장군이 수장으로 있는 최대 국영기업체 한국전력이었다. 당시 이낙선(李洛善) 상공부 장관 시절 외청인 표준국, 계량국, 특허국과 국립공업연구소를 커버하며 한전을 출입하게 되니 공보관실이 있어 쉴 수도 있고 취재기자들을 위해 여러 편의도 제공됐다. 겨우 한 살 위로 ROTC 1기로 후배들 군기를 잡으려는 상공부 본부를 출입하는 1기생 배병휴(裵秉烋) 선배 기자의 눈에 들려고 하늘같이 모셨고 담배를 물면 서로 먼저 라이트를 켜 대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기억이 떠오른다. 배 선배 대타로 최초의 차관기업 울산의 한국알미늄 준공식에 수영비행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한 절호는 지금 생각해도 가문의 영광, 텔레비전 뉴스에 수행하는 필자 모습을 본 고향 부모들은 크게 출세나 한 줄 알고 야단이셨던 기억 또한 새롭다.

배 선배는 당시 상공부 출입기자실에서는 기사 잘 쓰기로 정평이 나있는 민완 기자로 명성이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당시는 원전 보다 수력과 화력발전 시설이 많아 출입처의 시설 견학 삼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발전설비를 제법 상당한 출입기자 대접을 받으며 답습했다. 제2의 태양으로 일컫는 전력에 대한 '발전과 송전과 배전'에 관한 현장 학습을 통한 체계적 전기 현장 공부가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단의 일원으로 출입을 계속하며, 비록 술밖에 배운 게 없다손쳐도 '언론고시'를 패스했다는 자부심으로 취재에 열중하는 막내격 필자의 눈에는 선배 기자들이 농담으로라도 취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함께 혜택을 받을 때 처음엔 두렵기도 했으나 나중엔 스스럼 없이 동화되게 마련이었다. 심지어 사람 좋기로 이름난 어느 선배가 취재대상 고위 간부들이 독식으로 삼키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 목안으로 넘어가기 전에 되돌려 일정 몫을 기자와 나눠 가져야 한다고 이르던 농담은 지금도 기억에 짠하다.

아들을 낳으면 기자를 시키되 딸을 낳으면 기자에겐 절대 시집을 보내지 말라는 아이러니는 차치하고 기자란 직종이 꼭 필요하며 사회의 온갖 면을 전방위로 비쳐주는 사회의 거울이 신문이나 방송 등 활자매체나 전파매체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매스컴이고 보면 언론의 순기능적인 사명감이나 정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지람이 없겠지만 그 역기능을 부각시켜 부정적으로 몰아가는 소위 '기레기'란 폄훼성 표현으로 매도하는 식의 언론관은 과감히 배제돼야 한다는 게 평소 필자의 소신이라고 모두에 밝혔듯 이 졸고에서는 오로지 50년 전을 추억하며 회고하는 에세이적 낙서 삼아 지난 날을 회고하는 시간으로 2회에 걸쳐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독자와 함께 옛 추억의 오솔길을 걸어 보기로 한다.

한전에 이어 경제지의 특성으로 해서 관세업무에 관심이 많던 필자는 다음 출입처로, 제주지검장 출신으로 대통령이 점지한 이택규(李宅珪) 검사가 초대 청장을 맡은 관세청을 출입하며 송병순(宋炳循/한해대조선4기) 세무국장과 오순희(吳淳熙/한해대항해10기) 부산세관장, 김동수(金東洙/한해대기관13기) 사무관을 만나 관세청 기사 많이 쓴다고 총애를 받으며 기자실에서 크게 환영받던 생각이 난다. 이 청장은 일선세관 순시를 갈 때에는 단신인 청장 신장에 딱 어울리는 탓인지 기자실 최단신 필자를 기자실을 대표해서 부산세관을 시발점으로 세관 감시선을 타고 마산과 여수세관을 거쳐 충무출장소까지를 한바퀴 돌던 일정도 기억에 떠오른다. 마침 파독 간호사로 도이치 마르크를 벌러 갔다 귀국한 지금의 옆방 권사를 알게된 터라 인천세관이 이삿짐을 일사천리로 통관시켜 안방까지 실어다주는 특혜를 받은 게 기억에 남고 관세청장과 세관 순시를 할 때마다 뒷 포켓에 집혔던 촌지는 그 시절 관례였기에 오프 더 레코드로 해야겠다.

이어 부산시장서 옮겨 앉은 김현옥(金玄玉) 시장의 서울시청 2진 출입으로 신영호(申榮鎬) 선배를 보좌하며 서울의 9개 구청과 수도사업소를 비롯한 서울시 관할 곳곳을 김 시장을 수행, 골목마다 훑으며 다니던 기억과 1970년 4월 8일 준공 석달만에 33명이 사망한 마포구 창전동 소재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청천벽력 사고가 뇌리를 스친다. 신년 초 각 구청을 초도 순시하던 김 시장이 동대문구 용두동 근처 어느 도로가 지저분하다고 이를 혀로 핥아서라도 깨끗이 정리하라고 강한 어조로 지시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리고 와우 사고 수습후 11평짜리 그 아파트를 어렵사리 내집으로 마련하고 지상 최고의 스윗홈으로 여기고, 박봉으로 지금은 50대에 이른 남매를 키운 지난 날이 처연하고도 아련하게 눈에 밟힌다.

이어 서소문동 한국은행에 기자실이 있던 금융단과 서소문에 법조계 기자실이 있던 법원, 그리고 지금은 어디멘지 알 길이 없는 당시 논밭 경작지에 둘러쌓인 비행장과 섞여 있던 섬, 바로 여의도의 개발계획 취재를 위해 지프차를 타고 자주 들락이던 생각도 난다. 이때를 전후하여 업계에선 부산항부두관리협회가 설립되고 한국도선사협회가 발족했으며 한편 KAL기 납북사건 발생,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개통되고 또 해외 뉴스로는 미 우주선 아폴로가 달에 착륙했으며 국내 뉴스로는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기도 했다. 기자란 직업도 철새처럼 회사 방침에 따라 출입처가 바뀌면 미련없이 정들고 익숙한 보금자리를 떠나게 마련이라 1971년인가 필자로선 기자로서 마지막 출입처인 교통부 기자실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계속)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쉬핑뉴스넷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낙수(뒷이야기)
많이 본 기사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호 : 쉬핑뉴스넷  |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23길, 47 미도파광화문B/D 601호  |  대표전화 : 02)6228-5750  |  팩스 : 02)6499-0668
명칭 : SNN 쉬핑뉴스넷  |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등록일) : 서울 아 02761(2013.08.20)  |  발행일 : 2013.09.01
발행인·편집인 : 정창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정창훈
Copyright © 2013 쉬핑뉴스넷.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