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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남 편집위원 칼럼]196,70년대 한국 언론 기자실 풍속도 그 회고와 단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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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25  17: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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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남 편집위원
앞서도 언급했듯이 6,70년대 출입기자들의 일상은 급한 취재 상황이 발생할 경우는, 지금도 예외일 수는 없겠지만, 데스크에 알리고 새벽같이 출입처나 사건 현장으로 바로 출근하는 게 예사였다. 초년병 올챙이 기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밤샘 근무는 1970년 3월31일, 50년전의 김포공항 얘기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난데 없이 정체불명의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정보만 듣고 동료 몇과 함께 취재차에 실려 현장으로 달려갔다. 출입처에 관계없이 초긴급 상황이 벌어지면 편집국 취재부가 온통 올코트 프레싱 작전을 벌이게 되지만 예나 지금이나, 군대나 직장 어느 조직에서나 별 볼일 없이 힘들고 애먹는 곳은 사스마와리(察廻)로 신참 졸병이 호출돼 밤새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흔이 줄여서 '요도(Yodo)호 사건'으로 불렸던 일본 적군파 요원들에게 납치된 '일본항공(JAL)351기'가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10분, 도쿄 하네다(羽田) 공항을 출발, 후쿠오카 이타즈케(板付) 공항으로 가던 중에 갑자기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한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져 온 나라가 들썩였다. 세계혁명을 꿈꾸는 붉은 테러리스트, 이들 젊은 좌파 군사조직 적군파 요원들은 여성 수장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의 지휘에 따라 나고야 상공에서 기장에게 무조건 평양으로 가자고 협박하자 기장은 당해 항공기는 국내선이라서 연료유를 충분히 보충해야 가능하다며 후쿠오카 공항에 불시착하게 된다.

승객중 적군파 학생 15명으로부터 비행기를 폭파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피랍된 351기는 일본 당국이 경찰 700여명을 동원하고도 5시간이 넘도록 손을 못써 납치범들 제압에 실패, 겨우 이들을 설득하여 전체 승객 131명 중 노약자와 어린이 등 23명만을 풀어주고 김포를 이륙, 한국 동북 해상으로 비행하다 서북방으로 진로를 급선회, 철원 북방에서 휴전선을 넘은 뒤 기선을 돌려 김포공항을 평양이라 속이고 위장 착륙을 한 것. 기장이 머리를 써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한국 공수단원들은 북한군을 가장, 비행기에 접근하여 납치범들에게 "여기가 평양이다. 여러분을 환영한다", "곧 버스가 도착할테니 빨리 내려라"며 속임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일성 초상화를 가져와라", "평양이 아니라 서울인 것 같다", "왜 이리 비행기가 많으냐"며 실랑이를 벌였고 서울을 평양으로 둔갑시키는 기상천외의 기막힌 각종 작전이 펼쳐지는 판이었다. 심지어 '평양도착 환영'이란 플래카드를 내걸고 납치 JAL351기 주위에는 차량 범퍼와 넘버 등을 지워 북한 현장감을 살리기 위한 지프와 버스 여러 대를 눈에 띄도록 공항을 돌게 하거나 북한 깃발을 흔들어 보이기도 하고 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도 영화 촬영장 엑스트라처럼 비행기 주위를 오가고 서성거리게 하며 평양 일색 풍경을 연출하기에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또 하오에는 JAL 김포 현지 직원 야마모토(山本)가 납치 항공기에 접근하여 "나는 아사히(朝日)신문 평양 특파원인데 여러분들 오시느라 수고 많았다". "곧 내릴 준비를 서두르기 바란다"고 평양임을 거듭 강조했으나 거짓임을 눈치챈 적군파들은 비행기 문을 열지 않고 평양행을 고집했다. 납치범들은 결국 협상 끝에 탑승객 전원을 김포공항에서 풀어주고 야마무라 신치로(山村 新治郎)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을 인질로 삼아 김포공항 착륙 71시간만에 평양으로 기수를 돌려 떠났고 납치 항공기 기체와 야마무라 차관은 4월 4일 귀한했다. 납치범 중 생존자는 지금도 북한에 살고 있다는 후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꽃샘 추위 밤공기가 살을 에던 3월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숙하며 김포공항 철조망 밖에서 진을 치고 철야 잠복 근무, 그것도 단순히 시야에 겨우 잡히는 납치 항공기의 겉모습만 바라보며 취재하던 살벌한 기억을 더듬으면 이 순간도 모골이 송연함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평상시 기자들이 출입처 기자실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소위, 정회원 자격이 없으면 이같은 극한 상황속의 취재 현장에서 함께 뛰면서도 간헐적으로 전달되는 기내 분위기 한줄 기삿감을 두고 양반과 상놈의 입장보다 더한 신분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고 서자 취급 받는 기자가 많았으니 참으로 너무나 안타까웠었다.

당시는 '갑질'이란 단어가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게 바로 대표적인 갑질이었단 생각이다. 다행스럽게 필자는 전임 선배들이 터를 잘 닦아 놓은 터라 새내기치고는 고생이 덜 했던 기억이다. 기자실 출입 회원으로 잔반이나 소속사의 사세나 영향력을 등에 업고 무언의 유세를 보이는 꼴이란 지독한 꼴불견이었지만 이를 드러내고 불평하거나 항의하는 반응은 거의 타부시했었다. 그리고 당시 대개의 기자실에는 아파트 입구의 메일박스처럼 출입기자들 소속 매체의 회사명이 붙은 우편 락커함이 있어 평소에도 전달 사항이나 분배되는 촌지라도 있나 하고 개인 금고처럼 수시로 열어 자주 살피곤 했었다. 가끔 봉투가 잡히면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남몰래 조용히 펴보고 흐뭇해 하던 생각도 난다.

사실 중앙 일간지가 충심이 돼 결성된 1960년대 기자단은 힘센 권력에 대항하는 언론인들의 결사체 구실을 하는 조직이란 명분으로 태동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도중에 상당히 변질, 권력의 치부나 부정을 눈감아 주고 기자 개인과 소속 언론사의 이익을 추구하는 담합의 온상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권력과 언론이 한 통속이 되어 본연의 취재활동이나 사회 정화란 순기능 보다 이익추구에 몰두하는 폐쇄적 언론 카르텔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의 국무위원급 장관 부처 기자실이란 방은 출입기자들이 그 본업인 기사를 쓰는 곳이라기 보다 군림의 상징이요 쉼터나 휴식처 내지는 편의시설이란 인상이 더 강했었다.

물론 기자단이나 기자실이 중요 정책이나 정보 공개를 꺼리는 권력이나 정부기관에 대해 집단적 압력행사를 통해 긍정적 효과를 도출해내는 순 기능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기자실에는 취재한 기사를 송고할 수 있게 책상과 전화가 놓여있고 부처에 따라서는 극비 회의나 포커를 할 수 있게 라운드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된 별도의 밀실이 마련돼 있으며 심지어 취침이 가능한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놀음판이란 정해진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보면 오소리 잡는 굴 같이 담배연기 자욱한 밀실의 라운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특히 촌지라도 생기는 날이면 제법 판돈도 크게 포커판을 벌여 카드를 쪼으던 하우스 같던 모습 등 그 시대 기자실의 흔한 속 풍경이 추억으로 회상된다.

또 하나의 기자실 풍경, 주로 연말이 되면 소위 '총회'를 앞두고 밀실서 부처 각 실국지장이나 업계서 거둬들인 촌지를 테이블 위에 수두룩히 부어놓고 손가락에 침 발라 월급 봉투처럼 지폐를 분배해서 담아 연말 보너스 격으로 나눠 주던 그때 그시절 그 광경도 지금 되돌아 보면 그래도 어쩐지 따뜻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하기야 1991년 지상에도 보도된 바 있는 보사부의 촌지를 넘은 1억원에 가까운 척지(尺志) 사건이나, 흔히 콜을 해서 취득한 금품을 기자단에 전액 내놓지 않고 반타작을 하거나 심지어 독식으로 착복하다가 기자단에서 축출당하는 불명예는 당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인간이 지닌 직업과 시대적 속성의 한 단면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필자가 현역 시절에 겪은 또 하나 언론계의 큰 변혁은 소위 '프레스 카드(Press Card)'란 제도의 출현이었다. 1963년 청와대에 기자실이 설치된 이후 1967년에는 정부가 각 부처에 기관장 직속으로 공식적인 기구로 공보관실을 제도화하여 정책 홍보 및 출입기자들의 취재 편의 도모 기능을 다하는 부서로 정착화 시켰다. 하긴 당시, 나도 기자 너도 기자 누구도 기자에, 악덕 언론사나 사이비 기자들이 판을 쳐 사회적 문제점으로 대두되어 정리 대상의 위험수위를 보인 탓도 있지만 효율적 언론 기능 제고와 통제를 위해 1972년에는 정식으로 소위 '프레스 카드(Press Card)'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주무부 문화공보부는 전국의 기자들에게 고유번호를 기재한 기자증을 발급했지만 취재활동을 하는 기존 모든 기자들 전체에게 일제히 발급하지는 않았다. 장관급이나 차관급 행정 부처에 설치된 기자실 47개를 18개로 줄였다. 차관급 청장이 최고위직인 외청들은 기자실을 없애는 등 전체 출입기자 790명을 465명으로 감축했다. 미확인 풍문으로 당시 필자가 들은 바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충청지방의 한 교각 건설 준공식에 참석했다가 점심때가 돼도 헬멧 쓴 근로자들이 식사를 않고 있어 관계자들에게 까닭을 물은즉슨 식권이 동이 난 때문이란 답을 듣고 당일 행사 식권 배부 내역을 조사한바 신설 다리 하나 준공 행사에 중앙과 지방에서 몰려든 기자들에게 식권을 나눠주니 힘들게 공사장에서 일한 근로자 몫이 모자랐다는 보고였다는 것.

1962년 군사정부가 실시한 언론 구조 개편 10년만에 또 다시 나도 기자 너도 기자 시대가 도래한 셈이었다. 언론 정비의 빌미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외대 정진석(鄭晉錫) 교수의 자료에 의하면 신문협회가 집계한 일간지의 본사 기자가 2,564명, 주재기자가 1,676명이었고 일차 프레스 카드 발급자는 중앙일간지가 본사 1,533명, 주재 384명, 지방일간지가 본사 789명, 주재 367명, 통신사가 본사 401명, 주재 60명, 방송기자가 KBS209명, 민방 434명에 달했다. 보도증 또는 기자증으로 불리기도 한 프레스 카드를 첨 받아 쥐고 필자도 무척 신기했으며 취재에 앞서 프레스카드를 내 보여야 취재에 응했던 현장 기억도 되살아 난다.

언론의 통제기능으로도 이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프레스카드제도는 사이비기자의 설 자리를 박탈한다는 취지로 정부 기관은 물론 일반 기업도 이를 소지한 기자에 한해 취재에 응하여 편의를 제공토록 하고 해외여행과 전화 청약 등에도 언론인으로서 혜택을 받도록 운용했다. 이어 '정부출입기자대책'을 발표, 정부 각부처의 출입기자실과 기자의 수를 대폭 제한하여 행정부처에 있는 기자실을 한 부에 하나만 두도록 통합,폐쇄하고 출입기자도 한 부처에 1개사에서 1명만 출입하도록 제한했다. 이어 각 언론사는 자진 폐간, 통폐합 등을 통해 숫적으로도 크게 줄였다. 실제 5.16후 자율 형식으로 진행된 언론기관 최대의 통폐합 등 충격적인 언론 정비는 1980년에 이뤄졌고 살아 남은 언론사는 각종 지원에 힘입어 경영 호전을 누리기도 했다.

필자가 서울시청, 상공부, 관세청에 이어 1971년 출입처가 교통부로 바뀌어 첫 출근을 하는 날은 애당초 각오는 하고 갔지만 선임에 이어 기자실 회원자격이 자연 승계 되는 건지 아님 다시 심사대상에 올라 대기 상태에 들어가는지 아리송했었지만 워낙 몸을 낮추고 싹싹하게 군 탓에 크게 불편을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처음엔 준회원 정도, 나중엔 정회원 대접을 받으며 열심히 활동하고 부지런히 취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청와대, 중앙청, 경제기획원을 비롯하여 재무부, 농림부, 상공부, 건설부, 체신부, 외무부, 내무부, 법무부, 과기처, 국방부, 문교부, 보사부, 문공부, 서울시 등 중앙부처의 총 출입기자실은 47개에서 18개로 줄어들었다.

프레스카드 발급제 이후, 이들 18개 부처는 재무부 125명을 최다로 해서 최소 문공부 16명 등 모두 790명에서 출입기자가 325명이나 줄어들어 출입기자 등록을 마친 보도증 소지자는 465명으로 감소했다. 필자가 기자 생활 마감전 마지막 출입처로 배정된 교통부(MOT)에는 총 27명의 언론사 명단이 등재돼 있었고 그중 기자실 출입이 자유로웠던 기자단 정회원은 2/3 정도에도 못 미쳤던 것 같다. 희미한 기억으로 등록 언론사는 종합지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한국일보, 대한일보, 신아일보 등, 경제지로는 매일경제, 서울경제, 현대경제, 산업경제, 상공일보 등, 통신사로는 동양통신, 동화통신, 합동통신, 무역통신, 시사통신, 산업통신, 경제통신 등이었고, 영자신문으로 KT와 KH, 방송사로는 KBS, MBC, CBS, TBC, DBS 등이 함께 드나들며 기사 담합도 하고 취재경쟁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당시 교통부는, 김구(金九) 선생 차남으로 샹하이에서 태어나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6.25때 전투 비행단 공군대령 시절에 평양 승호리철교 폭파란 너무나 혁혁한 공훈을 세웠던 3성의 공군참모총장 출신 김신(金信/1922~2016) 장군이 장관(제21대), 교토제대 및 서울대 법학부를 졸업, 경북대, 동국대와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이재철(李在澈) 차관,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 정영훈(鄭泳勳/1932~2011) 해운국장, 서울대를 졸업한 김완수(金完洙) 육운국장, 헌병대 출신 민영환(閔泳煥) 항공국장 등 50년 전의 얼굴들과 당시에 취재에 열을 올렸던 그 시절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리고 힘께나 쓰는 유력 언론의 출입 기자들과 해운국장 공보관 등 거의가 연세대 출신들이라 괜히 주눅이 들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조심스레 옆을 살펴보니 나중에 창원 총국장을 지낸 KBS의 김두석(金斗錫/행정60) 선배와 합동통신의 김덕성(金德成/정외과64) 후배가 조족지혈로 눈에 띄어 눈치로만 힐끔거렸던 기억이다.

당시 기자실 멤버는, 뒤에 국회의원이 된 동아일보 이상하(李相河), 조선일보 장광대(張光大), 동화통신 김종인(金鐘仁), 서울신문 유승삼(劉承三), 한국일보 윤국병(尹國炳), 중앙일보 김경철(金慶澈), 대한일보 이원영(李元英), 무역통신 임영창(林榮昌), CBS 송석형(宋錫亨) 등이 생각나는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과 얼굴이 또렷하게 그려진다. 출입기자들을 담당하는 공보담당관실은 임유순(任裕淳)의 바톤을 이어받은, 역시 연세대 출신 선우만진(鮮于萬鎭) 공보관과 김상진(金相珍) 선박담당관, 김병훈(金秉薰) 내항과장, 최각(崔角) 외항과장, 이석환(李錫煥) 선원과장, 김재승(金在昇), 박경현(朴慶鉉) 선박 및 측도과장, 김준경(金準卿) 항만과장, 박수환(朴秀煥) 지도과장 등이 생각나고 큰 폼을 잡던 이한림(李翰林) 관관공사 사장의 모습도 눈에 아른거린다.

뒤에 해운국장과 철도청장을 역임한 최훈(崔薰), 최장화(崔章和), 이원(李沅) 사무관과 머리띠를 두르고 진급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던 허용구(許容九) 주사 모습도 생생히 떠오른다. 나중에 서기관으로 진급, 선원과장이 되어 서재국(徐載國) 영국 해무관의 주선으로 필자와 함께 유럽 여러나라를 출장다니던 때도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필자는 경제지의 특성을 살려 종합지들이 교통 사고나 사건에 관심을 두고 지면을 구상하는 데 반해 주로 선박 육해공상의 화물수송에 역점을 두고 취재를 했다. 특히 해운에 관심을 갖고 한국선주협회를 중심으로 한 외항해운 선사 및 대리점을 찾아 베를 날듯 열심히 취재를 했다. 계획된 경제개발계획에 의거 생산이 늘고 국제교역이 증가, 외항해운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감에 따라 선복량 증강이 현저히 늘어 해운업이 비약적 발전상을 보이던 때였다.

이재철 차관에 이어 김완수(金完洙) 차관이 뒤를 이었고 이용(李龍) 철도청장에 이어 역시 군 출신으로 뒤에 마사회장과 충북지사를 지내기도 한 오용운(吳龍雲) 청장이 부임하여 출입기자들에게 쌀을 보내고 겨울 추위에 따뜻하게 지내라고 담요를 선물했던 일은 두고 두고 정겨운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1972년, 김학열(金鶴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주빈으로 모시고 5.16 직후 총 10만톤에 불과했던 우리나라의 외항 상선대가 10배가 넘는 100만톤을 기록했다고 큰 잔치를 벌였던 기억도 새롭다. 당시 해상물동량이 1,600만톤으로 늘어 1억달러 운임수입을 올리며 국적선 적취율은 23%를 기록했다. 최초로 한/일간에 컨테이너 항로, 한/인니간에 정기항로가 개설됐고 박건석(朴健碩) 사장의 범양전용선은 조선공사에서 11,322G/T의 국내 최대의 벌크선 팬코리아호를 건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 하나 기억은 당시 철도청 포함, 교통부 출입기자들은 전관특면이라는 무료 철도이용증을 발급받아 언제나 특석 철도편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받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크게 우쭐하기 충분했던 특혜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도 하고 우습게도 생각되는, 정부 기관이나 업계가 취재 기자들에게 베풀던 사은품과 선물을 뒤돌아보면 가난한 후진국의 어렵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참으로 초라했었단 생각이 든다. 해운단체로는 주요한(朱耀翰) 회장 및 김병두(金昞斗) 전무의 선주협회가 비교적 여유롭게 식음이나 떡값과 촌지를 건넸고 전택보(全澤珤) 선박대리점협회장은 김준경(金準卿)전무와 강영구(姜榮九) 사무국장을 통해 명절이면 꼭 와이셔츠를 맞출 수 있는 쿠폰을 선물로 주거나 설탕을 교환하는 상품권을, 그것도 자주 다니는 몇 기자에게만 나눠 줬었다.

옛 1950년대 선물로는 햅쌀, 달걀, 생닭, 밀가루를 주고 받다가, 60년대는 설탕이나 비누, 조미료, 지갑, 양말 등, 70년대는 식용유, 치약, 믹스커피에 넥타이, 지갑, 허리띠, 구두표 등, 80년대는 양복맞춤 쿠폰, 갈비, 쇠고기, 참치 등, 90년대는 인삼, 꿀, 영지버섯, 과일, 백화점상품권이 주류를 이뤘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홍삼, 올리브기름, 과일, 와인, 헬스기구, 골프채, 레포츠 등 고가품에 이어 지금은 모바일 상품권, 디지털 선물에 이르고 있고 웃어야 할지, 요즘은 심지어 반려동물 선물 세트도 유행하고 있으며 그 종류도 다양하여 홍삼이 든 참치에 아토피 개선 유산균까지 등장하고 있다니 참으로 세상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명절을 맞아 출입 기자들에게 그래도 정성과 인정을 담은 증표로 전했던 사랑이 듬뿍 담긴 선물이었단 생각으로 흐뭇한 추억이다.

5,60년대 식순이, 차순이, 공순이로 불리며 식모와 버스차장과 여공으로 밖에 일자리를 찾을 수 없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절차를 생략하지 않는다고 했듯 고난과 눈물로 점철된 그 시절을 딛고 밟아 오늘을 이룩한 과정에는 정부관리나 직장인이나 기자나 그 어느 직종이건 간에 그래도 그 시대를 질머진 전위병과 역군으로 오늘의 풍요로운 밥상을 마련했다는 자부심을 저버려서는 안될 것이란 다짐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기자풍토를 논하기 위해 돌을 쳐들어도 먼저 자기 머리를 치지 않고서는 한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라고 술회한 어느 기자 출신의 회고록이 가슴을 적신다.

지금 같이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노트북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아용하여 언제 어디서든 취재가 가능하고 송고가 용이하며 앉아 있어도 보내오는 기사가 넘쳐 홍수를 이루는 판이고 보면 옛처럼 기자실에 상주하며 뉴스거리가 생기길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한편 기자실을 통해 취재원이 제공하는 보도자료에 의해 획일적으로 신문이나 방송이 뉴스를 생산함으로써 취재분야에 대한 창의적인 해설이나 전문성의 결여를 초래한다는 주장에 대해 필자도 논리적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다. 끝으로 이 칼럼을 통해 몇 번 언급한 크롱카이드와 월트리프만 같은 기자상, 그리고 영화 스포트 라이트(Spotlight)나 더 포스트(The Post)에서 진정한 기자정신과 품격을 다시 배우며 한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라는 말에 필자도 참으로 느낌이 많고 감개가 넘친다.(끝)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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