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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남 편집위원 칼럼]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 그 정의(正義)로운 정의(定義)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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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27  0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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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남 편집위원
며칠전 퇴임한 오랜 친구 5명이 두달에 한번씩 셋째 목요일에 모이는 삼목회(三木會)란 술자리서 감명 깊었던 옛 영화 모건 프리먼과 잭 니콜슨이 명연기를 펼친 '버킷리스트(Bucket List) 얘기를 하다가 문득 한 친구가 작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뒤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호흡기 감염 질환의 유행으로 주위가 이리도 시끄러우니 우리도 버킷리스트 삼아 동해안 해파랑길 답습이나 떠나자는데 의기투합, 총 770km중 속초에서 시작하여 1박2일간 우선 60km 정도만 걷고 왔다.

이해만 지나면 팔순에 이르니 그래도 7자 붙었을 때가 좋겠단 생각에서 다섯 노인이 함께 배낭을 메고 아침 일찍 고속터미널을 출발, 계획대로 첫날 일정을 무사히 끝내고 해질 무렵 동해 수산항의 민박집서 여장을 풀고 식사후 취침전 피로회복주를 거나하게 들고 보니 자연 화제는 작금의 세상 얘기로 갑론을박하다보니 틀딱 노인들의 시국 토론장이 되기 십상이었다. 모두가 횡설수설 작정한 주제없이 제 멋대로 떠들다 불쑥 필자가 "도대체 요즘 세상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 고 막연히 운을 떼자마자 막바로 각인 각색, 5인 5색에 중구난방으로 "아니 무엇이 정의냐"고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화제를 바꾸고 말았었다.

   
▲ 2012. 6.1 연세대학 노천극장에서 마이클 샌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든 14,000여명의 청중들
다음 기회 몇 번에 나누어 다시 나머지 710km를 완주키로 하고 1차 계획 60km를 끝내고 귀가한 뒤 필자는 토론을 벌이려다 말고 본론에 진입도 못한 채 접은 '정의'에 대해, 정신을 바짝 차려도 이해가 힘든 주제를 그냥 심심풀이로 관련 서적들을 꺼내 보며 필자 나름 한번 되씹어 보기로 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흔히 들먹이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라고 일컫는 사회적 정의는 무엇이며 흔히들 얘기하는 '정의롭다'는 말은 무엇에 본질을 두고 판단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했지만 막상 그 확실한 해답은 머리 속을 맴돌기만 하고 선뜻 정의내리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정의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우선 정의(正義/Justice )의 정의(定義/Definition)는 무엇인가? 그래서 정의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정의의 정의'는 단연 '자의(恣意)대로', 즉 ‘각자가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내려도 좋은 것'이라는 뜻에 가깝다는 필자 스스로의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궁극적인 선(善)으로 행하려는 목표가 겨우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즉 어떤 사실이 말하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돼도 좋다는 말인가?.

또 정의란 공정(公正)과 함수관계에 있는 뜻으로 대체될 법도 하다. 따라서 그 역으로 공정함은 정의로움이 바탕일 것이란 논리가 머리를 스쳤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평균적정의(平均的正義)', 즉 '같은 것은 같게', 이어 '배분적정의(配分的正義)', 즉 '다른 것은 다르게'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선거권과 같이 누구에게나 똑 같이 인정해야 하는 절대적 평균이 정의의 원칙이란 주장이 그 하나일 것이다. 반면 인간이 몫을 나눠 갖거나 대가를 치를 때는 능력이나 기여도에 따라야 한다는 '배분적 정의' 원칙에 따라 되레 차등화가 마땅히 정의란 논리가 성립된다.

또 최근 국제사회의 무력행사와 외교분쟁 및 상품교역이나 우리나라의 정계나 시국 관련의 제반 법무행정 및 사법처리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정의 문제는 '교정적정의(矯正的正義)'로 분류하여 범법행위나 피해 또는 손상에 대한 처벌과 배상을 결정하는 대응의 공평성 여부를 가름하는 정의를 일컬음으로 관심이 높은 또 다른 한 분야다. 그리고 어떤 사안을 결정하고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절차나 방법 및 그 결정과 판단 과정이 공평했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소위 '절차적 정의(節次的正義)'도 다른 한 분야로 분류되고 있어 참으로 정의는 다양한 시각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번하고 정의에 관한 얘기라면 10년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써 세기적 베스트셀러 저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스라엘 정치철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교수와 쌍벽으로 유명도와 인기가 비교되는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is the right thing to do'/2009)'란 저서로 전세계 지성을 감동시키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년생)교수의 정의론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27세 나이 하버드 최 연소 교수로도 이름을 날렸던 그는 2012년 6.1일 우리나라에도 와 연세대학 노천극장에서 14,000명이 모인 가운데 '돈으로 살 수 없는(What money can't buy)'을 주제로 명강의를 한 기억도 새롭고 책도 많이 팔려 한국에는 더욱 지명도가 높았었다.

그러나 400쪽에 달하는 역작을 냈지만 샌델도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의를 이해하는 세가지 방식으로 각 개인에게 어떻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줄 것이며,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해서 이를 위해서는 행복, 자유, 미덕이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피력했다는 게 필자 독후감이다. 그는 행복극대화 자유존중, 미덕쌓기를 정의의 으뜸으로 꼽았다. 그러나 똑 부러지게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만들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하는데 역저의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결국 우리가 목말라하는 건 정의론, 즉 정의의 뜻이나 기준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데 이의가 없어 보인다. 마이클 샌델도 정의를 이해하는 세가지 방식은 인간의 삶에서 행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1.공리주의(公利主義), 2.최대한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自由主義), 그리고 3.미덕과 양질의 삶을 지향하는 공동체주의(共同體主義)를 앞세웠고 이를 골격으로 갖가지 사례를 열거, 분야별로 검토하고 비판하며 독자가 자기나름의 정의관을 수립하는 길을 일러주고 있다.

첫째, 공리주의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러미 밴담(Jeremy Bentham)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주장에서 비롯돼 18~9세기의 유럽 정신세계에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오는 일을 도덕의 기초로 삼아 그에 적합한 행위일수록 올바르게 보는 사고방식을 정의의 기초로 삼았다는 생각이다. 또 유사한 영국의 계몽주의자로 정치, 철학, 경제 분야에 영향을 끼친 제임스 밀(James Mill) 역시 공리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학자였다는 데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밴담은 "도덕의 최고 원칙은 가장 큰 행복을 산출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전체적으로 고통을 상쇄하고 난 나머지 쾌락의 양을 가장 크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공리주의는 행복이나 쾌락이라는 단일가치를 양적으로 측정하여 그 총량의 극대화, 즉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둘째, 샌델은 자유주의를 자유지상주의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로 나눠 자유지상주의(Liberalianism)는 시장의 자유를 절대 지지하고 재분배를 위한 조세정책이나 복지정책을 배격했다. 한편 구체적 원칙이나 기준을 세우긴 어렵지만 정의는 공동체 속에 존재한다고 공동체주의적 정의론을 제안한다.

그리고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이 제시한대로 각자의 이해관계나 특수한 입장을 무시하는 '원초적 평등조건'을 설정, 이에 기초한다. 우선 기본적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제공돼야 하고 이어 사회의 직위와 직책은 모두에게 개방돼야 하며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의 입장을 개선시키는 범위내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본다. 샌델은 개인은 철저히 고립된 존재이고 국가나 공동체도 중립적이라 비판하고 그의 정의론은 공동체속에서 도출되는 미덕이나 탁월함에 대한 합당한 대우나 보상 제공을 정의로 생각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무엇이 옳은 일인가?", "무엇이 정의인가?" 에 대해선 쉽게 단정짓기 어렵다고 했다. 도덕적 감정에 충만해서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명쾌하게 획일적으로 구분하려는 인간의 능력은 한계를 느낀다. 특히 정치세력들이 정의에 과도하게 몰입하면 필연적으로 나만의 정의, 즉 독선을 낳게 된다는 것. 가장 정의로워야 할 정치세력들, 정의란 어휘를 가장 많이 쓰는 정치인들이 정의의 잣대를 휘게 하거나 자의로 눈금을 매기는 사례가 빈번하리란 게 나이가 들어 정치판을 오랫동안 보아온 필자의 생각이기도 하다. 300명이 저마다 300개의 정의관을 가졌다면 필자의 억측일까?

개인의 탁월한 능력은 순전히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 쌓아올린 결과물이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을 얻고 더 많은 수입을 얻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 풍요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만끽하는 경우가 상당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부모나 기타 다른 환경의 뒷받침, 즉 타고난 수저의 색깔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이는 공정한 경쟁에 의한 정의로운 결과로만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해도 학군이나 사교육이 대학 진학에 미치는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지 않을까다. 출발부터 절대 공평이나 정의로운 정의는 결여된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다.

또 어떤 불합리한 힘이나 제도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노력이 정의라고 결론짓기도 한다. 법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던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에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라는 동해복수법에 기초한 성문 형벌법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 정의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도,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의 규현이기 때문에 최고 공직과 영광은 고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Perikles)처럼 미덕이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의 선(善)인지를 아는 사람에게 결실이 돌아가야 한다는 정의론과 궁극적으로 사회통합과 일부가 아닌 전체가 행복한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정의란 견해도 공존한다.

정의를 단순히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에 자의적 기준을 둔다면 이 세상에는 비생산적인 소모성 논쟁은 끝이 없고 작위적으로 불편부당하게 행사하지 않으면 그 의미와 기준은 비슷하리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경향이 높다. 공동체를 위요한 사회적 정의는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고 특히 정치세력들이 정의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필연적으로 나만의 정의라는 독선에 빠지기 싶다고 경고한다. 작금 우리 정치 현상에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게 확연한 필자의 견해다.

현실에서 실제 마주치는 정의의 현실적 문제는 누구나 양심에 맹세한다쳐도 관점이나 기준이 모호해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관한 다양한 주장과 이견이 범람하고 충돌하는 현대사회와 정신문화 여건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고 심지어 샌델마저도 그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고 솔직히 고백했듯이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하루에도 여러번씩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가 정의로운지 자성하게 되고 부단한 노력으로 그 근사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존하고 있다는게 필자 소견이다.

또 법이 추구하는 궁극적 이념이 정의이고 '정의로움'에 관한 관념이 윤리적 정의이며 인간은 예외없이 절대적인 권리로서의 인권을 갖기에 그 어떤 인위적 차이나 차별이 없는 수평적인 관계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게 가장 정의로운 사회에 이르는 첩경이란 것. 한 예로 난임자가 자궁과 난자를 한묶음으로 구매하지 않고 친엄마가 자기 난자를 사용하여 대리모를 구하게 되면 한달에 20달러를 받던 빈곤국의 한 여성이 부자 나라 사람으로부터 무릇 아홉달에 5,000달러를 받고 애기를 생산하면 쌍방이 모두 이롭고 행복한데 이는 왜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걸까?

혼잡한 거리 질서를 위해 노점들을 강제 철거하는 당국과 생존권을 내세워 저항하는 상인들 중 그 어느 쪽이 정의롭지 않은 것인지. 홍수로 다리가 없어지자 강건너 밤마다 운우지정을 찾아가지 못하는 홀로 사는 어머니를 위해 효불효교를 놓아 준 자식들은 산 어머니 보다 죽은 아버지를 위해 크게 불효하는 것인지. 국위를 선양한 스포츠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하는 것은 과연 정의로운 건지. 성인 남녀끼리 합의하에 거래되는 매춘은 왜 부당한지. 불치병 고통환자의 안락사 전문 병원이 겨우 스위스 밖에 없다면 인간은 맘대로 죽을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건지 궁금하다. 국민은 누구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이 보장되는데 총선 출마를 소속 정당에서 제한하는 것이 또한 정의로운지 알 수 없다.

마지막 에피소드격 정의론 한마디. 어느 대학의 경영대학 학장에게 "당신의 경영대학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단연 '정의로움'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희 대학 교훈은 자유·정의·진리입니다. 이 중에서 꼭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코 '정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고와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타협하지 않는 자세, 자신이 손해 보더라도 정도를 걷는 마음가짐, 일희일비하지 않고 길게 내다보는 태도가 다 이 '정의로움'에서 나온다고 봅니다."로 답했다는 실제는 출신 자체가 인맥으로 포장되는 한국사회에서 정의에 대해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정의'는 생명처럼 중요한 가치를 갖는 공정성이 그 원천임이 틀림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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