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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남 편집위원 칼럼]"선배요 멘토에 모두가 해운계 한가족" 韓海大 싱글 기수들과의 半世紀 회고-(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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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6  02:2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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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남 편집위원
얼마 안 남은 이 해가 가면 스스로도 깜짝 놀랄 여든 나이로 팔순을 맞게되니 흔한 상투어, 인생무상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삶이 깊숙히 황혼에 기운 게 틀림없나 보다. 따라서 변방 기슭에서나마 반세기를 웃도는 세월을 더러는 보람있고 자랑스럽게, 때로는 덧없이 보낸 해운업계에서의 일생과 그 뒤안길이 노스탈지어로 아롱져 자주 뇌리에 떠올라 이젠 뭔가 지난 세월을 정리해야 할 때에 이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 약관 20대부터 여러 부처를 거쳐 마지막 출입처였던 교통부에서 육운, 항공, 철도, 관광 분야에 앞서 경제지의 특성상 유독 해운과 물류 분야에 관심을 갖고 발빠르게 쏘다니며 취재차 또는 업무 수행상 만났던 숱한 바다와 해운 물류계 인물들을 그루핑해서 50여년 반세기 옛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한국 경제의 도약기 젊은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필자가 해운계 보학을 전공했단 말을 들을 정도로비교적 많은 인사들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첫째, 취재와 보도가 주업인 매스컴에 종사하며 여러 부처를 출입한 취업 직종의 특성상, 둘째는 해운업의 구심점 역할을 다하는 '한국선주협회'란 선주단체 근무의 성격상, 셋째는 선박 선원 등 해상업무를 맡았던 보직상, 넷째는 웨이버(Waiver) 업무 담당으로 외국적 선사 및 국제해운 대림점 종사자들의 민원 업무를 맡았고, 또 하나 더 다섯째는 활동 영역의 에스컬레이션적 개성으로 인해 나이와 사회적 직위나 관장 업무에 비해 특별나게 여러 사람들과 교호하며 발품을 많이 판 탓에 만나서 대화하고 업무나 행사때 인연을 맺은 인물이 관계나 업계에 유달리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타칭 '마당발'이란 얘기를 들으며 지금까지 살아 온 것 같고 역시 결정적 요인은 선주협회가 필자를 스카웃한 홍보나 조사업무 주특기와는 전혀 다르게 어느날 갑자기, 승선경력과 해상 경험이 풍부한 해기사 출신이 맡아야 하는 협회 '해무부장'이란 부서를 맡은 때부터 관장업무가 상전벽해로 디비에이션, 제2의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낙동강과 한강서 나룻배 몇 번을 타 본 경험밖에 없는 필자가 70년대 중반, 해무부장을 맡고 보니 천지를 모르는 낯선 업무들과 날마다 부딪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선박이나 선원정책 그리고 해운관련 각종 법령과 국제조약이나 협약에 포위당해 오금을 쓸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IMCO(정부간해사자문기구)의 STCW(선원의 교육훈련, 자격증 및 당직에 관한 표준)를 비롯하여ILO(국제노동기구) 문제, MARPOL(해상오염방지협약), SAR(해상인명구조협약), CORLEG(국제해상충돌예방규칙), GMDSS(국제해상조난안전제도), PSC(항만국통제) 등등 이를 파악하고 팔로잉하기에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우선 한국해대와 목포해대의 승선학과 커리큐럼 전반에 걸친 목차부터 익히며 '서당개 3년 풍월과 식당개 3년 라면'의 어깨너머식 공부를 언론고시나 사법고시를 준비하듯 줄곧 머리띠를 두르고 집에 와서도 금주령을 내리고 예비군 훈련도 연기하며 밤낮 독학을 했다.

그리고 해상경험과 승선경력(?)을 쌓기 위해 틈틈이 양개 해대의 한바다호와 유달호 등의 재학생 원양실습에 합류, 동남아 일원과 인도의 갠지스와 캘커터, 버마의 랑군을 비롯하여 키룽과 나카사키, 홍콩, 코베 등지의 항만을 선원수첩 없는 실습생으로 견학을 했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업무 숙지의 일환으로 관선을 하거나 예인선에 오르고 도선선에 편승, 파일러트와 함께 래더를 타고 갑판에 올라 도선 현장을 견학도 하며 짝퉁 해기사로서 마도로스 경력을 익히기에 전력을 다했다. 삼천포항 파일럿 스테이션에서 연료탄을 싣고 입항하는 한해대 13기 허진구(許璡九)선장과 본선에 합류해서 코파일럿팅 도선 현장을 견학하며 화력발전소를 찾은 기억도 엊그제 같다.

세계적 국제기구인 IMCO나 ISF 및 LLOYD 등의 총회와 국제회의에 참석도 하고 선원노조 및 항운노조와의 단체협약 및 KR을 위시한 예도선 조직이나 단체의 업무는 물론, 항만요율 조정과 웨이버 업무에도 전력하며 짜가(?) 해기사가 진골로 영역을 넓혀가기에 바쁜 일과로 수년을 강행군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했는데 알고서도 어려운 바다에 배를 띄워 돈벌이를 하는 해운기업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이 되는 본선 자체에 대한 지식이나 이를 운행하는 승선 요원들의 교육 훈련 및 선박과 선원에 관련되는 각종 법령 및 안전문제와 보험문제, 그리고 국제항로에서의 제반 협약 이행과 대책 수립업무가 나날이 끊임없이 큰 과제로 닥쳤다.

당시 산별 노조 중 10만 조합원을 거느린 막강 전국선원노동조합을 상대로 사용자 측의 노사대책 수립과 시행, 그리고 선종별 선형별 단체임금협상은 너무나 벅차 고무새총도 버거운 필자에게 LMG나 박격포를 안겼으니 안봐도 비디오였다. 의과대학을 나오지 않은 돌팔이 의사가 메스를 잡고 수술환자 앞에서 당황하듯 선박과 선원에 대한 현안 당면문제를 두고 긴장하며 제앞을 못가리고 혼쭐나게 수 삼년을 지내다 보니 지성이면 감천이려니 그래도 꾀가 생기고 요령도 늘어 드디어 반풍수가 지관이라도 된 양 행세하는 비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또 교통부 출입 기자 시절 해운계를 중점적으로 취재하며 익힌 낯도 있거니와 업무 수행상 당시 내로라 하는 해기사 출신들과 함께 주요 정책 입안에 참여하다 보니 해운, 선박, 선원, 국제문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실무적으로 깊숙히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승선 경험이랍시고 자주 배도 타보며 육상 근무에 접목하고 보니, 협회가 소집하는 각종 회의나 민원업무 처리차 사무국을 찾는 주니어 해기사 출신들은 해무부장인 필자가 어젠더를 택해 체어맨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으레 해기사 출신으로 알고 "몇 기(期)이십니까?"로 묻는 질문에는 한결같이 미리 준비된 모범 답안 첫번째가 "난 와일드 카드, 조커 기수다"였다.

즉 필요나 상황에 따라 어느 기수에고 끼어 넣을 수 있는 기수란 뜻이었다. 두번째는 "한국해대는 16.5기, 목포해대는 11.5기다"였다. 1942년 1월생이니 한국해대라면 16기나 17기 상당이고 목포해대라면 11기나 12기 상당이란 뜻이렸다. 그래서 알만한 사람끼리는 다 아는 우스개로 "그때 그때 다른 롤라코스트 기수, 유일하게 소숫점 기수 16.5기와 11.5기"로 농담을 하며 이는 지금도 통하고 있는 절친들과의 조크다. 한편 당시는 급격히 늘어나는 수출입 화물과 선복량을 충족시킬 해상직원의 교육과 양성이 수요를 따르지 못 해, 협회 정책기구인 해무위원회를 열어 선사 사장들과 담당 중역들이 연일 모여 그 대책에 골몰하던 때가 생각난다.

한국해대 단기 해기사 양성 코스인 전수과의 부활, 부산과 인천에 선원학교 신설, 해기연수원의 설립과 기능확충, 해기사의 해외취업 억제 등 부족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열불나게 머리 맞대고 대책수립에 불철 주야 모두가 애쓰던 모습과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그래도 재미있어 했던 그때가 보람찬 추억으로 영혼을 적시며 마음 한켠을 적셔온다. 특별히 잊혀지지 않고 생각나는 일은 협회 회장단이 중심이 되어 한해대 연습선 '한바다호' 운영 지원을 위해 '실습선 후원회'를 만들어 국내에 입항하는 5,000G/T 이상의 상선들은 무조건 척당 20,000원씩을 강제 징수키로 하고 필자 해무부장이 직무규정에도 없는 악명 높은 세리(稅吏) 노릇을 했던 일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목해대 유달호까지 확대 적용했던 일도 흐뭇했고 자체 실습선으로 소화 못 하는 실습생들을 국적선사에 의뢰하여 억지 분산 실습을 시키던 고충은 참으로 너무나 눈물겨웠고 지금도 가슴 찡한 추억으로 남는다.

따라서 가끔 중앙 여러 행정부처를 비롯, 해운과 관련된 교통부, 철도청, 해운항만청, 해양수산부, 국토해양부 등 해운정책 관련 행정당국과 업계 실무를 거치면서 취득한 실무보다 우선 한 시대를 함께 했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일방적인 환상대화를 나누며 그려 볼 때가 잦은 건 아마도 나이탓? 초창기 한국해운을 이끌어온 인물 가운데 해기사를 중심으로, 올들어 72기를 배출한 한국해양대학 출신 중 우선 1기에서 10기까지의 졸업생, 소위 싱글 기수들 중 인연이 닿았던 선배들과의 만남과 교분과 업무 등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회상하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한다. 또한 친소에 관계없이 취재 기자 시절이나 업무 수행을 통해 필자의 뇌리에 남아있는 일방적인 기억을 되살려, 육상 근무 인물 중심으로 소설로도 모자랄 숱한 사연을 지면 관계상 거명정도로 대신하는 아쉬움도 밝혀둔다.

어쩌면 필자 스스로의 삶과 과거를 훑어 되돌아보는 자전적 의미의 회고록을 엮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짧지 않은 지난 세월동안 지상 보도나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지만 이미 작고하신 분들껜 먼저 다시 한번 이 기회에 정중히 묵념하며 삼가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한편 생사 여부와는 관계없이 필자가 그동안 해운계에 근무하면서 짧게 혹은 길게 얼굴 맞대고 함께 활동했던 싱글 기수들과의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그 편린들을 슬라이드처럼 엮어 회억의 파노라마로 퍼즐 맞추기를 하려드니 당시의 정확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소속과 직위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안기수(非期數)' 필자 보다, 많게는 15~20년, 적게는 7~10 연상의 선배요 멘토에 해운계 한가족으로 그 대열에 끼어 함께 보낸 세월은 돌이켜보면 한마디로 큰 영광으로 점철되고도 남는다.

또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해기사 양성기관으로 손꼽히는 상선사관학교 한국해대가 1945년 11월의 역사적 출범과 개교의 주역이었던, 동경고등상선 출신의 기관장, 해당(海堂) 이시형(李時亨) 초대학장과 11대 학장을 지낸 삼주(三注) 윤상송(尹常松) 박사를 비롯, 임기택(林基澤) 세계해사기구(IMO) 사무총장(항해과 29기), 그리고 문성혁(文成赫) 현직 해양수산부장관 등 한국해대를 거쳐간 기라성 같은 큰 별들도 차례로 거명할 뒷날을 약속한다. 아울러 차제에 필자가 우스개 삼아 평생 외는 말, '한국해대와 목포해대의 명예졸업생'과 '한국해기사 양성의 양대 산맥인 한해대와 목해대의 종신 홍보대사', 그리고 비록 짝퉁에 무면허 해기사지만 그래도 자가 부여한 '해기면장은 항해, 기관, 통신 등 트리플, 3개면허 소지자'를 자처하는 유머와 희망과 사랑도 감히 덧붙인다.

【 1기 】필자가 1960년 후반에 만나 업무상 또는 그 시대를 함께 하고 기억에 남는 1기생들은 주로 항해과 출신으로 김동화(金東華) 라스코해운 대표, 박현규(朴鉉奎) 고려해운 전무, 범양전용선 박현호(朴鉉皓) 전무, 손태현(孫兌鉉) 한국해대 11대학장, 양학권(梁學權) 조광해운대표, 이준수(李俊秀) 한국해대 13대학장, 이용규(李龍奎) 부산항 도선사, 정희정(鄭熙亭) 도선사협회장, 허동식(許東植) KR 회장과 그리고 기관과 김상진(金相珍) 교통부 선박담당관 등이다.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고려해운, KCTC를 거쳐 아직도 살아있는 한국해운의 전설적 현역으로 건재하고 올 99세에 이른 손태현 학장은 작금도 집필을 계속 중이며 근년 운전면허도 갱신, 핸들을 잡는단 소문도 들었다.

부산과 서울서 자주 뵌, 천성이 학자타입 이준수 학장의 어진 모습과 필자 부산 근무 때 중앙동 주변서 최재수(崔在洙), 허일(許逸) 교수와 함께 막걸리를 대작하던 추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통부 출입기자시절 김신(金信) 장관과 정영훈(鄭泳薰) 해운국장과 함께 일하던 선박 담당관 보직일 때 첨 만났고 부산지방청장과 KR 회장으로 활동했던 거제 출신 김상진 회장은 긴 세월을 두고 만나면 늘 70년대를 얘기했다. 국내 처음으로 한국선급(KR)을 만들어 동분서주 골몰하던 넉넉한 품성의 허동식 이사장, 도선사협회장을 맡아 학계 정세모(鄭世模) 교수와 김길성(金吉成) 도선사를 실무로 대동, 선주협회측 실무책임 필자의 파트너로 대결시켰던 정희정 회장과는 도선요율 줄다리기를 일삼던 때도 엊그제 같다.

결국 마무리는 최학영(崔學永) 후임 회장을 통해 선주협회와 협의 끝에 한국해사재단을 탄생시켰던 핸섬보이(?) 정 회장이 회의때마다 폴드식 일제 간다 돋보기를 쓰고 나타나 넘 신기하던 모습 또한 50년이 된데도 기억 생생, 눈에 선하다. 그리고 협회 회의에 참석한 박현호, 박현규 형제가 동급생이란 사실도 볼 때마다 참 신기했고 또 양학권 도선사는 아들과 손자 등 3대가 KMOU 동창생이라 화제였다. 혹시 짝퉁도 해기사 족보에 넣는다면 필자 역시 3대가 해기사란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단 해기사 집안의 진화론과 전통을 잇겠단 희망사항이 요즘 코로나로 시끌한 바람에 그 추이가 어수선할 따름이다.

【 2기 】항해과는 아진해운(?)으로 기억되는 김익남(金翊南), 김수금(金洙錦) 인천항도선사, 김재승(金在昇) 선박과장과 검사측도과장, 박민균(朴敏均) 인천항 도선사, 서병기(徐丙機) 동지상선 대표, 송경배(宋敬培) 조양상선 부산소장, 신태범(愼泰範) 고려해운 부사장, 오세일(吳世一)  캡틴석유화학, 이정열(李廷烈) 대한선박 상무, 이종성(李鐘成) 극동 쉘, 최용도(崔用道) 여수항 도선사, 홍세주(洪世疇) 등이 기억나고 기관과는 김주년(金周年) 한해대 교수, 동서해운 이전의 박재혁(朴在赫) 해운공사 상무(?), 박순석(朴順錫) 해기사협회 전무, 배광호(裵光鎬) BCTOC 이사장, 심상호(沈相昊) 고려예선 사장, 오용한(吳用漢) 한국선급 상무를 만나 일했던 기억이 난다.

1970년대 선주협회 부회장 자격으로 조양상선 박효원(朴孝源) 부사장과 흥아해운 조희량(曺禧亮) 전무, 사무국 김병두(金昞斗) 전무와 함께 협회를 중심으로 외항해운업계 전체 살림을 일일이 참견하고 챙겼던 신태범 부사장은 KCTC 회장으로 요즘도 매일 출근, 박재혁 동기와 함께 바둑도 즐기며 지금도 건재하다. 해대교수, 해기사협회장, 상꼬(三光)를 운영하던 서병기 사장은 당시 ILO와 ITF 문제 중요성을 업계에 부각시키기 위해 1차 통로인 선협 해무부장 필자를 자주 찾아 개인 레슨을 하거나 명동 사보이호텔로 불러 융숭한 대접(?)을 하며 국제노동기구와 운수노조 및 편의치적선 문제의 심각성을 역설하던 열성, 해기사협회장을 상근직으로 바꿔 활동하던 모습이 마냥 그립고 또 오세일 선장의 철제 의수(義手)를 응시하며 술잔을 함께 기울이던 모습도 아련하다.

성격은 급해도 다정다감했고 해기사협회와 노동조합을 오가며 업무상 참 자주 만났고 많이 배려도 해주던 박순석 전무 및 위원장은 근로자 입장을 대변하는데 열정적이었고, 90년대 초 필자 부산 근무 시절 3년 자주 삼계탕집서 만나 업무를 함께 논의했던 심상호 사장, 가끔 예선업 종사 팀들과 친선 방문차 여수항을 찾으면 즐비하게 어촌 음식상을 차려 맞아주던 최용도 도선사가 '여수 밤바다'란 유행가 속에 아련히 떠오른다. 또 '홍세주'란 본인의 성명을 "홍세두야요"로 구개음화식 발음을 한대서 웃음을 자아냈던 홍세주 사장 등 어려운 시절에 해운한국의 한가족으로 함께 했던 모습을 지켜 봤던 필자는 아흔 중반을 넘은 작고 혹은 생존 선배들 나이를 생각하면 숙연한 마음이 앞선다.<계속>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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