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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남 편집위원 칼럼]"선배요 멘토에 모두가 해운계 한가족" 韓海大 싱글 기수들과의 半世紀 회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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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28  03: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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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남 편집위원
【3기】한국해대 싱글 기수 중에서 제3기는 항해학과 30명, 기관학과 21명에 조선학과가 신설되어 15명 정도 등 총 66명이 졸업, 숫적으로 아주 적었고 따라서 필자가 교분을 나누거나 함께 업무를 같이 한 인사는 다른 싱글 기수에 비해 매우 적었다. 항해과는 27년생으로 남성해운, 금명해운을 거쳐 한국선박 대표를 역임했던 박태홍(朴泰鴻), 대한해운공사를 거쳐 부산항 도선사로 일한 심상일(沈相一) 선장과 역시 70년대부터 부산항 도선사로 제2대 전국도선사협회장을 역임한 이세희(李世熙) 선장, 인천항 김남흥(金南興) 도선사 정도가 항만 취재시절과 협회 업무 수행 시절 기억된다.

청주상고 출신으로 해운공사를 거쳐 인천항 도선사로 재직하며 전국도선사협회장을 역임한  이용우(李庸祐) 선장과 그리고 전술한 바 있는 2기 최용도(崔用道) 선장과 함께 여수항을 꾸준히 지킨 황호채(黃鎬采) 도선사는 선배들이나 동기생들 보다 출생이 빠른 25년생으로 도선 업무 외에 국제라이온스협회 지구종재와 적십자사 등을 통한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활발히 했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3기 중 유일하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기관과 출신 손근배(孫根培) 인천항 갑문소장의 첫 만남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새로운 도크시설과 함께 잊을 수 없다.

갑문소장을 마친 뒤에, 필자에게도 자주 작품을 선물하며 서예 재능을 뽐냈던 이성림(李盛林) 전무에 이어, 한국도선사협회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90년대 이천금강병원 상임고문을 지낼 때도 해항회 모임이나 기타 소규모 해운 관련 모임에 후배들과 어울렸고 가끔 회식자리에도 나와 아흔이 넘은 나이를 잊고 사는 노익장은 후배들 부러움의 대상이라며 선호하지도 않는 억지 술잔을 필자가 권하기도 했다. 한편 3기부터 신설된 조선학과 출신으로는 (주)한국선박기술을 운영했던 김철준(金喆俊) 회장이 유일하게 기억에 저장돼 있다.
 
【4기】항해과로는 우선 한국해대를 나와 해운공사와 코리아라인을 거쳐 아진해운을 창업했고 해운산업합리와 과정서 합병된 두양상선 사장을 맡아 해기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선주협회장에 등극, 필자가 사무국 상무이사 시절 직접 모시고 업무 지시를 받은 조상욱(趙商郁) 회장이 기억난다. 때 맞춰 해운공사, 해양경찰, 고려해운, 삼광기선(三光汽船)을 거쳐 인천항 도선사로 전국도선사협회장을 맡아 동기끼리 요율 다툼을 벌이며 어색해 했던 전북고 출신의 최학영(崔學永) 선장이 기억난다. 이해가 엇갈린 선주단체와의 요율문제로 끝없는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희정 회장이 마무리 짓지 못한 압무를 이어받은 최회장이 도선사협회장에 선출된 건 아이러니하다는 소문히 파다했었다.

절대적으로 당연히 요율인상을 억제해야 하는 입장의 선주 단체와의 협상 상대인 도선 단체장에, 안면 작전으로 동기를 선출하여 맞서게 하는 것은 선주에게 단연 불리하다는 여론이 팽배했으나 결국은  해사재단을 탄생시켰고 서로 상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실무 뒷치닥거리를 했던 필자 기억을 간지럽힌다. 관계쪽으로는 동해청장을 거쳐 부산항무국장을 역임하고 하역협회와 항만협회에서 일하던 강석천(姜錫千) 이사장의 단아한 모습이 떠오른다. 항무국장 시절 협회 최재수(崔在洙) 전무와 부산 출장을 가게 되면 전관인지 전임예우로 식사대접을 해주던 기억과 모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를 취득한 기록 및 30년전 당시로선 거액의 전재산 3억원의 장학금을 후배들에게 기부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그 밖에는  취재차 만난 해운공사 백용흠(白龍欽) 전무가 당시 4기 동기들 보다 6~7년이나 연상이란 기억이 앞서고 박태안(朴泰安) 한국해사연구소장, 황보대선(黃甫大宣) 등 몇 분이 떠오른다. 기관과에서는 경주고 출신으로 포항해사국, 인천해운국표지과, 부산해심을 거쳐 한국선급에 근무하던 박상훈(朴相勳) 인천지사장과는 각종 회의서 만난 기억이 우선 떠오르고, 아세아상선 박종문(朴鍾文) 해사부장, 선박검사관으로 출발 지방해운국을 돌고 송출선원도 했던 구강회(具江會), 대전사범을 나온 교사 출신으로 후진과 해운업계에도 크게 기여를 했던 삼부해운 김태인(金泰麟) 회장, 그리고 ABS 최초 한국지사 회장직을 맡았던 신시범(愼蒔範) 회장을 첨 뵀을 때 당시 2기 신태범 고려해운 전무의 친형이란 얘기를 듣고는 신기해서 놀랐던 일이 새삼스럽다.

조선학과 출신으로는 필자가 50년 전 관세청 출입기자 시절, 초대 이택규(李宅珪) 청장, 최운지(崔云芝) 차장 무렵에 부임한 송병순(宋炳循) 세무국장이 떠오르고 프로필 기사 답례로 촌지를 받은 기억도 새롭다. 뒤에 관세청장, 광주은행장, 은행감독원장 등 해양대 출신으로 드물게 금융계 고위직을 두루 맡았었던 송 국장은 역시 관세청장을 지낸 김욱태(金煜泰) 관세감독관과 함께 초기 관세행정을 도맡았었다. 관복을 벗고 난 뒤에 대동관세사무소를 차려 활동하고 있어 울산서 감격적으로 재회하기도 했던, 당시 기관과 13기 김동수(金東洙) 담당 사무관과 각별히 친해지자 열심히 보도자료를 챙겨주는 바람에 특종을 많이 써 민완기자로 부러움을 샀던 흐뭇한 옛 추억도 감동스럽다.

또 조선과 출신으로 해운공사 상무이사와 코리아라인 전무이사를 거쳐 동방해운을 설립하여 대표직을 맡아 경영하던 조원석(曺元錫) 사장은 드물게도 어느 해 가을 주말에 시골 연고지 마을에 한국선주협회 사무국 총수였던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예비역 대장 김용배(金容培)이사장을 비롯한 임직원 전체를 전용버스를 보내 후대하며 위로 격려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삼 고마웠단 생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조 사장은 한국해운중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포워딩업계를 발전시킨 공로도 컸었다.
 
【5기】항해과에선 한때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해운업도 경영했던 삼익주택과 삼익상선의 이종록(李鐘綠) 회장이 크게 돋보였고 선주협회 의결기구인 감사로도 참여했다. 제8대 모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했고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중견 삼익상선과 삼익아파트로 한때 상당한 명성을 쌓았던 이 회장의 듬직한 모습은 아주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또 자주 업무상 접했던 KR의 선급관리부장과 런던사무소장을 거쳐 KR의 부회장을 역임한 신호철(申浩澈) 국제신사를 잊을 수 없다. 검사요율 때문에 갑의 입장에 있은 탓인지 띠동갑 필자를 친구처럼 친절히 대해줬던 참으로 후덕했던 신 부회장의 늘 여유롭게 미소띈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국제해사기구(IMO)의 기술회의 참여는 물론 국제선급연합회(IACS)의 한국대표로 참석하며 국제업무에 매진한 그는 드디어 1998년에는 세계선급의 수장 IACS의 의장에 선출되어 세계 선급을 다스리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이어 ISO 9000 품질검사에도 합격하여 KR의 IACS 정회원자격 유지에도 기여했고 27기 후배 오공균(吳恭均) KR회장이 IACX 회장직에 오르는 길도 텄다. 또 김윤석(金允錫) 회장과 함께 천경해운의 해외취업선원 업무를 총괄했던 38대 한덕수(韓悳洙) 국무총리의 실형으로 중앙관상대 기정과 이스턴쉬핑 선장을 거친 한관수(韓管洙) 부사장은 15기 이중희(李重熙) 해무부장과 함께 필자와 해취 해기사 수급문제로 가끔 논쟁을 벌이던 기억이 새롭다.

극동해운 선장, 조선공사, 아진해운, 신한해운, 천경해운,  대양선박, BCTOC 등을 거쳐 80년대 초에 해기사협회 전무이사로 부임, 해무부장으로 해상직원 수급과 노사협의 업무를 전담하는 필자와 관련이 많았던 정진원(鄭鎭元) 선장이 생각나고 해운공사, 해양경찰, 대양상선, 성창해운 선장을 거쳐 이맹기(李孟基) 해군참모총장이 전역후 설립한 코리아라인서 15기 박태오(朴泰五) 부장 및 해군사관학교 출신 송기원(宋基元), 김갑중(金甲中), 김정화(金正和) 부장과 함께 자주 봤던 한국선무, 해외선박서 일했던 정병연(丁炳連) 전무가 기억에 남는다.
또 1990년 중반 부산 근무 시절, 14기 신석흔(辛錫昕) 선장과 15기 이윤규(李允珪) 선장이 도선사협회장을 맡아 일할 무렵 사무실을 찾아가거나 회식을 함께 할 때 부산항 도선사로 근무한 김원중(金元中)선장과 도남섭(都南燮) 선장과도 만날 때마다 친밀히 아껴줬던 생각이 난다.
 
기관과로는 대한해운공사와 일본 협성기선을 거쳐 1기 김동화 사장과 함께 라스코해운서 일한 황병도(黃昞燾) 전무가 을지로 천경해운 빌딩(?)인가 어디서 근무했던 것으로 희미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늘 자주 보며 해기사 양성문제나 수급을 논의하는 교통부나 해운항만청 회의에서 낯익은 수일상운의 이범균(李範均) 사장의 과묵한 모습도 생생하게 아롱진다. 또 해운공사, 극동해운 기관장을 거쳐 영신상운, 현익운수에서 일할 때나 한국선원대리점협회와 그리고 선박대리점협회 소속 신분으로 국적선사와 대립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허동식 신호철을 비롯한 싱글 기수가 많았던 KR에서 김재도(金在道) 상무, 정연세(鄭然世) 회장과 더불어 대전으로 사옥을 옮겨갈 때 필자가 이전행사에 참가했던 기억이 새롭지만 부산으로 옮긴 후에는 가 본 적이 없다.
 
 【6기】항해과 6기라면 먼저 필자와 띠동갑, 함경도 사투리의 실버팍호 선장, 범양전용선 방석훈(方錫勳) 해무감독이 떠오르고 해사관련 선주협회 제반 업무라면 실무담당 심부름꾼인 해무부장 필자와 제일 많이 각종 업무를 함께 하던 생각이 난다. 오일쇼크로 선박을 매달 계선지 물색을 위한 타스크 팀장 방 상무와 고현만 득량만을 헤매며 어려움을 겪던 추억, 부사장으로 퇴직후도 가끔 보면 반가웠는데 아흔도 못 채웠으니 애석하다. 해취선 브라이트해운에서 하선한 1항사, 현 선주협회 김영무(金英武) 상근부회장의 쥬니어 시절, 배재학당(?) 후배라며 필자에게 소개하여 같이 일하게 된 에피소드도 기억에 남아있다. 또 대한통운, 영풍상사, 흥아해운, 금용해운을 거쳐 삼익상선 전무로 와서 사장과 부회장에 올랐던 동원선박 김충곤(金忠坤) 사장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1970년 제7대 한국선주협회장으로 활약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위 한병기(韓丙起) 회장이 경영한 삼양항해 선장을 거쳐 조양상선의 이사와 전무직으로 선주협회 회의에 자주 참가 여러 현안문제를 논의했던 김용기(金容期) 삼익선박 전무가 가끔 생각난다. 항만요율 등 각종 협정요율을 협의하는 등 함께 일을 하면서도 해기사 출신으로 그간 한해대 16기 정도로 알았던 필자가 10년을 낮춰 봤을 정도의 홍안으로 해기사 출신답지 않게 조용히 함께 일했던 기억으로 점철된다. 그 밖 항해과 출신으로는 부산해운 조정진(趙貞鎭) 대표, 조덕곤(趙德坤) 산울림사 대표 등이 희미하게나마 뇌리를 스친다.

기관과 출신으로는 서울대 화공과 합격을 포기하고 해대를 택한, 코리아라인 시절부터 해기사 수급문제 등을 필자도 끼워 함께 논의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 박종규(朴鍾奎) 한국선무 회장이 생각나고 근황도 궁금하다. 중요 사안을 결정하는 회의시 진행 과정 기록을 맡아 주로 듣는 입장이었던 필자는 속삭이듯 논리를 펴며 조용히 결론을 유도하던 박회장으로부터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많은 것을 배웠었다. 또 6~70년대 속결 경제개발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산별노조의 기세를 꺾기 위해 산별노조를 기업별 단위노조로 약화시킬 무렵에도 노사간 임금 협정을 위한 단체협약을 두고 실랭이를 벌이던 시절 사용자측 실무책임자인 필자는 당시 방해창(方海昌) 전국선원노조위원장 및 예하 조직원들과 처절하게 격돌해야 했던 기억은 난공불락 항운노조와 함께 이젠 추억의 장에 묻혔다.
 
그리고 해운공사를 거쳐 11~12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고 필자가 귀여움도 많이 받았던 초계(草溪) 왕상은(王相殷) 회장과 함께 협성선박에 오래 몸담았고 협성마리타임을 창업하기도 했던 김병수(金炳銖)회장 역시 띠동갑 30년생으로 우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필자와 키높이가 비슷해, 그래서인지 더욱 다정하게 대해줬던 것 같다. 부산에 이어 선주협회 인천소재 해운사 점소들을 업무로 엮어 현지 불편을 덜기 위해 운영되던 인천지구협의회 의장을 오래 맡았던 범양상선 손주용(孫柱鏞) 인천지점장, 삼광 개척자 2기 서병기 사장의 바톤을 이어 23기 박남수(朴南洙) 상무와 동지상선을 경영하던 최응기(崔應璂) 사장, 강희경(姜熙景) 대한해운 상무(?)가 기억에 남는다.
 
【7기】70년대에는 해양계 대학 출신으로 외항해운업체 선주가 되어 선주협회 회원사로 등록된 회사는 4기의 두양상선 조상욱 사장과 7기 중앙상선의 김동기(金東基) 사장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무교동 효령빌딩에 사무실을 둔 김 사장 심부름이나 인천항 도선사로 일한 당시 26기 김명석(金明石) 영업부장을 보러 가끔 갔었다. 전남 광주서 태어나 전주북중을 나와 동시 합격한 서울대 정치과를 접고 해대를 택했고 모교 교수로 재직중 한국 해법과 해상법학을 정립시킨 선장 출신 배병태(裵炳泰) 박사는 학회 세미나와 발표회 및 각종 행사와 모임등에서 영어에도 뛰어난 낯익은 얼굴로 선사도 경영하고 KMI원장도 역임했는데 아흔에 가까우니 최근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소문이라 안타깝다. 그 밖에 기관과는 아진해운 조석행(趙碩行), 범양상선 부산지점장 장태묵(張泰默) 상무이사 등이 떠오른다. 
 
기관과 출신으로는 한국해대 민우홍(閔右弘) 교수와는 42일간을 망망대해에서 함께 생활한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1979년 12월, 35기들과 버마의 랑군, 인도의 캘카타, 일본의 나가사키, 대만의 키룽을 도는 한바다호 원양실습선에 오르니 일반 상선과 다른 체계로 연습선의 특성상 15기 허일(許逸) 선장, 22기 배종욱(裵鍾旭) 기관장 위에 연습감이란 최상위 직책을 민교수가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직급은 몰라도 그때 기억나는 스텝들은 항해과 28기 곽규석(郭圭錫), 박석주(朴錫柱), 기관과 문경만(文慶萬) 그리고 항해과 30기 김시화(金是和), 31기 이중우(李重雨), 32기 이태우(李太雨) 등이 생생히 기억나는데 그들은 나를 알까 말까다. 또 14대 학장을 역임한 홍영표(洪永杓) 교수가 기억에 남는데 어언 세월이 수없이 흐르고 보니 흐리기만 한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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