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남 편집위원
【8】항해과 8기 중에서는 제일 많이 만나고 업무상 또는 자상하게 대화를 자주 나눈 이재우(李再雨) 목포해양대 교수가 항상 생각난다. 학장이나 총장직엔 운이 없었지만 '영미해양문화산책', '바다와 문학', '바다와 사람', '바다와 배 그리고 사람'을 비롯하여 특히 해양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바다의 명시', '문학 속의 바다'와 '존메이스필드 해양명시선' 등 해양계 대학에서 일반대학의 영문학 교수 못지 않게 바다와 해양을 소재로 한 영미 문학에 독보적 존재였다. 필자가7~80년대 특강이나 업무로 목포해대를 방문하면 업무상 관련있는 다른 보직 교수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함께 했던 다정함을 잊을 수 없다.

해기사 양성 및 교육에 관한 저서 외에 영어와 관련된 저서로 'IMCO 영어연습'을 비롯 '항해영어', '실용 해사영어회화'와 'IMCO영어의 응용과 실제' 등이 발간되면 상경시 필자에게 전해주던 기억 생생하다. 또 서울대 상과대 출신으로 필자가 상사로 모셨던 해운공사 런던지점장을 지낸 김희석(金熙錫) 상무의 바톤을 이었고 귀국하여 범양상선을 거친, 당시 영어 능통하고 인상 좋은 해외통, 청주고 출신의 김성응(金星應) FEFC(극동운임동맹) 한국대표는 선주협회와 같이 서소문동 배재빌딩에 사무실이 같이 있어 더욱 친했고 항해과 26기 유동영(柳東永) 부장이 함께 일해 아래 윗층을 자주 오르내린 기억도 또렷하다.

호주운임동맹, ANZESC 한국대표도 겸직한 김 대표는 무엇보다 UNCTAD코드가 규정한 정기선동맹의 40% 국적선 적취문제를 해결하는 공로도 인정받고 국민훈장 석류장도 수상한 딸 다섯의 아버지였다. 구주동맹 18년을 마친 후 김대표는 미국영주권을 얻어 양국을 오가며 노후를 보낸다는 소식만 들린다. 또 1916년생으로 조선공사와 한국일보사장을 지낸 남궁련(南宮鍊) 해운공사 사장이 49년에 극동해운을 설립하여 겸임을 하던 시절 졸업후 해군장교를 거쳐 동사 신라호에 승선했던 항해과 8기 백웅기(白雄基) 선장은 모교 연습선 반도호(半島號)의 선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VLCC 2척을 컨소시엄으로 도입하여 유공해운 설립 때 주역을 맡아 상무이사(?)로 재직중일 때 필자가 업무상 자주 만났고 크지 않은 체구에 성격이 조용하여 협회내 유조선협의회 회의시에 자주 만났고 마지막에는 계열사 경진해운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얼굴이 기억나는 항해과로는 왕상은(王相殷) 회장 휘하의 협성해운에서 일할 때 알던 김성수(金聖洙) 전무이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기관학과 8기로는 한국해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후 초대 총장직을 역임한 박용(舶用) 기관학의 세계적 거성 전효중(全孝重) 박사가 우선 떠오른다. 조선공사와 서독에서 익힌 기관의 실무를 바탕으로 동경대학의 유학을 거쳐 외국 학술지와 국내 학술지에 70여편의 학술논문이 게재되는 세계적 석학으로 선박 기관학의 독보적 학문영역을 쌓은 학자로 회자됐다. 그리고 필자가 해무부장 업무를 맡아 일할 때 연습선 한바다호 후원금 전달 업무 등으로 기억되는 제16대 신민교(辛玟敎) 학장실을 방문했던 기억도 엊그제 같다는 생각이다. 봉투만 전하고 점심 대접은 못 받은 기억이 새롭고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지만 필자가 자주 언급하는 한바다 원양실습 승선의 추억은 두고 두고 추억으로 점철된다.

또 목포해대를 업무차 방문하면 반가이 맞아주던 김명호(金明鎬) 교수와 신학재(愼學宰) 교수를 잊을 수 없다 특히 신 교수는 유달호의 실습과장을 맡고 있었고 이 한 척으로는 면허취득을 위한 승선 실습의 전체 인원을 감당하기 어려워 국적선사에 분산 실습 의뢰를 해야 했고 야속하게도 선사들은 양성된 해기사를 필요시 채용은 하되 부담되는 승선 실습은 회피를 하기 때문에 이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는 대학 실습과와 필자가 죽고 살기로 피나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지금도 가슴 저미는 찡한 추억으로 회상된다. 두 교수 역시 대학에서 후학 교육을 천직으로 했던 것 같고 당시 곁에서 실습에 도움을 많이 줬던 항해과 22기 기회원(奇會元) 교수와 항해 28기로 4대 총장을 지낸 신철호(申哲浩) 교수, 실습계장 김건형(金建亨) 주임, 그리고 목포해대 모교 사랑의 전설적 열성맨, 통신과 17기 출신 총동창회 정해표(丁海杓) 사무총장의 협조와 남다른 열성이 지금도 기억에 충만하다.

또 조달청, 해운공사를거쳐 전국해원노동조합연맹 연수교육원장 시절에 알았고 나중에 한승선박을 거쳐 대영선박이란 회사의 경영에도 참여한 것으로 기억되는 김성재(金成在)전무이사는 사용자 단체의 실무책임자로 노사간의 협의나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알았었다.그리고 수산청과 수협 및 동아건설을 거쳐 KR 컨테이너부장 근무 시절 알게 된 고홍석(高洪錫) 상무도 기관과 8기 출신으로 함께 수행한 업무는 기억이 남지 않지만 당시 KR은 필자가 선박검사요율 협정(?)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면 기라성 같은 조선학회 등의 학자나 기타 이사 단체들은 인상을 제시하는 요율 원안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선주를 위한답시고 매번 필자 홀로만 분투, 미움을 받은 기억도 떠오른다.

【9기】필자는 싱글기수 중 항해나 기관이나 9기 출신들과 가장 많이 인연을 맺었던 것 같다. 우선 선주협회 출입 시절 알고 지내던 영어교사 출신의 이인구(李仁求) 차장은 필자가 조사부 신설 요원으로 스카웃 돼 합류하자 부장으로 승진하여 함께 70년대를 열심히 뛰며 일했다. 뒤에 국제해운 정수문(鄭秀文) 사장 눈에 들어 이적했으나 일찍 타계했다. 그래서 학회나 세미나 등에서 자주 뵙고 지금도 안부를 나누며 지내는 민성규(閔星奎) 한해대 교수는 당시 '해운경제학'이란 저서를 발간하여 필자가 이의 홍보와 보급에 일조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어 해기사로서 공채 고시에도 합격, 아주 드문 기록을 세워 교통부 공직에 몸담았다가 한국해대 교수로 오래 근무한 임동철(林東喆) 박사는 지금도 필자를 아껴주는 의리있는 학자로 가끔 궁금한 일이 있으면 자주 서로 통화하고 안부를 전하며 지낸다.

그리고 해운조합을 거쳐 텐트사업으로 성공한 최계순(崔桂淳) 사장은 그 뒤 오래 뵌 적이 없어 얼굴이 희미하고, 또 경복고 출신으로 해기사 자격으로 국회 입법조사국에 근무하는 것이 특이하게 생각됐던 권상하(權相河) 국장은 나중에 KMI 주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 마지막 뵀지만 듬직한 귀공자 풍채가 눈에 선하고 당시 젊은 필자더러 서공(徐公)으로 부르던 전형적 영국 신사풍의 진수를 풍기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으로 기억에 계속 남고 근황이 궁금하기만 하다. 해운항만청 선박과와 측도과의 선박직으로 근무시 처음으로 알았던 김용휘(金龍輝) 과장, 뉴코리아해운을 창업했던 김윤희(金允熙) 회장, 부산해난삼판원의 김상수(金相洙) 조사관, 그리고 해운공사를 찾으면 늘 허스키한 음성으로 친절히 맞아주며 서양풍의 얼굴이 커크 더글라스를 닮은 것으로 생각되어 지금도 모습이 생생한 황수영(黃壽永) 상무가 생각난다.

황 상무 관련 부서에는 뒤에 동호선박을 거쳐 인천항 도선사를 지낸 12기 정연직(鄭然直) 선장, 대한상선으로 옮겨간12기 최정익(崔正翼) 이사, 해무부장 후에 부산지점을 맡았던 13기 현정춘(玄正春) 지점장, 두양상선으로 옮겨간 14기 노하석(盧夏錫) 이사, KPI 산파를 맡았던 20기 윤민현(尹珉鉉) 전무, 진급이 빨랐던 22기 이원행(李原行) 이사 등이 막강 해공에 포진해 있어 업무차 자주 회동했고 특히 타코마 조선소로 옮겨 간 기관과 22기 정학구(鄭鶴九) 과장은 경남고 출신으로 특히 필자와 술친구로도 오래 친했던 현 상무와 같이 선박 보험 멘토 항해 20기 윤민현과 함께 늘 한 조직처럼 일했던 기억이 눈앞에 아직도 선하다.

그리고 학계에서는 필자가 해무담당으로 수행 업무상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목포해대 4년제승격 후 1995년 초대 총장에 선출된 오정철(吳正喆) 교수와 1985년부터 한국해대 제17대 학장을 역임한 양시권(梁時權) 교수 등 해운한국의 해기 인재 양성의 양대산맥에 자리매김 했던 두 대들보 교수를 잊을 수가 없다. 또 항계내업 요율을 조정하기 위해 부산에 가면 12기 기관과 삼호선박 이헌탁(李憲逴) 사장과 같이 대포 한잔도 함께 했던 삼성항업의 김동광(金東光) 사장과 해운공사, 고려해운, 삼양선박을 거쳐 용마선박을 창업했던 한재희(韓在熙) 회장도 업종이 달라 자주 상면 기회는 없어도 얼굴은 기억난다.

기관과 출신으로는 70년대 중반쯤에 조양상선에 근무하는 낯익은 이름이 있어 직접 찾아가 확인을 한 결과 동명이인은 아니고, 필자가 태어난 고향 경북 선산 소재 선산중학교를 다닐 때 영어를 가르친 바로 그 고재일(高在日) 영어교사가 조양상선 전무이사로 재직중이라 너무나 놀라웠던 기억이 새롭다. 그밖에 옛 양재원(梁在元) 사장과 함께 동서해운을 운영하다 현재도 동신선박의 명예회장으로 출근을 하며 며칠 전에도 필자와 만난 이대우(李大雨) 회장의 구수한 입담은 예나 다름 없다. 그리고 한국전력과 라스코쉬핑 기관장 및 대한유조선을 거쳐 호남탱카에 근무하던 최석주(崔錫柱) 부사장, 호남탱카와 대양선박을 거쳐 범양상선 포항지점장을 지낸 정대길(鄭大吉) 이사도 기억에 남는다.

학계에서는 모교 18대 학장을 역임한 하주식(河注植) 교수와 목포해대 제4대 학장을 지낸 조창희(趙彰熙)교수가 생각난다. 특히 조 학장은 실습문제 등으로 밀접한 업무관계가 있기 때문이긴 했지만 시골 농부같이 소탈한 대학교수로 누구에게나 격의없이 대해주며 함께 현안 문제를 함께 해결했고 잊을 수 없는 별도의 추억들이 너무나 많아 작고 전 투병중일 때 통화가 마지막이 되고 말아 더욱 안타깝다. 면허 취득에 절대 필요 불가결한 재학생들의 승선실습 협조에 감사하는 보답으로 목포 산 낙지를 공수하여 선주협회 회의실에서 각사 해무담당들을 불러 풋 고추에 된장 찍어 병소주를 사다 낙지파티를 하던 기억은 이름하여 너무나 훈훈한 산학협동의 표상으로 여겨져 목포해대라면 늘 낙지파티가 지금도 회자되는 추억이다.

게다가 한번은 출장차내려가 목포밤바다 야경을 보러 갔다가 취중에 유람선상에서 머리를 크게 다쳐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여의사인 조학장 부인에게 직접 응급치료를 받은 기억은 필자의영원한 추억으로 반추된다. 마지막으로 기관학과 9기 졸업생으로 삼양선박 사장으로 있다가 한국해대 출신으로는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금배지를 달았던 대구 계성고를 나온김진기(金進基) 의원이 해기사의 최초 국회 진출이란 기록을 세워 화제였고 이어 부산 직선에선 낙선했지만 김의원은정창물산도 창업했던 것으로 기억되며 목포해대 전신 목포해양고 출신의 김옥두(金玉斗) 의원도 뒤를 이어 해양계 대학 출신으로서는 첫 국회 진출로 해운업계의 관심을 모았었다.

【10기】우선 수차 전술한 교육과 실습관련 및 양성 해기사의 선사별 배정 업무와 해외취업 인력 정책 수립 등으로 항해과 10기로는 당시 실습과장직을 맡았던 민병언(閔炳彦) 교수가 제일 많이 생각난다. 실무 연락 책임자 이은영(李殷永) 주사를 필자와의 연락병 내지는 메신저로 두고 당시 열악한 해기사 양성 교육 환경이나 국적선사 수급과 해외취업의 균형 등 해기사 정책 전반에 걸쳐 현안문제가 쌓여도 소리 소문 없이 거친 보직에 걸맞잖게 조용히 업무를 처리하던 민 교수와 함께 한 숱한 세월이 손에 잡힐 듯 한데 손꼽아 보니 어언 40년은 족히 흐른 것 같고 뜻밖의 사고로 타계했단 소식을 접했던 기억은 나중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필자의 승선 첫 경험, 한바다호와 함께 필자의 눈시울을 오래 적신다.

그리고 선주협회 회원 선사에서는 자주 머리 맞대고 일했고 2차 오일쇼크때 계선지를 찾아 현지 출장으로남서해안 일대를 뒤지고 누볐던 범양상선의 부산고 출신 윤희대(尹熙大) 이사가 선장직을 마친 뒤 육근을시작한 경남상고를 나온 13기 이윤우(李潤雨) 선장출신 부장과 함게 동행했던 일은 숱한 에피소드와 함께지금도 가끔 그 시절 추억을 반추하며 이 부사장과 술잔을 기울이며 되내이고 파안대소한다. 윤 이사가 성이 같고 얼굴도 닮았으니 필자에게 당시 유명배우 윤일봉(尹一峯)의 아우라고 해서 깜빡 속았던 기억도 난다. 또 정준섭(鄭準燮) 사장과 북창동 합동해운에 근무하다가 아세아상선 설립시에 합류, 현대상선 전무이사를 지낸 이승우(李承雨) 선장은 50년 전부터 함께 한 일도 많은데 요즘 병상에서 고생한다니 오로지 안타깝기만 할 따름이다.

또 교통부, 극동해운, 조양상선, 태영상선을 거쳐 여수소장을 지낸전주 신흥고를 나온 호남탱카의 황부영(黃富英) 상무는 필자가 주재하는 회의때마다 선의의 태클(?) 걸었던 기억이 오래 남고 대구 계성고를 나와 교통부, 쌍용해운을 거쳐 합리화로 묶은 두양상선 사장을 지내고 현일해운 대표를 맡았던 김봉운(金鳳雲) 사장, 그리고 (주) 하남의 홍광희(洪桄喜)전무이사, 경주고를 나와 극동선박, 조선공사를 거친 천일해운 정연통(鄭淵通) 사장은 부장시절에 만났었고, 포항해운국, 라스코 선장을 거쳐 부산 근무시절 만났던 양진학(梁鎭學) 도선사, 신한해운, KR 정부대행소장 등을 역임한 한창훈(韓昌勳) 부산지점장이 생생히 기억나고 한국해대 윤점동(尹點東)교수와 목포해대 제3대 학장을 역임한 최영석(崔泳錫) 교수, 그리고 언론사 체육분야 유명인사 서울신문 체육부 고두현(高斗鉉) 국장도 기억에 남는다.

10기 기관과로는 우선 목포해양대학교가 전문대학으로 승격 후 제2대 학장에 취임한 1980년부터 필자와 한 조직의 일원처럼 서울과 목포를 자주 오가며 함께 일을 했던 임정배(任正培)학장이 그립고 보고싶다.나지막한 체구에 전라도 사투리가 잘 어울리는 임학장은 9기 조학장에 앞서 선주협회 회원 선사와의 실습보은의 인연, '낙지 학장'의 원조였고 기회 있을 때마다 동향의 소치(小痴) 허련(許鍊) 화백의 복사판 그림을 자주 선물로 들고 와서 졸업생들의 실습이나 취업을 독려하던 모습이 너무나 눈에 선하고 무척 생각난다.한편 고려해운 전무를 거쳐 KCTC 대표를 맡았던 이승은(李承垠) 사장, 대한해운공사에 승선후 흥국상사와동서해운을 거쳐 KR 해양설비부에서 일한 이성호(李成浩) 상무이사도 살아 생전엔 가까웠던 것 같다. 한편 교통부 해운국 산하 부산, 목포, 마산을 거친 해운항만청의 선박직 붙박이 임완수(林完洙) 선박과장 및 측도 과장과는 짝퉁 해기사 필자와 선박의 기술 분야 행정을 함께 했던 일과 온순한 성격 기억도 또렷하다.

태영상선과 한진해운 울산사무소장을 거쳐 한진중공업으로 옮겼던 갈종수(葛鐘洙) 전무이사나 고려해운을거쳐 삼익상선 및 고려기공을 경영했던 한병진(韓秉進) 대표도 해운불황이 극심했던 시절 배를 달아매려해안일대를 다니며 계선지 헌팅을 함께 다녔던 기억이 새롭고 장흥 녹동항에서 출장길에 즐긴 큰 새우 맛은 지금도 입맛을 감치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경동고교 출신으로 극동해운을거쳐 제일항역을 창업하고 범한항공에도 재직한 항공화물주선업협회 박광현(朴光鉉) 회장도 얼굴이 떠오른다. 또 필자가 출입기자 시절, 추억이 너무나 많은 관세청의 부산세관 오순희(吳淳熙) 세관장이 4기 송병순(宋秉循) 관세청장에 이어 당시 관세청의 고위직 간부였다. 마지막 한때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박영복(朴永復) 기관과 10기는 이름만 듣고 얼굴은 모르는 화제의 인물로만 기억하고 있다.

끝으로, 싱글 기수라면 9기까지로 끝내야할 것 같긴 하지만 필자 뇌리에 떠오르는기억 중에는 아마 36기정도까지는 생각나는 인물이 상당히 많아 이를 중간에서 그냥 끝내기가 아쉬운 마음 추스리고 달래며 우선 이번 기회에는 10기를 추가하여 옛 추억으로 만나보고 싶었던 욕심을 솔직히 밝힌다. 아울러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앞서 도입 부분에서 전술했듯이 50여년간을 취재로, 업무로, 친목으로 두루 만났고 그 인연 하나 하나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이 나이에도 바둥댄다. 그래서 필자는 메마른 우리의 가슴에도 시심과 뮤즈의 밀알을 심어 시상(詩想)의 화단을 가꾸고 지금까지 죽은 자의 무덤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해운계의 낭만파들을 불러 모아 로망의 소낙비를 흠뿍 맞으며 해운계 우리 모두가 아직은 살아있는 최후의 낭만주의자가 되어 영원한 '최후의 로맨티시스트'로 남고 싶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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