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상판결: 대법원 2020. 7. 9 선고 2017다56455 판결

2. 사실관계

가. 원고 주식회사 H(이하 '원고 H'라고 한다) 소유의 이 사건 선박이 2010. 4. 21. 침몰한 후 여수해양경찰서장은 2010. 8. 24. 구 해상교통안전법(2011. 6. 15. 법률 제10801호로 전부 개정되기 전의 것)에 따라 이 사건 선박에 대한 구난명령을 하였고, 여수시장은 2014. 4. 3. 구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2015. 2. 3. 법률 제13186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에 따라 이 사건 선박에 대한 제거명령을 하였으나, 그 후 수년간 그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정대집행이나 그 이행을 강제하기 위한 행정관청의 조치도 없었다.

나. 해양사고 조사기관들이 이 사건 사고 현장을 조사한 각 보고서에서 아래와 같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1) 이 사건 선박은 수심 90미터의 해저 모래에 파묻힌 상태로 침몰되어 있고 이 사건 선박이 침몰한 수심으로부터 여유 수심이 최소 50미터 이상 남아 있으므로 다른 선박의 항행 안전에 위험을 줄 우려가 없다. (2) 이 사건 선박의 침몰 이후 선박으로부터의 유류나 아스팔트 화물의 누출 흔적이 없고, 해저의 온도를 고려할 때 연료유와 아스팔트는 선체 내에 점성화 또는 고형화되어 안정적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이며, 디젤유는 침몰 직후 해수 등에 흩어지고 증발하여 현재 남아있지 않을 것으로 보이므로 오염물의 유출 등으로 인한 환경오염을 발생시킬 우려도 없다. (3) 이처럼 장기간 해저에 파묻혀 있는 선박을 인양할 경우 상당한 부하가 가해지게 되어 선체가 부서질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내부에 안정적으로 고착되어 있던 유류나 아스팔트가 해저에 비산되어 추가 오염을 일으킬 수 있다. (4) 이 사건 선박이 침몰한 지점의 해류가 거세고 가시성이 매우 떨어지며 깊은 수심에서의 인양 작업에는 고도화된 잠수기법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선박의 인양을 시도할 경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박이 부서질 위험이 있는 등 이 사건 선박을 인양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반면, 이 사건 선박 침몰 지점과 유사한 깊이의 해저에서 실제로 선박이 인양된 사례도 거의 없어 인양에 필요한 비용이나 위험의 정도가 상당히 높지만 이를 실제로 산정하는 것도 사실상 쉽지 않다.

다. 원고 H는 원심 변론종결 시점까지 이 사건 선박을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라. 원고는 이 사건 사고로 침몰한 이 사건 선박에 대한 구난명령 및 제거명령을 받음으로써 이 사건 선박을 인양할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고, 이로써 인양 비용 상당의 손해를 입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원고는 이 사건 사고 이후 현재까지 선박 인양을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를 인양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므로, 손해가 현실화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3. 판결요지

불법행위를 이유로 배상하여야 할 손해는 현실로 입은 확실한 손해에 한하므로, 가해자가 행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피해자가 제3자에 대하여 채무를 부담하게 된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그 채무액 상당의 손해배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채무의 부담이 현실적∙확정적이어서 실제로 변제하여야 할 성질의 것이어야 하고, 현실적으로 손해가 발생하였는지 여부는 사회통념에 비추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1992. 11. 27. 선고 92다29948 판결 및 대법원 2019. 8. 14. 선고 2016다217833 판결 등 참조).

가해자가 행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피해자에게 어떤 행정처분이 부과되고 확정되었다면 그 행정처분에 중대하고 명백한 하자가 있어 무효로 되지 아니한 이상 행정처분의 당사자인 피해자는 이를 이행할 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따라서 행정처분의 이행에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행정처분 당시에 그 비용 상당의 손해가 현실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행정처분이 있은 이후 행정처분을 이행하기 어려운 장애사유가 있어 오랫동안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해당 행정관청에서도 이러한 사정을 참작하여 그 이행을 강제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불이행된 상태를 방치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손해가 현실화되었다고 인정하는 데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경우에 행정처분의 이행에 따른 비용 상당의 손해가 현실적∙확정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보기 위해서는 행정처분 당시의 자료와 사실심 변론종결 시점까지 제출된 모든 자료를 종합하여 행정처분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행정처분의 이행가능성과 이행필요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특히 당사자에게 부과된 행정처분을 이행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매우 어렵고,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막대한 비용이 예상되어 실현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며, 행정처분 발령 당시와 달리 사실심 변론종결 시점에는 그 행정처분의 이행을 강행하여야 할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등의 예외적인 상황이 존재하고, 실제로 행정관청에서 장기간 행정처분이 불이행되고 있음에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부과된 행정처분이 취소나 철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경우라면, 행정처분을 받은 당사자가 가까운 장래에 그 행정처분을 이행할 개연성을 인정하기 부족하여 이행에 따른 비용 상당의 손해가 확정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4. 평석

가. 불법행위를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그 손해가 현실적으로 발생한 확실한 손해여야 한다. 원고는 이 사건 사고로 침몰한 이 사건 선박에 대한 구난명령 및 제거명령을 받음으로써 이 사건 선박을 인양할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고, 원고의 지속적인 철회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선박에 대한 구난명령 및 제거명령은 철회되지 아니하고 여전히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그 손해는 현실적인 손해라고 주장하였다.

나. 위와 같은 원고 주장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고에게 내려진 구난명령 및 제거명령이 어떠한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여부가 검토될 필요가 있는바, 1심 판결은 위 행정명령을 무효라고 보았고, 따라서 행정명령에 따른 원고의 제거의무가 없어져서 더 이상 이를 제거를 할 필요가 없으므로 제거비용은 현실적으로 발생한 손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 부분 원고 청구를 기각하였다.

다. 그러나 원심 판결은 제반 사정을 고려해 본다 하더라도, 그리고 원고의 지속적인 철회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선박에 대한 구난명령 및 제거명령이 여전히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위 행정명령이 당연무효라고 보기 어렵고, 그렇다면 원고는 이 사건 사고로 인하여 발령받은 위 행정명령에 따라 이 사건 선박을 제거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고, 이로써 그에 필요한 비용 상당의 손해가 현실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라. 1심과 원심은 위와 같이 행정명령의 당연무효 여부를 손해의 현실화 여부와 바로 연결하여 판단하였다. 그러나 대상 판결은 원심과 같이 행정명령이 당연무효가 아니어서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면서도 결론적으로는 1심 판결과 같이 손해의 현실성을 부정하였다. 대상판결은 행정처분이 당연무효인지 여부에 따라 일률적으로 손해의 현실성 여부가 좌우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예외를 인정하였다.

마. 행정처분이 그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한 하자가 있어 무효로 되지 않는다면 그 효력에 의해 당사자는 법적 의무를 부담하게 되고, 따라서 그 의무의 이행에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비용 상당의 손해가 현실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행정처분이 있은 이후 행정처분을 이행하기 어려운 장애사유가 있어 오랫동안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해당 행정관청에서도 이를 참작하여 이행을 강제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불이행된 상태를 방치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그 손해가 현실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 대상판결은 원칙을 선언하면서도 구체적 타당성을 기한 판결로서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김 현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해양수산부 고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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