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耕海 김종길] 세한도, 세계문화유산으로

2014-07-26     쉬핑뉴스넷

 
친구들 다섯이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충남 예산군 신암면으로 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를 뵙기 위해서였다.

추사 생가에 도착했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지은 53칸의 사대부 대갓집은 불탔고 그 일부가 지방문화재로 복원됐다. 솟을대문을 지나 ㄱ자 사랑채를 돌아가면 ㄷ자 본채가 있다.  아담한 건물에 추사체의 현판들이 여기저기 걸려있고 인자한 영정도 모셔져 추사의 향기가 그윽했다. 해시계로 쓰였다는 돌기둥에 쓰인 ‘石年’이 유일한 추사체 진품이란다.

생가 바로 옆, 너른 잔디밭에 모셔진 추사 묘 앞에 친구들 다섯이 나란히 섰다. 무더운 날씨라 잔디밭이 후끈거려 무릎을 꿀 수 없었다. 선채로 고개 숙여 ‘선생님! 흠모합니다’라며 참배했다. 생전의 추사를 배알하는 마음으로 잔디밭을 건너 추사기념관으로 갔다. 국보 180호의 세한도(歲寒圖)가 눈에 들어왔다. 진본은 아니지만 숙연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집 한 채에 노송(老松) 한 그루와 잣나무 세 그루가 그려진 간결한 수묵화다.

직업화가의 허식된 화법과는 달리 극히 절제된 구도다. 노송이 허리가 꾸부러져 옆으로 뻗어나 구름처럼 허공에 떠있다. 차라리 구름이면 창공으로 유유히 흘러가련만! 오고가도 못하는 고독한 귀양살이를 은유했음일까. 허나, 제주 귀양살이 8년에 추사체가 완결됐고 문인화의 최고 정수 세한도를 남겼다. 고진감래랄까! 형설지공이랄까!

세한도에 발문(跋文)이 첨부돼있다. 제자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다. 천만리 먼 곳에서 가져온 귀한 서책을 세도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건너 제주로 연년이 보내준 고마움을 절절히 표했다. 이상적의 의리를 ‘날이 차가워져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말씀으로 비유했다. ‘아! 쓸쓸한 마음이여!’로 끝마무리해 세한도를 이상적에게 보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고는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넘치는 칭찬에 부끄러워했다. 도도히 흐르는 세파에 권세와 이익에 어찌 초연할 수 있었겠느냐고 고백했다. 사제지간의 신뢰와 연민의정이 아름답다. 역관 이상적은 세한도를 연경으로 모셔가 명사 16명의 찬시(讚詩)를 받았다. 오래전 아버지 김녹경이 동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추사가 수행했었다. 25세의 약관이 78세의 노학자 옹방강과 필담을 나누어 추사의 재능이 이미 연경에 널리 알려졌다.

세한도가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의 당대 명사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의 발문도 첨부됐다. 한국과 중국의 정신과 철학이 담겨진 서화(書畵) 세한도가 1914년에 두루마리로 표구됐다. 그 길이가 무려 14미터에 이른다. 경성제대 교수 후지즈카가 1944년 세한도를 모시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세한도를 돌려받은 일화를 들은 지 2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자네가 어떻게 일본에 왔는가?”란 후지즈카의 물음에 “선생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라고 소전이 답하곤 매일 아침문안을 계속했다.

1주일이 되는 날에 “자네가 세한도 때문에 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건 안 되네” 소전은 “예”라고만 답하고 문안인사를 계속했다.

2주되는 날 “내 생명처럼 소중하게 애장하는 걸 어찌 자네에게 줄 수 있겠는가” “예”라 답하고 세한도는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3주가 되는 날 “내 생전엔 애장하다가 내가 죽은 후에 아들에게 자네한테 돌려주라고 유언을 함세” “예”라 답하고 문안은 계속됐다.

4주가 되는 날, 소전의 끈질긴 문안인사를 후지즈카가 감당할 수 없었던지 “모셔가게”라며 돌려주어 소전이 받들어 모시고 귀국했다. 하늘과 땅도 환호하였으리라. 민족유산 보존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소전의 바위 같은 의지가 후지즈카의 철석같은 집념을 꺾었다.

후지즈카가 일본으로 모셔가지 않았다면 세한도가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직후 혼란기와 6‧25전쟁에 살아남았을까. 천만다행이고 감사할 뿐이다.

제주에서 서울로, 서울서 북경으로, 북경에서 서울로, 서울서 동경으로, 다시 동경에서 서울로 동양3국을 돌고 돌아왔다. 세한도는 대한민국만의 국보가 아니다. 한중일의 예술혼이 숨 쉬는 동양 3국의 국보다.

손창근이 진본을 소장하고 있단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존경하는 손창근 선생님!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까지 세한도를 성심을 다해 간수해 주십시오. 세한도가 인류문화유산의 반열에 올라 세세영원토록 보존되게 말입니다』라고 내 마음에 한자 한자씩 써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