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오징어는 '살아있는 로켓' , 오줌·돼지털도 당당한 수출 일꾼,

64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고 2011년 수출 5000억 달러를 돌파하는 동시에 전 세계 9개국만 달성한 1조 달러 클럽에 진입했다.
성장 속도도 빨랐다. 1억 달러에서 1조 달러 달성까지 23년이 걸려 중국(16년)과 미국(20년)에 이어 한국은 셋째로 짧은 기간 만에 쾌거를 이뤘다. 50여 년간 우리 수출이 연평균 19.2%의 속도로 쾌속 질주한 덕이다.
빠른 성장속도만큼이나 수출 품목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전후 50년대 수출 품목과 2013년의 수출 품목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50년대는 광물이 주력 수출품이었다. 중석, 흑연, 철광 등을 주로 미국에 수출했다.
우리 정부는 52년 ‘한·미 중석협정’을 맺고 2년에 걸쳐 1만5000톤을 미국에 수출하면서 외화벌이를 시작했다. 60년대 효자 수출품은 마른 오징어였다. 내다 팔 것이 마땅치 않았던 당시에 동해안에 넘쳐나는 오징어가 주력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판로는 주로 홍콩이었다.
당시 수출 현장에선 “하늘이 한국을 도우려고 오징어를 내려보냈다”거나 ‘살아있는 로켓’이라는 찬사까지 나왔다. 그러나 오징어잡이가 7~11월에 집중돼 수출량이 널뛰기를 한 데다 어획량에 따라 수출단가가 요동치는 이중고를 겪었다.
당시에는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가져다 팔았다. 돼지털, 쥐 털, 다람쥐, 갯지렁이나 뱀, 메뚜기도 수출했다. 실제로 61년 10대 수출 품목 10위에 ‘돈모(돼지털)’가 올라올 정도였다. 강원도의 자작나무들은 고급 이쑤시개로 만들어 미국에 팔았고 은행잎도 독일의 제약회사로 팔려나갔다.
60년대 수출 품목 개발을 고심하던 한국은 가발산업에 뛰어들었다. 심한 곱슬머리로 손질이 어려운 미국 흑인 여성들의 가발 수요가 많았고 영화산업이 번창한 할리우드에서도 가발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엿장수들이 손수레를 끌고 전국의 여성들 머리카락을 수집해오면 여공들이 한 땀 한 땀 부지런히 가발을 만들었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64년 1만4000여 개의 가발이 수출됐고, 합성섬유로 만든 인조가발까지 등장하면서 70년에는 수출액이 9000만 달러에 달해 전체 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 시장인 미국에서 가발 유행이 사라지면서 75년에는 10대 수출상품 목록에서 사라졌다.
합판 역시 60년대를 거쳐 70년대 중반까지 수출을 이끌어온 상품이다. 57년 주한유엔군에 납품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합판의 외화벌이는 61년부터 본격적인 수출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늘어났다. 68년에는 수출액이 6800만 달러로 총수출의 10%가 넘었고, 인도네시아와의 수교로 싼값의 원목이 풍부하게 확보되면서부터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76년에는 3억5900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한국이 실질적인 무역국가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된 70년대 이후의 일이다. 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고 이듬해에는 한국 최초의 자동차인 포니 5대를 에콰도르에 수출했다. 특히 100억 달러는 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전 세계적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달성한 것으로 ‘한강의 기적’이란 말은 이때 나온다.
공산 가공품이 주력 수출품으로 자리바꿈하던 70년대에도 주력 원자재 수출품이 있었다. 바로 오줌이다. 신발과 섬유, 전자산업 등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고 중화학공업이 시작된 시기에도 오줌은 가치 있는 상품이었다. “한 방울이라도 통 속에!”를 외치며 학교와 예비군 훈련장, 버스터미널 등 공중화장실마다 흰색 플라스틱 오줌통이 줄을 섰다.
오줌 속에 들어있는 우로키나아제가 뇌졸중 치료제를 만드는 주원료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당시 우로키나아제는 1㎏에 2000달러. 국민 모두가 십시일반 해 화학처리를 한 뒤 일본에 수출했다. 오줌으로 벌어들인 돈만 73년에는 50만 달러, 74년에는 150만 달러에 달했다.
80년대는 전자제품이 수출 주도권을 쥐었다. 정부의 전자공단 설립 등 집중적인 지원으로 급성장한 전자제품 수출은 80년대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컬러TV 반덤핑 제소 등 선진국의 끊임없는 수입규제를 견뎌내며 성장한 전자제품은 88년에 163억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리며 최대의 수출 품목으로 올라섰다.
95년 수출 1000억 달러를 기록할 당시에는 반도체가 177억 달러로 전체 수출품목의 14.1%를 차지했다. 자동차와 선박해양구조물, 인조장섬유직물 등이 뒤를 이었다. 최근 몇 년간 주목받은 수출 품목은 드라마와 음악 등 한국 문화상품이다. 라면이나 초코파이 등 가공식품과, BB크림으로 대표되는 화장품 등 소비재 수출도 활성화되고 있다.
올해 수출 규모는 5600억 달러 내외로 예측되고 무역도 1조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5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올해 무역 1조 달러 돌파 시점이 6일이나 7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무역 규모는 2011년 1조796억 달러였던 것이 지난해 1조675억 달러, 올해는 1조780억 달러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출 품목의 다양화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현재 국내 수출품은 선박, 석유제품, 반도체, LCD, 자동차, 휴대전화 등 주력 품목이 6개이고 이를 포함한 상위 10대 품목이 우리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초과한다. 산업의 부침에 따라 수출이 크게 영향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식품, 유아용품, 화장품, 헬스케어, 보안기기 등 제조업은 물론 서비스 수출 등 상품 다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주요 상품의 최초 수출
자동차 : 1976년 7월 에콰도르에 포니 자동차 5대 수출
신발 : 1962년 국제상사, 동신화학공업주식회사가 미국, 캐나다 등에 23만8000달러 규모 수출
가발 : 1964년 1만4000달러가량의 가발을 수출
선박 : 1967년 대한조선공사와 대선조선이 바지선 30척을 베트남에 수출
섬유 : 1959년 혜양섬유 전신인 동광 메리야스공장이 미국에 스웨터 300장을 선적
석유화학 : 1966년 대한석유공사가 2000 배럴 수출
휴대전화 : 1992년 국내 최초 자체개발 휴대전화인 삼성전자 애니콜 SC2000 등 6억 달러 규모 수출

[약력]
・고려대 상학과 졸
・한국은행
・재무부 외환국 근무
・충남대, 목원대 강사
・삼미해운 상무이사
・전 KMI 동향분석실장(연구위원)
・전 중앙일보 디지털 국회의원
※ 본 원고 내용은 본지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