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가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해도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임종과정으로 보아 일정 요건을 갖추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했다. 연명의료란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수혈 등 치료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 연장하는 치료방법이다. 한국에서 존엄사 및 안락사 법제화 논의를 하면서 연명의료결정법의 제정은 중대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이 법만으로는 아직 미흡하다.
암 등 불치병 환자 또는 사고로 인한 식물인간 및 뇌사 환자에 대하여 본인이나 가족이 원하면 더 이상의 불필요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품위를 잃지 않고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연명의료결정법은 사망에 임박한 상태인 ‘임종과정’을 연명치료 중단의 전제 요건으로 하고 있어서 지나치게 엄격하다. 의사들은 환자가 ‘사망에 임박’했다는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고, 환자들은 불필요한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이미 작성했는데도 불구하고 ‘임종과정’이란 의사의 판단이 없으면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고통스런 말기 연명치료를 견뎌야 한다.
2004년 ‘보라매병원 사건’에서 소생가능성 없는 환자를 환자의 가족의 요구에 의해 의사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퇴원시켰다. 대법원은 의사를 살인죄 방조범으로 처벌했고, 이후 의사들은 환자의 존엄사 실행을 돕는 것이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환자의 요구에 따라 연명치료를 중단할 경우 의사에게는 형법상 촉탁살인죄 또는 승낙살인죄가 적용되고 가족의 요구에 의해 중단할 경우 살인죄가 적용될 수 있다. 그 결과 의사들은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을 위한 최선의 조언을 하기 보다는 무책임하게 고통스런 연명치료를 강행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김 할머니 사건’에서는 식물인간이 된 김 할머니의 가족들이 인공호흡기 등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2009년 대법원에서 승소함으로써 최초의 존엄사 판결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의사들이 환자에게 존엄사 결정을 권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부모님이나 가까운 가족을 오랜 병환으로 떠나 보낸 지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얘기를 한다. 환자가 요양병원이나 병원에서 회생가능성이 없고 식사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병원에서는 ‘콧줄’이라는 비위관(코에서 위를 연결하는 관)을 통해 영양과 수분을 공급해도 되는지 묻는데 가족 입장에서는 이를 거절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했던 지인들은 모두 그 선택을 후회한다. 가족과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한 채 그러한 ‘콧줄’을 끼운 채 영양분만 공급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몸이 상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망선고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현행법에서는 사망에 임박한 상태가 아닌 경우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행위와 영양분·수분 공급, 산소 공급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불합리한 규제로 인해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은 가망 없는 기다림에 지쳐가다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견디다 못해 스위스 디그니타스 라는 기관에 사전 등록하여, 불치의 병으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스위스에 날아가 의사의 입회 하에 자신의 의지로 삶을 품위 있게 마치고자 하는 한국인들도 늘고 있다. 왜 스위스까지 먼 길을 가야 하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생각만 바꾸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한국사회는 양적 성장의 시기를 지나 질적 성장을 지향하고 있다. 국가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도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진지 오래이며, 현재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는 욜로(You Only Live Once!) 트렌드 또한 그러한 맥락이다. 한국 사회가 고령화되면서 적극적 안락사 논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현실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어떻게 사는지를 중시하는 시대에 어떻게 이 삶을 마무리 하느냐 만큼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 이제 우리도 사람답게 사는 나라를 넘어서서 존엄사 즉 사람의 품위를 지키며 죽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본인이나 가족의 진지한 요청이 있다면 의료인과 법조인 등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의사가 신중하게 소정의 절차에 의해 안락사를 도울 수 있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비합리적인 보라매병원 판례는 변경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