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평생 외길 70년을 해운과 함께,
우리의 큰 별 默庵선생 추모의 斷想

묵암 박현규 이사장과 필자 / 2014.10.7 박현규 이사장과 KCTC신태범 회장의 귀엣말.2020.1.6 해양수산가족 신년회(서대남.강무현 前장관.문성혁 장관.박현규 이사장.신태범 회장)
묵암 박현규 이사장과 필자 / 2014.10.7 박현규 이사장과 KCTC신태범 회장의 귀엣말.2020.1.6 해양수산가족 신년회(서대남.강무현 前장관.문성혁 장관.박현규 이사장.신태범 회장)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 묵암(默庵) 박현규(朴鉉奎) 박사 향년 99세를 일기로 별세" 

근간 서울대 병원에 입원 가료중이란 소식은 전해 들었으나 당대 한국해운계의 거목이요 구원의 성좌같이 후배들의 큰 스승이시던 박 이사장님의 부음은 해양계에 종사하는 모든 후배들, 특히 60년 세월을 우르러며 자주 뵙고 따르던 필자에게는 너무나 큰 비보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해운계의 북극성 같이 큰 별이 갑자기 떨어지자 가슴을 저미는 슬픔에 북바쳐 퇴역한 해운계 원로를 비롯한 업계 후배들이나 종사자들은 너무나 가슴을 에는 충격으로 오로지 두손 모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달래는 안타까운 심정뿐이다.

수십년간 해사문제연구소를 별 용무없이도 자주 드나들었다. 우선 사무실에 들어서면 강영민전무와 원경주,  김해두, 이인애 상무를 향해 "저 왔습니다!"하고는 집무실에 이사장님이 계시는지가 확인되면 큰 소리로 "이사장님!  육군하사 서하사 용무없이 또 들렀습니다" 하며 간혹 외부 손님과 환담 중이어도 필자는 오래 전부터 뵐 때마다  "충성!" 하며 군대식 거수경례로 인사를 올리는 어릿광을 부려왔다. 수년 전  개봉 영화 '인천상륙작전'서 맥아더 장군역을  연기한 '리암 니슨(Liam Neeson)' 모습으로 한국 해운업계의 노장군, (재)한국해사문제연구소 박현규(朴鉉奎) 이사장은 육군 하사 출신 필자에게 해운계 총사령관답게 멋진 거수경례로 답하신다. 을지로 소재 천경해운 보슬빌딩 7층 때부터 지금의  당주동 세종빌딩 10층 사무실을 찾아 뵐 때나 대규모 행사장 같은 귀빈 좌석에 계실 때도 언제나 해 오던 필자의 어릿광과 개구장이성 애교 인사였다.

해운 및 물류 해양관련 각종 행사장에 가면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이라 이같은 경례모습에 모두가 오프닝 세리머니 삼아  웃음을 터뜨리게 마련이다. 그리고는 "박 이사장님, 오늘 경호는 제가 국가원수급 경호 기준에 따라 1급 최근접 경호로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로 농담을 걸어도 이를 재롱으로 넘기고 웃으시며 격의 없이 매번 거수경례로 답례하는 어른이었다. 1960년대 후반 김현옥(金玄鈺)시장 시절의 서울시청, 이택규(李宅珪)청장이 문을 연 관세청을 거쳐 김신(金信) 장관과 이재철(李在澈) 차관이 이끌던 교통부를 출입하던 시절이다. 육운이나 항공, 철도, 관광 분야는 차치하고 필자는 당시 해운계를 집중적으로 올인하며 발빠르게 취재할 때다. 필자가 20대 후반 언젠가 해운업계 모임에서 당시 경영진과 중견  간부직으로 활약하던 박현규, 이학철(李學哲), 신태범(愼泰範) 등 고려해운 관련 선배님들을 처음 만났으니 아득히 어언 60년 전의 일이다.

특히 해양과 관련된 각종 대규모 행사 때마다 필자는 미리 입구에서 수행자 없이 어르신께서 행사장에 드시는 날엔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행사 진행 요원에 앞서 좌석으로 안내하고 "이사장님, 오늘도 제가 국가원수급에 준하는 1급 근접 경호를 서겠습니다" 해양업계 여러 업무 분야와 행사에서 마당쇠로 여러 윗 어른을 모셨지만 직속으로 급여를 받는 소속원이 아니면서유독 묵암은 필자가 60년을 한결같이 따른 셈이다. 외부 행사장이나 사무실에서 외투를 받아 걸거나 일행 또는 직원들과 함께 자주 식사도  같이 하다 보니 늘 직속으로 녹을 받는 부하가 된 것처럼 서스럼없이 사랑받는 교분이 형성된 것이었다. 

해사문제연구소는 동경고등상선학교 기관과를 졸업하고 한국해양대학교 학장을 거쳐 한국선주협회(현 해운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후 1971년 재단법인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삼주(三洲) 윤상송(尹常松) 박사를 만났을 때부터 인연이다. 퍽이나 오래 됐다. 퇴근 후면 자주 강상혁(姜相赫) 김선모(金善模) 김희석(金熙錫) 이홍택(李弘宅) 등 업계 후배들을 휘하에 몰고 무교동 애주촌(愛酒村)을 찾을 때마다 26세나 아래인 아들뻘 필자가 기쁨조(?) 수행원으로 따라 다닌 전례가 있은 탓인지 고려해운과 KCTC의 경영 일선을 접고 1985년 바톤을 이어 받은 박 이사장이 부임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렀으니 참 긴 인연이었던 것 같다.

필자가 회자시킨 '살아있는 해운계의 전설', '한국해운의 큰 별'에 이어 심지어 '해기사 마피아의 대부', '해운업계의 호메이니' 등등 묵암은 한국해양대학을 제1기로 졸업하고 선장을 역임한 마도로스요 해기사 출신이면서 한편 지성과 야성, 학문적 이론과 현장  실무와 선사 경영을 두루 섭렵한 문무를 겸한 해운계의 큰 별이었기에 필자는 늘 드높은 성좌, 법황적 '현역 리베로'라  불렀고 타계하기 전까지 아흔 아홉에 이르도록 노익장을 과시하며 우리 업계 원로중의 원로로 존경과 추앙받기에 합당한 큰 언덕에 우뚝 선 거목이요,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만이 역사를 남기는 한국해운 근세사의 실록삼아 이를 본받으려 애썼다.

영아기의 한국해운이 그간 대내외적인 숱한 질곡과 발전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상위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 해운을 위요한 근현대사 70년은 바로 묵암 박이사장의 퍼서널 해운 히스토리 LCL 밴에다 외연을 넓혀 핵심적 요소와 수치만 서타핑하면 참으로 충만한 FCL 한국해운 역사적 기록으로 차고도 넘치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해운 전체를 입체적이고도 합집학적으로 총 망라하여 알고 계셨다. 해운계 시니어 종사지 거개가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묵암의 해운업계 발자취는 놀라웠다. 그래서 가끔 필자가 "박 이사장님의 체험적 해운 정사 70년에 서대남의 어깨너머 수박 겉핥기식으로 들은 풍월 60년의 야사를 직, 병열하면 파생되는 기록적 시너지 효과가 상당한 해운사기가 될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10여년 전에 현대사기록연구원 송철원(宋哲元) 대표와 함께 필자가 당시 생존 한국해운계 분야별 대표급 20명을 선정하여 박현규 이사장,  신태범 회장을 비롯하여 1인당 2~3시간 분량의 대담 영상을 집대성하여 이를 출판물로 남기고 인터뷰 영상물 20여편을 국가기록원에 영구히 보전했는가 하면 국립도서관에도 소장했다. 언제나 인터뷰 형식의 이 대담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통해 해운업계 각 분야별 후배 후학들이 관람을 신청하여 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도 지금 생각해보니 큰 별들의 생애나 업적과 공적을 잘 기록한 보람이 있어 가슴 뿌듯하기도 하다.

'묵암제해록(默庵濟海錄)'이란 이름으로 해운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회고록에서도 밝혔다. 인간 박현규는 그간 여러 사람이 한 시대를 먼저 살고 가는 선배의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뭔가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같이 일했던 연구소 이원철 전무의 끈질긴 권유와 김성준 교수의 집필 도움에 힘입어 발간된 회고록을 보면 그의 일생과 함께한 근세 해운 역사도 소상하고 값지게 남겼다. 그는 국가 기간산업으로 해운이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견인차의 동력 중심에서 최선을 다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서울상대를 나와 해운 바톤을 이어받은 장남 박정석 고려해운 회장(현 한국해운협회 회장), 서울공대를 졸업한 차남 박주석  경희대 교수,  이화여대를 거친 박선아 감정평가사 등 슬하 세 자녀들의 훌륭한 성장이 큰 보람이며 해운 다음으로 몸바쳐 이끈 로타리 클럽과 관련한 오랜 봉사, 그리고 한국해대 2기로 평생 동지요 동업자인 KCTC 신태범(愼泰範)회장과의 변함없는 동행이  크고 소중한 자산이라고 회고한 점도 인상적이다.

또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내고 현재 (사)바다살리기국민운동본부를 맡아 봉사하는 작가 겸업 조정제(趙正濟) 총재는 "묵암은 모교 한국해대 육성에 최선을 다했고 해운입국을 필생과업으로 삼아 해운발전에 지금도 헌신하고 있으며 고 윤상송 박사의 뜻을 이어 무보수로 해사문제연구소 운영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예찬했다. "묵암은 마음 먹은 일은 반드시 이룩하는 소신과 집념이 강한 입지전적 인물이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좌표로 삼고 평생을 살아왔기에 음수사원(飮水思源)과 낙과사수(酪果思樹)란 옛말을 생각하며 그 공로를 오래 기리고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침묵의 암자에서 오랜 수련을 마친 수도사 같은 분이란 느낌을 받았고 세상을 달관한듯 동요하지 않고 그 누구의 말도 경청하는 모습이 감명스러웠다고 피력하며묵암의 인간자체와 삶의 행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원한 해운계의 대부, 박현규 이사장은 1927년 7월 3일 경북 영천서 태어나자 마자 경남 울산으로 옮겨 자랐고 울산 향우회장을 오래 맡을 정도로 울산에 대한 애착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일본인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일어 구사에 능통한 것은 성인이 되어 해운업계에 종사하면서 자주 일본을 다닌 탓도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 유학을 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해양대학을 졸업 후 해기 면장을 취득하고 대한해운공사(KSC) 소속 평택호 3등항해사로 첫 승선하여 2항사로 진급 후 자신도 모르게 남조선 노동당 포섭 대상자 명단에 올라 검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 경력도 있다고 꿈많던 뱃사람 젊은 마도로스 제복의 해상생활을 회상했다. 몇 해 전 천경해운 설립자 김윤석(金允錫) 회장의 태종대 원로해기사 동상 건립 선정 추천 때 필자가 찾은 박 이사장은 "김회장이 선장일  때 내가 초서(일등항해사)였다"고 일러주며 당시의 해상생활 면모를 뵐 때마다 소상히 들려주기도 했다. 밥벌이를 위해 80년대부터 조직이 시키는대로 선기장 출신의 몫인 해운협회 해무부장직을 맡으면서 짝퉁 해기사, 짜가(?) 마도로스로 둔갑하여 84평생을 살고 있는 기수(期數) 없는 뱃사람 필자의 자산은 한국해대와 목포해대 출신 해기사를 개교 1기 싱글 기수부터 부터 대다수를 알고 교호하며 평생을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게 자부심이기도 하다.

박 이사장은 가끔 후배들을 화제로 대화를 잇다가 가끔 어느 선사 무슨 보직의 누구가 몇 기(期)냐고 물으면 1기부터 30기 까지의 육근자는 업무상 만나거나 함께 일한 인연으로 거의 알기에 한해대나 목해대이건 무슨 과 몇 기 출신이라고 즉석에서 말씀드리면 필자더러 해운계 보학을 전공했냐고 신기하다고 웃으며 칭찬하던 모습도 기억이 새롭다. 또 직계 후배들도 창업을 하거나 해외 근무 후 귀국해서 문안과 함께 식사라도 대접할 경우도 타교 출신 필자에게 주선을 부탁해서 명동 로얄호텔에 자리를 마련하던 사례도 필자에겐 잊을 수 없는 자부이자 추억이기도 하다. 또 올해로 30회를 맞으며 연구소 주최로 매년 5월에 실시하는 바다의 날 해외 탐방 해운 홍보행사도 거의 빠짐없이 참가하여 비공식 결과 보고를 받던 박 이사장 지난 모습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필자 눈에 선하게 각인된다.

묵암은 1960년 황부길(黃富吉) 초대 해운국장이 해무청장에 취임하자 해운공사 노동조합 초대위원장을 맡아 선원복지를 위해 투쟁한 이력도 있고 회사에 밉보여 본선 해상근무로 밀려나 해상법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전해주기도 했다. 육근 후 다시 배를 타고 동남아 취항 제주호 선장을 포함, 8년간의 승선경력을 마감하고 1961년에 해공 해무과장을 맡아 육근을 맡아 16년간의 해공 근무를 마감했단다. 이어 1964년엔 풍국해운을 설립하여 30대에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제1차 계획조선 신양호 건조에 참여 고려해운 이학철과 합류했던 시절도 회상했다. 2차 계획조선엔 실패하고 3차에서 보리수호를 건조하여 고려해운 전무이사로 취임했고 이어 1980년 고려해운 대표직을 맡자 해운장기 불황이 겹치고 드디어 해운산업합리화란 대 소용돌이를 맞던 때도 협회 차원에서 이에 동참했던 필자에게 소상히 밝혔다. 해운항만청과 한국선주협회가 중심이 되어 재무당국, 금융업계와 함께 해운계의 천지개벽을 통해 부활을 모색했던 가슴 아픈 역사의 재편과정었기에 잊힐리가 없었으리라.  

묵암은 해기사이면서도 면학에도 힘써 일반대학 학사 편입으로 법학을 별도 전공, 필자가 심부름한 서울대 서돈각(徐燉珏) 박사와 연세대 손주찬(孫珠璨)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상법이나 해법학회의 기초를 다진 업적이나 윤상송 박사와 함께 한국해운학회를 창립하는 등 학문 분야에도 앞장서 관여하는 열성을 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필자가 70년대 당시 해운공사(KSC) 사장으로 한국선주협회 회장직을 맡은 주요한(朱曜翰) 회장의 권유로 직장 항로를 디비에이션(?) 하여 해운인 집회소 같은 협회의 조사부장 보직을 받은 때였다. 한국해대 1기로 필자와 교호했던 인사로는 당시 법양전용선 부사장을 역임한 박현호(朴鉉皓) 묵암의 친형, 이준수(李俊秀) 한해대 학장,  정희정(鄭熙亭)도선사, 이용규(李龍奎) 도선사, 허동식(許東植) KR회장, 김동균(金東均) 도선사, 김동화(金東華) 라스코사장, 손태현(孫兌鉉) 학장, 양학권(梁學權) 사장, 김상진(金相珍) 부산청장 등등 지금도 면면이 옛 모습이 또렷이 필자의 시야에 점철된다.

그리고 묵암의 거명 인물 중 필자와 더불어 직간접으로 자기 소속 조직을 위해 함께 참 많은 일도 하고 다투기도 했던 정연세鄭延世) 해항청장, 최재수(崔在洙) 한해대 교수, 박순석(朴順錫) 노조 위원장, 이헌탁(李憲琸) 삼호 사장, 김현리(金鉉利) 해양소년단 사무총장, 박원규(朴元圭) 통신사협회장도 항상 필자가 항상 기억에 담고 있다는 회억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어느 산업분야건 역사라는 공작물은 인물이 그 중심이 되듯 묵암의 생애도 상당 기간 접하고 보니 필자가 종사한 업종이나 조직이 전체를 묶어서 볼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이밖에도 업계는 물론 정부측도 등장하는 인사들의 상당수를 필자도 기억하고 있어 알던 사람들이나 평소 환담을 할 때 할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다시 만난듯 반갑고 거명 자체만으로도 그 시대와 사람을 만나 당시 업무를 다시 함께 하며 호흡하는 것 같은 회상으로 반추됐던 기억들도 새롭다. 나이는 15년 밑이지만 60년대 교통부 출입기자 시절부터 선협으로 옮긴 약관 20대부터 만나기 시작, 30대를 거쳐 4~50대에 이르기까지 업무차 책상을 마주했던 인물들 기억을 떠 올릴 때 필자가 해운 현장을 박 이사장과 함께 보고 경험한 일들이 많기 때문에 같은 화제의 상대로 맞장구를 치기에 안성마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든이 넘어 아흔 줄에는 만나는 업계 인사나 인물이 타계하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인물이 드물어 박현규, 심태범 두 어르신은 세월과 사업의 벽을 넘어 함께 해운 현장을 회상할 수 있는 현장 목격자로 필자가 말벗(?)이 됐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두 번 "나도 고려대학에서 공부한 적도 있으니 같은 고대 교우회원" 이라고 미소짓던 기억과 예선협회장을 맡은 시절 부산담당 상무로 좌천된 필자를 직접 찾아와 화식집 구경 시켜 준 일도 생각난다.

특히 필자가 선협 해무부장 시절 해양계 대학 승선 실습선 후원금 제도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묵암은 동 후원금 징수를 맡아 악착같이 조속납부를 재촉하여 한바다호와 유달호를 후원하던 공로와 외국 선박 입출항시 무조건 협회가 현금을 징수, 필자를 악덕 세리로 만들었던 기억과 이를 계기로 한바다호를 타고 인도의 갠지스와 콜카타를 비롯 미얀마의 양곤, 그리고 일본의 나가사키와 대만의 키룽항 등을 뱃길로 다녔다. 신민교(辛玟敎) 학장. 민우홍(閔右泓) 연습감, 허일(許逸) 선장, 배종욱(裵鐘旭) 기관장 등등 이 순간도 함께 한 당시 승선생활과 얼굴이 선명하게 눈앞에 클로즈업된다.

문무를 겸한 묵암은 그 밖에도 고려대 경영대학원과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고 1982년 모교 한국해대에서 명예 경영학박사를 취득했다. 또 학연 및 업무와 관련된 경력으로는 한국해대 동창회장, 대한해기원협회 부회장, 한국컨테이너수송협의회 회장, 한국해양소년단 부총재, 한국선주협회 부회장, 한국해대기성회 회장, 한국선급협회 이사, 한국해사재단 이사, 한국예선협회 회장, 한국해대발전위원회 회장 그리고 남서울 로타리클럽 회장과 국제로타리클럽 3640 총재를 역임했고 한국해양문학회 회장과 무애문화재단 이사장도 맡았다. 또 생애 크고 작은 공적과 수상 기록이 많지만 1978년 제2회해운의 날에 부총리 표창을 비롯하여 재무부장관 공로표창,  제4회 해운의 날 산업포장, 제6회 해운의 날 5,000만달러 운임의 탑 수상, 제18회 해운의 날 해운의 탑, 자랑스런 한국해대인상 제1호를 수상했고 2010년에는 한국선주협회 창립50주년 기념 공로패 제1호를 기록 후 드디어 2020년 제25회 바다의 날에는 우리나라 산업계 최고의 영예,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끝으로, 옛날에 손편지를 쓸 때 '누구 누구 전상서'로 시작하여 '할말은 태산 같으나 이만 필을 놓는다'로 끝맺던 말이 생각난다. 참으로 밤을 새며라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인에 대한 하고픈 말은 문자 그대로 구구절절 태산이 부족하단 생각이 앞서고 그리움도 용솟음친다. 60년 간 회상의 여로를 달리며 큰 어르신의 뒤를 따르던 추억의 실타레와 선원수첩 없이 다니던 바닷길도 클로즈업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해운계를 굽어 내려다 보시며 대한민국의 젖줄이요 생명선인 한국해운의 영원한 발전을 위해 중단없는 전진을 후원하고 계실, 한국해사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 묵암(默庵) 박현규(朴鉉奎) 박사님!  젊은 시절부터 자주 들러 뵙고 많이 배우고 재롱떨며 뒤따르고 늘 건강 식초 마신다고 종알대던 저 서대남이옵니다. 저에게는 억겁을 살아계시며 영원한 구원의 성좌이신 박 이사장님, 그간 이승의 무거운 짐 다 내려놓으시고 부디 부디 편히 쉬시옵소서 !!"

<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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