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11일 청와대와 기획재정부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정과제 회의에서 '동북아 금융 허브 추진 로드맵'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2020년까지 우리나라를 일본 도쿄와 홍콩과 경쟁하는 아시아 3대 금융 허브로 육성하고, 2012년까지 세계 50대 자산운용사의 지역본부를 유치하며, 한국의 은행과 생명보험사를 대형화해 동북아 대표 금융기관으로 배출하는 게 골자였다.
다음 달 11일이면 이 금융 허브 추진 로드맵이 발표된 지 10년째가 된다. 한국은 아시아 '금융 허브'에 얼마나 다가갔을까.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세계50대 자산운용사 중 동북아 지역이나 아시아 지역본부를 총괄하는 지역본부가 한 개도 들어와 있지 않다. 글로벌 시장에서 세계적인 은행이나 생명보험사와 경쟁하는 은행·보험사 역시 하나도 없다. 금융감독원 조사에 따르면 2003년 해외로 진출한 우리나라 은행의 점포(지점과 법인 합계)수는 2003년 말 94개에서 10년 사이에 불과 6개가 더 늘어났을 뿐이며 설상가상으로 국민은행 동경지점이 불실 PB로 2000억원을 날렸고, 러시아에서도 잘못된 대출비리가 연일 터져 나오고 있다. 생명보험사 역시 외국에 진출했으나 5개 국가에서 점포 8개를 운영하는 '구멍가게 수준'이다. 지난해 생보사들은 해외에서 3500만 달러 적자를 냈다.

금융감독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 수는 39개로 2002년 40개에 비해 1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은행의 지점과 사무소 수는 79개에서 62개로 17개가 줄어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외국계 금융기관이 한국에서 이탈하는 조짐도 보이고 있다. 지난 7월에는 HSBC가 한국시장에서 소매금융에서 철수한다는 방침을 발표한 데 이어 이달 들어서는 한국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이 한국에서 점포수를 100개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네덜란드 보험회사 ING와 영국 보험사 아비바도 한국 시장에서 철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정부가 금융 허브 정책의 상징적인 사업으로 추진했던 서울 여의도 서울국제금융센터(IFC) 건물 세 개동 중 가장 최근에 완공된 55층짜리 '3 IFC' 건물엔 임차 회사가 없어 건물 전체가 텅텅 비어 있는 상황이다.

국가 경쟁력 지표에서도 우리나라 금융은 오히려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세계 국가 경쟁력 순위는 WEF(세계경제포럼)와 IMD(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가 각각 발표하고 있는데, 금융 부문 순위는 2003년과 2013년 23위→81위(WEF), 14위→28위(IMD)로 각각 추락했다.

WEF는 올해 보고서를 통해 "금융시장이 한국 국가 경쟁력의 3대 약점 요인이며, 기업 경쟁력 등 다른 부분의 경쟁력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 산업의 발전 수준도 제자리걸음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금융회사인 KB금융그룹의 세계은행 순위는 68위로 2002년도와 순위가 같다. 반면 2001년 KB의 자산(1337억 달러)과 비슷했던 영국계 은행인 스탠다드차타드(SC)는 지난해 6365억 달러로 10여년 사이에 KB(2634억 달러)의 2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거의 비슷했던 세계은행 순위가 33위(SC)와 68위(KB)로 크게 벌어졌다.

동북아 금융 허브 정책이 이 지경이 된 것은 후임 정부들이 이 구상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은 탓도 크다. 실례로 정부는 금융 허브로 성장하기 위해 '금융인력네트워크센터'(2005년)를 만들고 국고보조금까지 투입해 전문 금융 인력을 육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재 센터 인력은 설립 당시 5명에서 1명으로 줄었고, 매년 1억 원씩 지원되던 국고보조금 지급도 중단됐다. 서울과 부산 등 금융 허브 중심 지역에 입주하는 금융기관을 지원하는 '시도지사 자금 지원' '조세 혜택 부여' 등 조항 역시 지자체의 조례 제정이 늦어지고, 입주 기관이 신청하지 않아 사문화(死文化)됐다.

금융 당국의 과도한 규제는 고질적인 문제다. 은행의 금리와 증권사·투자회사 등의 영업 방식, 보험사의 보험료까지 꼬치꼬치 개입하는 한국의 금융 환경은 외국계 금융기관의 한국 진출을 저해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금융회사들이 조직을 축소하며 긴축 경영으로 돌아서 상황이 더 어려워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한국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던 계획 자체가 아무런 실현 수단도 없는 허망한 말잔치였다는 데 근본 원인이 있다. 서울과 부산 가운데 한 곳을 금융허브로 육성하겠다고 해도 될까 말까 한 마당에 판을 두 곳 모두에 벌였으니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고 말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 정책도 오락가락해 산업은행을 민영화해 대형 투자은행으로 키워 낸다는 계획은 이미 오래전 백지화돼 버렸다.
이대로 가면 동북아 금융허브는 허망한 꿈이었다고 기록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금융 산업을 이렇게 방치하면 한국 경제의 매력이 반감(半減)될 수밖에 없고, 우리 산업이 세계로 뻗어가는 것을 뒷받침하지도 못하게 된다.

중국 상하이자유무역지대(FTZ)에서 가장 주목할 부문은 상하이 금융시장이다. 중국의 첫 '경제적 치외법권'지대를 만들어 물류 중심지뿐만 아니라 홍콩 따라 잡고 아시아 금융허브로 육성하는 것이 장기적 목표다. 이를 참고해 정부는 지난 10년간 동북아 금융허브 구상의 실천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그 실패 요인을 철저히 분석해 앞으로는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자료로라도 삼아야 한다.
[수필가 / 이경순 전 KMI 연구위원]

[약력]

・고려대 상학과 졸
・한국은행
・재무부 외환국 근무
・충남대, 목원대 강사
・삼미해운 상무이사
・전 KMI 동향분석실장(연구위원)
・전 중앙일보 디지털 국회의원
 

※ 본 원고 내용은 본지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쉬핑뉴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