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목포해양대학에 교수로 근무하기 시작한 1999년 교수들이 수필동인지인 “나루터”를 창립하였다. 나도 동료들의 권유에 따라서 나루터 동인으로 합류하였다. 1년에 한번씩 나루터 수필집을 발간하였는데, 한사람 당 2-3편의 글을 내도록 배당을 받았을 때에는 참 답답하였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서 제출하였다. 몇 번을 이렇게 떠밀려서 쓰게 되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는 미리 미리 생각날 때 수필을 준비하는 요령이 몸에 붙기 시작하였다.
목포해양대학교 연구실에서 고개를 들면 지척 간에 바로 바다와 섬이 보인다. 그리고 가끔씩 안개도 끼어서 운치를 더하였다. 새벽에 출근하여 아침운동을 위하여 유달산 중턱으로 올라가면 고하도와 그 넘어 섬과 산들을 바라보면 “재미있는 경험”들이 떠오르곤 했다. 이것을 글로 남겨두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생각날 때마다 1년에 3-4편의 글을 적어두는 습관이 나에게 붙게 되었고 이러한 습관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목포해양대학을 떠난 다음에도 고향 영덕선배님들이 2009년 “토벽”이라는 동인지를 복간한다고 하여 나를 토벽동인으로 초대하여 주셨다. 그래서 평시에 수필을 적어두는 연례행사를 이어가게 된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나의 수필의 소재는 주로 두가지이다. 하나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동해안 바닷가 어촌의 대가족제하에서 자라면서 어른들로부터 배우고 체험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선의 선장으로 근무하면서 해난사고를 당한 다음 어려움을 딛고 법학으로 진로를 변경하면서 해상법 교수로 성장한 과정에서 체험한 것들이다.
수필집을 내라는 권유를 주위에서 받았지만, 많이 망설였다. 수필을 어떻게 적어야하는지 공부한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 수필집이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내가 경험에 바탕한 수필들이 고향의 자라나는 후배나 그 부모님은 물론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또한 1960년대와 70년대 유년시절을 보낸 동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공감을 얻어내고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글 쓰는 사람으로서 보람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출간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제 이렇게 나의 수필 45편은 하나의 책으로 묶여지게 되었다. 제1부는 유년시절의 추억을 담았다. 제2부는 가족이나 고향의 가치, 그리고 교훈을 적은 수필을 모았다. 제3부에서는 성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경험한 실패와 실패를 딛고 일어난 과정 그리고 성공에 필요한 내용들을 적었다. 제4부는 교수생활 20년 동안 교직에서 경험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제5부는 위 4가지 분류에 속하지 않거나 공통되는 내용을 한곳에 모았다. 살아가는 평범한 이야기라는 소제목을 달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수필집의 제목을 정하는데, “아버지의 출향에 대한 미련”과 “바다와 나”가 경합하였다. 전자는 아버지 세대의 아픔을 담은 것으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나의 유년시절은 수산업과 청년이 되어서는 해운업에 종사한 점, 그리고 해상법 교수라는 점을 포괄하는 “바다와 나”를 제목으로 뽑았다.
나는 등단을 한 적도 없고 더구나 수필작가도 아니고 그저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작가로서의 현란한 글 솜씨가 있거나 문학성을 갖춘 깊이 있는 내용은 없어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다만, 글의 소재가 되었던 것은 모두 체험한 것으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독자들께서 나의 글에 공감하시면서 빙긋이 미소를 지으시는 힐링의 시간을 가지시게 된다면 나로서는 큰 보람이고 영광이 될 것이다.


2017년 8월 25일
화정동 서재에서
선장 김인현 

1. 나와 선박과의 인연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대상과 나름대로의 인연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선박과의 인연에 있어서 양쪽 해양대학의 동료 교수님들을 통틀어 나만큼 특이하며 자연스러운 인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선박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전개하여 본다.
나의 선박과의 인연은 나의 출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경북 동해안의 작은 어항인 영덕의 축산항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당시인 1959년에는 나의 조부님은 대형어선(대형이라고 하여보아야 50톤 내외의 작은 꽁치 잡이 어선) 3척(어촌에서는 이를 오대구리라고 불렀다)을 가진 동해안에서 몇 번째 가는 어선선주였다. 그러니까 나는 어선 선주의 손자로 태어나면서 선박과, 정확히 말하면, 어선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선박과의 인연의 시작>
우리 조부님이 수산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역사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우리 집안의 윗대 조상님들은 안동 김가들의 대종가가 있는 안동시 풍산면 소산에서 17세기 초엽까지 기거하시다가 영해지방으로 오셔서 축산항에서 내륙으로 5리 떨어진 양장(염장)이라는 곳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왔다. 나의 고조부님은 많은 토지를 가진 지주였고 이러한 가세로 자손들이 땅과 인연을 맺고 있었지, 바다와는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한일합방이 되면서 우리 집안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우리 조부님은 일본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셨다. 일본에 건너가셔서 조부님은 자동차전문학교를 나와 당시에는 갑종선장보다도 귀하였다는 운전면허를 취득하여 이를 생활의 기반으로 하시면서 관서(關西)대학에서도 공부를 하셨다. 그리고는 운수업에 뛰어드셔서 상당한 부(富)를 획득하게 되셨다. 이러한 가운데에 아버님 형제분들은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셨다. 세월은 흘러 대동아 전쟁이 끝나갈 무렵 조모님이 귀국을 종용하시자, 조부님도 성화에 못 이기시어 귀국을 결심하시게 된다. 조모님과 아버님 형제들은 먼저 귀국하시어 염장 큰집에서 기거를 하시게 되었다.
조부님은 고베(新戶)에 있던 집과 재산들을 처리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일본 돈의 국외방출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조부님은 그 돈으로 어선을 사가지고 귀국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동향의 선원 한분을 물색하시고 시모노세끼(下關)에서 어선 한척을 구입하여 두 분이 현해탄을 건너 축산항으로 배를 몰고 오셨던 것이다. 동네 어른 들이 조부님을 화두로 삼을 때는 “용한 선생 대단한 분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였으며 어떻게 배를 몰고 현해탄을 건너와”라는 말을 하곤 하였다. 생전에 선박조종술을 어디서 배우셨는지 여쭈어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아마 조부님은 자동차 운전을 하셨으니까 기관장 역할을 하시고 그 선원이 선장의 역할을 하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면서 우리 집은 자연스레 지금의 축산항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축산항은 고려시대에 만호(萬戶)가 있던 곳으로 국방상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축산항의 중요성은 부산의 동래와 같았다고 한다. 축산항은 영덕대게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고려시대의 방어용 성곽이 남아 있는 곳으로 역사학자들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다양한 용도에 사용된 선박>
이 때만 하여도 동해안은 정말 물 반 고기 반이었다고 한다. 조부님은 곧 어선 두척을 더 구입하시고 우리 집은 어선 3척을 가진 동해안의 대형 어선 선주가 되셨고,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에는 어획량이 좋아 사업은 번창하였다. 그리고 1952년 우리나라에 첫 지방자치제도가 채택되어 도의회가 구성되었을 때 우리 조부님은 경상북도 도의원으로 피선되어 농림수산분과 위원회에서 활동하셨다. 내가 태어나던 1959년에만 하여도 우리 집은 여전히 가세(家勢)가 넉넉한 집이었다.
우리 조부님이 1952년 도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 그 때만 하여도 소위 막걸리 선거였다고 한다. 그래서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어촌촌락의 유권자를 공략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때 유용하게 사용된 것이 우리 집안의 어선 5척이었다. 우리 종조부님도 집안의 종손으로서 어선 두척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두 분은 종방간에 5척의 어선을 가지고 있는 셈이 되었다. 고기대신 막걸리를 만선한 5척의 어선이 일열로 만선기(滿船旗)를 달고 풍악을 울리면서 각 어촌을 돌며 막걸리 파티를 하면서 선거유세를 하였다고 한다. 선박이 이러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교과서에서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 우리 집안식구들과 선원들이 피난을 갈 때 사용하였던 것도 바로 이 어선들이었다. 우리 집안은 1차로 방어진에 내려가서 피난을 하였고, 전황(戰況)이 불리해지자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영도 근처에서 어선을 운항하였다. 내가 해양대학에 시험을 응시하러 갔을 때 조부님께서 동행을 하셨는 데 광복동과 영도다리 근처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이는 아마도 6.25 피난시절 조부님이 부산에 기거하시면서 얻은 낯익음 덕분이었을 것이다.
 
<대경호 사건>
나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우리 배에 대한 첫 기억은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은 그저 하나의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처음이라는 것은 특이한 존재로써 우리의 기억에 흔적을 남기듯, 이 사건은 나에게는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대사건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이고 이날은 바로 시골에서 크게 의미를 두는 12월 22일 동짓날이었다. 어촌에는 새벽녘에 배가 입항한다. 우리 집의 어선은 큰배라서 몇 일씩 바다에서 작업을 하고 입항을 하게 된다. 그런데 경북 동해안에는 포항 북쪽으로 강구항, 축산항, 후포항이 차례로 있다. 대경호는 가자미, 대게, 대하(새우) 그리고 대구 등 당시 동해안에서 어획되는 고기들을 만선하고 항구로 들어왔다. 선장이 접안하기 위하여 홋줄을 던져주자, 선주의 대리인으로서 아버님과 진외조부님(할머님의 남동생)께서 강구항으로 회항할 것을 지시하였다. 어선의 선주로서는 고기값이 좋은 항구에서 입찰을 하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아버님께서 집으로 들어와서 강구항으로 가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차에 사고가 났다는 전갈이 왔다는 것이다. 새벽녘에 선장이 회항을 하다가 축산항 방파제 입구의 오른쪽 등대쪽에 좌초를 한 것이었다. 선장은 배를 끌고 항구 안으로 약간 들어왔고, 전 선원은 무사히 탈출된 다음, 배는 침몰하였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항구로 나갔더니, 우리 배의 형체는 없어지고 마스트만 물위로 나와 있었다.
그 후 양수기를 동원하여 배를 인양하는 데, 매일 매일 배가 어느 정도 올라왔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당시 축산항의 볼거리였다. 매일 매일 배가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잠수부가 잠수하여 파공 부분을 막고 양수기로 일정한 폐쇄구역의 물을 빼내게 되어 부력을 얻어서 배는 점차 부상하게 되었을 것이다. 20여일의 작업 끝에 대경호는 인양되었고, 가자미는 썩어버렸다. 그리고 우리 배는 포항항으로 예인되어 당시 기계 값으로 50만원에 팔렸다고 하였다. 아마 보험제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던지 대경호는 선체보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 뒤로 빗쟁이들이 몰려들어 우리 집안의 사업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 때도 삼화호라는 어선이 한척 남아 있었으나 우리 어른들은 어선을 운항할 용기를 잃어 버리고 있었다. 한 척은 이미 엔진 고장으로 또 다른 좌초를 당하였고, 대경호에는 기관부 사람이 로프에 다리를 절단당하여 가족들이 우리 집에서 며칠간 소란을 피우던 즈음이었다.

<장달범 선장과 수덕>
이 때 대경호의 선장은 장달범이라는 분이었다. 키가 180센티는 되고, 영화 백경의 주인공인 그레고리 팩을 닮은 바다의 사나이 다운 호쾌한 얼굴의 건장한 미남 선장이었다. 이 분은 우리 집의 어선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여 선장으로 진급을 시켜주었다. 선장이 된지 몇일되지 아니하여 이러한 큰 사고를 야기하게 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방파제의 끝단에 등대가 있어서 등대불을 보고 항해를 하므로 좌초가 나지 않아야 함에도, 선원들의 기분상 동짓날인데도 불구하고 강구항으로 회항을 하라고 하니 투덜대면서 선원들은 기분이 상해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선원들을 방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나, 나로서는 당시의 사고원인을 알 수는 없다.
이러한 사고가 있었지만 조부님은 그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그 뒤로도 이 분은 축산항에 기항을 하게 되면 우리 집을 찾아와서 인사를 반드시 하곤 하였다. 우리 집을 찾을 때는 대구와 가자미 등이 담긴 상자를 하나씩 들고 왔다. 그 뒤 이분은 강원도와 경북 동해안을 통틀어 그야말로 최고의 선장이 되어서 그 선장을 데리기 위하여(동해안에서는 선장을 고용한다는 말을 쓰지 않고 모신다는 뜻의 데린다는 말을 사용한다)는 프리미엄이 몇 천만원씩 붙어 다녔다. 그 분이 배를 타고 나가면 만선을 하기 때문이었다. 소위 수덕(水德)이 있다고 표현을 하는 데, 아마 대경호 사고 후 장달범 선장 자신이 각고의 노력으로 수덕을 만들었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대경호 침몰사건의 영향>
이 사건은 우리 집안을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게 몰고 가버렸다. 세상인심이란 야박하여 권력 없어지고 돈 떨어지면 사람들은 등을 돌리게 마련이다. 형은 나와 2년 터울이지만 내가 국민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관계로 형은 2학년 나는 1학년이었다. 내가 1학년에 들어 갔을 때, 형은 우체국의 저금통장을 이미 갱신을 하고 있었다. 나는 1학년 때의 그 통장을 졸업때까지 사용하였으니 이 사건이 우리 집안의 가세를 결정적으로 갈랐다는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저녁마다 동네 사람들이 10명 정도는 항상 놀러와서 조부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사랑방 풍경, 내가 조부님의 부름을 받잡고 외지의 사람들에게 혹은 동네어른 들에게 수없이 큰절을 올렸던 그런 아름답던 사랑방 풍경들이 우리 집에서 조금씩 사라지게 된 것도 이 사건을 계기로 하였던 것이다.
대경호 사건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서울이나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을 것이고 아마, 한국해양대학이 아닌 다른 일반대학으로 갔을 것이고, 고시를 패스하여 지금쯤 행정관료나 외교관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삼촌들이 모두 서울에서 공부하셨으므로 이런 가능성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인연으로 선박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이 오히려 순리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대경호 사건은 우리 집안의 가세를 기울게 하면서 나를 해양대학으로 진학시키게 된 사건으로, 나에게 오히려 기회를 제공하여 준 셈이다.

<자다라는 용어>
위에서 본 대경호사고 이후 우리 집안은 후포항을 모항으로 하고 있던 동림수산으로부터 선박을 한척 “자다” 하기로 하였다. 동림수산의 김원규 회장님은 조부님과 친분이 두터워 조부님이 후포에 가서 배를 한척 “자다”하여 온다는 것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경의 일인 데, 나는 “자다” 가 무슨 말이냐고 조부님께 여쭈니 조부님은 배를 빌리는 것이라고 만 하셨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인데 배를 빌리는 것을 사투리로 혹은 어선에서 자다라고 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쭉 지냈다. 이 동림수산의 배를 빌려서도 우리 집안은 재미를 보지 못하였다. 남의 돈을 빌려서 사업을 하니 잘될 리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말 하고자 하는 요지는 “자다”라는 용어이다.
내가 해양대학에 다니면서 해운실무에서 용선에 해당하는 차터(charter)라는 개념을 배우면서도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선박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상선에서 일등항해사를 가리키는 초사라는 용어가 chief officer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그제서야 “자다”가 charter의 일본식 발음이라는 것을 알고, 쾌재를 불렀던 것이다. 15년 이상 궁금했던 것을 “자다”된 선박 위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조부님 샤클 몰래 팔아 엿사먹기>
  우리 집은 어선을 3척이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구를 꾸미는 데 필요한 로프, 그물, 샤클 등을 보관하는 창고가 필요하였고, 우리 집은 항구근처에 커다란 창고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군것질로서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엿이었다. 엿을 사먹기 위하여는 철붙이가 있어야 하였다. 형과 친구들과 같이 나는 우리 창고의 개구멍으로 들어가 철붙이 몇 개씩을 꺼내어 엿을 바꾸어 먹었던 것이다. 가장 쉽게 가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반원 모양에 막대기가 하나 쳐져있는 쇠붙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는 바로 샤클이었다. 형법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이는 절도죄의 구성요건을 갖추게 된다. 내가 형사미성년자이므로 책임이 조각되어 범죄가 구성되지는 않지만, 만약 범죄가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조부님 소유의 재물을 절도한 것이고 나는 조부님의 손자이므로 이는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가 되어 처벌을 받지 않게 되는 전형적인 예가 된다.

<생애 첫 항해와 배멀미>
  형과 나는 어선을 한 번 타고 바다로 나가보기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모님들 모르게 배에 가서 선장에게 배를 타고 나가고 싶다고 하였다. 마침 배는 시운전을 하게 되어 1시간정도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배가 출항하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선원들이 선수에 있는 작은 공간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였다. 형과 나는 선수의 작은 공간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배는 더 흔들리는 것이었다. 멀미를 심하게 하고 하선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곳은 폭슬(forecastle)의 갑판장 창고(boatswain store)에 해당하는 곳이고, 선수이기 때문에 배가 가장 많이 흔들리고 멀미가 심한 곳이다. 선원들이 거기를 권한 것은 선주의 아들들을 골려주기 위함이었거나, 아니면 멀미를 없애기 위하여 바다에서 내려오는 관행을 우리들에게도 적용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때 내가 멀미를 극복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 후로 한번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 한바다호를 타고 실습을 나가서 배가 30도 이상 롤링을 하여도, 멀미를 하지 않은 동기생 몇 명중 한명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상선에서 처음으로 선박에 승선하는 선원이 멀미를 심하게 하면 폭슬로 내어 보내어 단련을 시키는 광경을 볼 때 마다 나는 이러한 어릴적 추억을 떠올리곤 하였었다.

<선박 페인트일>
    어선의 선주이셨던 아버님은, 대경호 사건 이후 집안 대식구를 이끌고 나가실 수가 없게 되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축산항에는 조선소가 두 개 있었다. 어릴 때 이 조선소에서 선박을 육상으로 올릴 때 보면, 선박을 일정한 위치에 오게 하여 레일위에 선박을 앉히고 조선소에서 기계적으로 와이어를 감으면 선박이 끌려져 올라오는 것이었다. 이들 조선소는 지금 개념으로는 모두 슬립웨이(slip way)이다. 이 조선소들은 소형 어선을 위한 것이었는 데, 한 때는 우리 집에서 경영을 하다가 거기에서 일하던 목수에게 이를 팔아 넘겼었다.
어선이 조선소에 올라오게 되면 페인팅을 하여야 하는 데, 아버님이 그 일을 하기로 작정을 하자, 선주들과 조선소에서도 아버님을 도와주기 위하여 자신들의 선원들이 하던 일을 아버님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의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양 쪽 조선소에 아버님이 사용하실 페인트와 솔을 리어카에 싣고 가는 일을 형과 번갈아 가면서 하였다. 우리들은 마지막 손질(소위 시야게)를 할 때 아버님을 많이 도와드렸다. 마지막 손질은 큰 붓, 소위 롤라로 페인트칠을 할 수 없는 구석진 곳을 작은 붓으로 칠하는 일이다. 마지막 손질을 하게 되면서 나는 어선의 외부 구조에 대하여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님이 특히 정성을 들여서 하시는 일 중의 하나가 어선 선체측면에서 녹장(船底塗料)과 흰색을 갈라 칠하는 부분이었다. 아버님은 이 경계부분을 틀리지 않게 잘 칠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어선 선체길이의 양쪽 끝단에 못을 치고 여기에 줄을 당겨 잡고는 상하구획을 나누곤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경계부분은 흘수선(吃水線)(lord line)인 것이다. 아버님은 내용을 아셨겠지만 그것을 흘수선이라는 표현을 하시지 않으셨다. 아버님은, 훌륭한 목수는 나무의 조각을 가장 적게 남기는 사람이고 페인팅을 잘하는 사람은 페인트를 적게 바닥에 흘리고 사람이라고 하셨다.

<상선과의 첫 만남>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까 처음 보는 커다란 상선 한척이 우리 고향 축산항의 모래사장 앞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3,000톤 규모의 상선으로서 닻을 놓고 묘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들의 말씀으로는 이웃의 산에서 채취한 유리만드는 재료인 석영을 적재하기 위하여 일본 상선이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대리점이 화물을 수배하여 항구로 가지고 오면 터그보트에 이를 싣고 상선의 옆에 붙여 상선의 크레인으로 화물을 싣는, 지금 생각하면, 소위 라이터링(lightering)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일본 상선의 선원들은 축산항이 개항(開港)이 아니기 때문에, 축산항에 상륙하지 못하였으므로, 우리 동네의 형들이 노도선을 타고 소주 등의 물건을 가지고 가면 그 일본 선박에서 환대를 하여 주었다. 나도 한번은 여기에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 일행이 가까이 가자, 상선 위에서 무슨 길쭉한 물체를 내려주었고 형들은 그 밑에다 밧줄로 우리 노도선을 묶어두고 나를 보고는 배를 지키라고 하고는 자신들은 상선 위로 올라가 가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 물체는 바로 갱웨이(gangway)이고 우리 노도선은 갱웨이의 끝단에 묶인 셈이 된다.
그런데, 조금 있다 보니까 내가 타고 있던 노도선이 그 발판에 끼어서 배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나는 혼비백산하였다. 배를 꺼집어 내려고 아무리 밀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고함을 지르고 야단을 쳤다. 그러자 위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이더니 왱하는 소리가 나자 발판이 쑥 올라가면서 배는 다시 균형을 잡게 되었다. 나는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사람은 바로 당직 타수였고 갱웨이의 모터를 사용하여 갱웨이를 조금 감아주었던 것이다. 형들이 불러서 배에 올라갔더니 식당에 밥이 있었는데 흰 쌀밥 위에 장어구이를 한 조각씩 얹어 두었었다. 하얀 쌀밥에 장어구이 한 조각을 우리들은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나로서는 엄청나게 놀랐다가 편안하게 환대를 받고 나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이렇게 나의 상선과의 첫 만남은 짜릿한 극적 반전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나와 선박과의 생래적(生來的)인 인연은 나를 한국해양대학으로 진학하게 하였고, 그 후 나를 선장까지 진급하게 하고 다시 법학을 공부하게 하여 해양대학의 법학교수로 만들었다. 나는 가끔씩 해양대학의 1학년과 2학년 때 수학과 공학이 주였던 학교공부를 무척 싫어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나의 사회과학 지향성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선박과 관련된 법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 교수라는 직업이야말로 나의 생래적인 선박과의 인연을 최대한 살린 멋진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선박과의 인연은 나로 하여금 수산업과 해운업을 포함한 해양의 발전을 위하여 남보다 다른 노력을 경주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김인현, 목포해대 교수 문학 동인회 나루터 2001년 제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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