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남 편집위원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감독이 헐리우드 액션영화의 주류를 서부극에서 '스타 워즈(Star Wars)'란 과학공상(SF) 영화를 출품, 새로운 장르를 통해 최초로 SF 대중화로 바꾼게 1977년이었고 한국엔 1978년 처음 개봉된 것으로 기억된다. 시리즈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은하계를 장악하기 위해 선정적 폭력성이 난무하며 우주의 확장세계관을 테마로 한 별들의 전쟁을 영화로 만들어 꾸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리암 니슨(Riam Nicen)'과 '인디아나 존스'의 '해리슨 포드(Harison Ford)'도 등장하는 스타워즈가 시리즈로, 에피소드1(보이지 않는 위험)과 에피소드 2(클론의 습격), 에피소드3(시스의 복수)로 부터 4(새로운 희망), 5(제국의 역습), 6(제다이의 귀환), 7(깨어난 포스), 8(라스트 제다이)에 이어 에피소드9(블랙 다이어몬드)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계속 제작, 상영되고 있는 차제에 한때 한국 해운계에도 수많은 스타 출신들이 해운중흥에 동참했던 시절이 너무나 또렸하게 연상된다.

영화 스토리 전개 측면에서 한국해운을 스타 워즈의 은하계와 비유하면, 제다이 기사단이 규율을 어기고 반란도 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종족을 만들거나 멸종하고, 또 살아남은 '다스 시디어스'가 제국의 황제를 계승하거나 가끔 여왕이 등장하는 얘기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어오던 우리 해운의 성장 및 번성기와 잇단 부침을 되풀이했던 흥망성쇠 역사를 방불케 했고 필자가 언론계에서 해운업계로 전직한 1970년대 초반, 한국 해운계에도 당시 군에서 전역한 스타들이 정부 부처를 비롯하여 관련단체와 업계에도 즐비하게 포진하여 문득 영화 '스타 워즈'란 제목이 떠올라 그 시대를 함께 호흡하며 눈여겨 본 입장에서 잠시 돌이켜 보기로 한다.

1970년대 한국해운의 고도 성장기에도 해사정책 수장이나 해운기업 및 관련 단체장 등도 당시 군사혁명 이후였기에 시대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곳곳에 스타출신 장성들이 많아 국가 해운정책 입안이나 시행이 별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이 기억에 생생하고 이 또한 한 시대를 풍미한 해운계의 역사였기에 필자 역시 젊던 그 시절의 사사건건이 자주 머리를 스친다. 군부 엘리트들의 인사적체를 해소하고 군에서 닦은 조직, 지휘 능력이나 고급 행정력을 가진 전역 장성들의 포스트 근무처 마련은 국가 최고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일거양득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측면도 있었다는 게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4.19의 해 1960년 다음, 5.16의 해 1961년 정부등록 총 선복량이 67척 12만G/T에서 1981년에는 265척에 486만G/T로 40배 이상이 증가했던 바로 그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해운계에는 전문 해운인 못지 않게 중도에 편입해온 군 출신이 많았다. 여하간 국가경제의 젖줄이요 국민경제의 생명선이란 정책 목표와 슬로건 아래 수출입국의 주역으로 꼽히던 해운산업 고도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교통부장관이나 해운항만청장 및 한국선주협회장이나 이사장을 역임한 인물들에 군 출신이 많았고, 당시 이같은 현상은 아마 다른 산업분야도 거의 비슷했으리란 추측이다.

그간 필자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지면을 통해 그 시절을 회고하는 잡문을 발표해온 게 여러 차례지만 이 같은 현상은 단순한 시대적 배경이나 해운외적 글로벌 소산물이 아니었다.
유수 해운국 중 한국적 특수 양상이었기에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리운 건 필자만의 노스탈지어는 아닌 것 같다. 식자우환이라듯 작금의 디테일에 흐르는 전문 지식이 해운 부활에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한때 부동의 세계 제1위 조선산업, 그리고 G-5를 구가하던 한국해운이 이처럼 장기 침체와 불황의 늪을 헤어나지 못 하는 건 멀리를 내다보고 해운산업의 원거시안적 큰 그림을 그려, 고르디언 매듭을 풀어낸 알렉산더 대왕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외항해운의 중심단체로 해운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다해온 한국선주협회가 사단법인 외항선주단체로 출범한 건 한국선급(KR)과 같은 해 1960년 6월 20일이다. 설립당시 초대 석두옥(石斗鈺/해운공사) 회장으로 출발해서 1962년 2대 임광섭(任光燮/해운공사), 1965년 3대 이맹기(李盟基/해운공사), 5대 1969년 주요한(朱耀翰/해운공사)에 이어 1976년 부터 이맹기(코리아라인) 제독이 다시 회장직을 맡았다. 같은 해 해운항만청이 신설되어 초대 강창성(姜昌成) 청장이 부임했고 선주협회 사무국에는 김용배(金容培) 장군이 집행부 수장인 이사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주위를 쳐다보면 모두가 별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출신 예비역 육군대장 4스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선두로, 육군참모총장 출신 육군중장 3스타 최경록(崔慶祿) 교통부장관, 국군보안사령관 출신 육군소장 2스타 강창성 해운항만청장, 해군참모총장 출신 해군중장 3스타 이맹기 한국선주협회장, 그리고 필자가 측근에서 보필해야 했던 제17대 육군참모총장출신 육군대장 4스타 김용배 선주협회 이사장 등 육군 하사출신 필자가 우럴어 쳐다보는 해운계의 별들은 은하수 같이 많았다. 특히 해운행정의 주무부처인 교통부는 백선엽(白善燁) 장군에 이어, 장성환(張盛煥), 김신(金信), 민병권(閔丙權), 황인성(黃寅性) 장군 그리고 윤자중(尹子重), 이희성(李熺性), 차규헌(車圭憲), 이범준(李範俊) 장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스타 출신들로 즐비했고 이들이 장관 바톤을 이어갔다.

그러나 최소한 바다와 해운과 선박과 연관이 있는 인물은 코리아라인(KLC)의 해군 출신 이맹기 제독과 정긍모(鄭兢謀) 제독, 해운정보센터 양해경(梁海卿) 제독 등이 기억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여하간 당시는 곳곳이 가히 육해공 등 별들의 전쟁터였었단 생각이 들고 그래도 그 시절 단계적 경제개발 정책이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맞물려 한국해운이 고도 성장기를 맞아 정부는 해운이 외화 가득과 절약이 탁월한 기간산업으로서의 특성을 살려 각별히 보호 육성하려고 웨이버(Waiver) 제도등 해운산업육성법을 제정 시행하고 계획조선사업을 위해 국민투자기금을 할애하는 등 각종 정책의 뒷받침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탓으로 별들의 전쟁은 순조로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장성급 출신은 해외 대사나 국영 기업체 장으로, 영관급은 정부 부처 비상계획관이나 대기업 또는 협회나 조합 등 단체의 비상계획부장으로. 위관급은 '유신 사무관'이란 별칭의 행정부처 사무관으로 특채 하여 보직이 부여됐다. 특히 교통부 츨입기자 시절부터 들락이며 필자가 30년간을 머물렀던 선주협회 사무국만 해도 동경대학교 출신으로 교통부 차관을 역임하고 초대 부임했던 김병식(金丙湜) 이사장과 동경상선대 출신으로 한국해대 학장을 거쳐 부임한 윤상송(尹常松) 박사에 이어 신민당 원내총무 출신 김재곤(金載坤) 의원이 상근부회장을 거쳐간 뒤 다시 이사장 제도를 부활시켜 김용배 장군이 선주단체 이사장으로 부임했으니 한마디로 시끌벅적 요란했었다.

해운과 선박 얘기는 그간 넘 많이 해와서 당시 김용배 이사장이 주도하는 선주협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해운계 군 출신끼리의 에피소드나 해프닝이 많았기에 모두 고인이 되신 당시의 그분들을 추억하는 의미에서 몇가지 회고해 본다. 1923년생으로 지금으로 치면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졸업,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1946년 육군소위로 임관한 엘리트 장교로 '59년에 제1군단장, 이어 제5군단장, '60년 육본정보참모부장, '61년 1월 중장으로 진급, 육사 교장을 지낸 후 '65년에 대망의 대장 진급과 동시에 제17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충주비료 사장, 대한중석 사장을 거쳐 선주협회에 온 것이었다. 김대장이 총장시절 필자는 제대 말년의 육군 하사였다가 뒤늦게 한 사무실 측근서 옆방에 모시고 간부회의랍시고 아침 저녁 60만 대군을 호령하던 무용담을 귀가 따갑게 들어야 했으니 자주 경끼(?)가 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김 이사장은 별 하나도 장군이라 하니 '장군' 대신에 자신에겐 꼭 '대장'이란 호칭을 쓰도록 당부했고 협회를 대표하는 상위직 이맹기 회장을 "별도 셋뿐이고 해군은 육군의 일개 군단병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군단장급"이란 말을 자주 했고 강창성 청장도 "별 둘과 넷은 천양지차"라 했으며 정부 국장급들이 직접 전화를 하면 위계질서도 모른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고 초대 주월사령관을 지낸 채명신(蔡明新) 장군도 브라질 대사 시절 커피 선물을 들고 가끔 사무실을 찾았고 당시 교호하던 최경록, 민병권, 황인성 교통부 장관은 별 넷을 달지는 못하고 전역한 건 사실이었다.

특히 휘호에도 능하고 용무(龍舞)라는 호를 즐겨 쓴 김 이사장은 전역후 상배의 외로움을 견디다 못 해 1978년 쯤인가 당시 서울대 출신으로 석박사 학위를 가진 국내 최초의 이사관급 여성국장과 재혼을 하게 됐다. 아침 출근시간이면 늘 부부 승용차 두대가 대기했다. '별 넷 달고 왕폼 잡기'로 널리 이름났고 김대장과 재기로 쌍벽을 이뤘던 제9대 참모총장 이형근(李亨根) 대장의 장인이기도 한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李應俊) 장군이 주례를 맡았었다. 당일 용산 육군회관 결혼식장 주변에는 수백명의 퇴역 및 현역 장성들이 열솨장수(?)처럼 약장(略章) 대신 수여받은 훈장을 모조리 가슴에 단 정장을 입고 나와 훈장들이 철렁거려 문자 그대로 결혼식장은 휘황찬란하고 엄숙도 하고 스펙타클하기만 했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김 대장을 4년간 모시면서 총애도 받았지만 당시 해운계 그 많은 별 중, 한솥밥을 먹으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사무실을 찾는 귀빈들에겐 보디가드와 수행비서 겸 기쁨조(?)로 근무했던 시절의 기억이 너무나도 많지만 또 하나가 생각난다. 어느날 일과후 전방지역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검문소를 지나게 됐을 때다. 초소 근무 당직 병사들이 검문을 위해 일단 차를 세운 뒤 신상기입 쪽지를 받고보니 성명과 계급을 적게 돼 있기에 '선임자, 대장/김용배' 그리고 '수행자, 하사/서대남'이라고 적어 내밀었더니 위관급 초소 당직 쟝교가 필자 계급 '하사'는 알겠는데, '대장'이라고 적은 건 무슨 뜻이냐 묻는다.

"근무중인 현역 장교가 어찌 대장이면 별이 넷인 군대 계급도 모르냐?" 했더니 차려자세에 "충성!", "단결!", "필승!" 구호가 나오고 본부에 연락을 취하는 등 대대급(?) 전방 부대에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던 당시가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명문대 출신들이 해운사에 취업을 하려고 줄을 섰고 당시 입사한 젊은이들의 긍지는 하늘을 찔렀는데 요즘은 어쩐지 모르겠다. 필자 나이 77세. 희수를 맞은 지금까지 까치발로 해운계 변방을 돌며 다시 해운전성기가 도래하여 환하게 웃는 해운계 후배들의 모습에 갈채를 보내는 날을 보기 위해 아직은 좀 더 머물다 떠나겠다면 이 또한 노추에 골불견이라고 손가락질 하려나?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저작권자 © 쉬핑뉴스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