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남 편집위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고, 어쨌든 필자의 생생한 기억으로는 엊그제 같은 1977년 말이 되자 우리나라 수출이 대망의 100억달러를 돌파한다고 당시 상공부 상역국장이 선주협회에 찾아와 선B/L에 협조하여 수출 목표량 달성을 선하주가 함께 이룩하자고까지 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세모에 나라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이듬해 1978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달성했다고 또 한 번 떠들석했던 모습을 반추하니 국가 경제 규모의 외형이 모든 분야에 걸쳐 수십배로 늘어난 지금 보다 왠지 늘 잔치분위기 속에서 하는 일이 재미있고 신이 났던 "그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앞서고 이는 필자뿐 아니라 당시 3, 40대의 산업역군으로 현장에서 일했던 모두의 한결같은 목소리기도 하다.

1976년 3월 13일, 교통부 산하 외청으로 항만청(KPA)이 창설되어 국군보안사령관 출신 강창성(姜昌成) 예비역 소장이 초대 청장으로 부임했고 제4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는 이듬해 1977년 해운계는 해군참모총장 출신으로 코리아라인(KLC)을 창업한 이맹기(李孟基) 사장이 해운공사(KSC)의 주요한(朱耀翰) 사장의 바톤을 이어 다시 한국선주협회(KSA) 회장직으로 돌아와 업계를 이끌었다. 동시에 박건석(朴健碩) 범양전용선 사장, 이학철(李學喆) 고려해운 사장, 현영원(玄永源) 신한해운 사장, 박남규(朴南奎) 조양상선 사장, 백용흠(白龍欽) 해운공사 부사장이 협회 부회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협회 사무국 총수로는 국회의원으로 신민당 원내 총무와 상공부 정무차관을 역임후 협회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김재곤(金在坤) 상근부회장의 뒤를 이어 제17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용배(金容培)예비역 육군대장이 다시 부활한 이사장 직으로 부임했고 이사직을 맡은 회원 선사는 대한선박(이정림), 삼양항해(김상길), 극동해운(남궁련), 아진해운(조상욱), 태영상선(박정순), 쌍용해운(윤정엽), 동서해운(양재원), 흥아해운(윤종근), 협성선박(왕상은), 천경해운(김윤석), 코리아케미케리(박종규), 율산해운(신선호), 현대엔터프라이즈(조상래), 호남탱카(구평회), 아세아상선(정희영), 국제해운(김영배) 등 16사, 그라고 세방해운(이의순)과 삼익상선(이종록)이 감사직을, 김병두(金昞斗) 전무이사, 김선모(金善模) 상무, 강상혁(姜相爀) 상무가 집행부 임원직을 맡아 운영됐다.

1960년 6월 20일, 대한해운공사, 극동해운, 근해상선, 대양해운, 동서해상, 동남해운, 대한유조선, 이안공사, 조선상선, 신한해운, 고려해운 등 10개 외항선사로 출범한 사단법인 한국선주협회는 총 보유선박 총 39 척100,953톤으로, 한 나라의 보유 선복이 지금의 대형선 1척에도 못 미치는 선대로 세계 무대와 맞서 국제해송 운송사업으로 경쟁하는 출발점에 서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야만 했다. '74년 말에 개정된 해상운송사업법시행령에 따라 자본금 2억원, 선복량 1만톤으로 면허유지 기준이 상향되고 경과기간 1976년말까지도 기준 미달로 자진 면허 반납 또는 폐업으로 1977년말 77개의 외항해운업체는 65개사로 집약됐다.

그러나 해운은 짧은 호황 긴 불황이란 업종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1983년의 천지개벽 같은 해운산업합리화란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쳐 6~7년만에 밑도 끝도 없는 마무리를 보였으나 이후 상승세를 보여 1988년은 피크를 보였으나 다시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진 외항해운산업은 세계 부동의 조선 제1위 고수와 함께 해운도 세계 G-5라는 세계해운 최선진국 반열에 진입을 하고도 계속 항진을 못하고 눈 포지션(Noon Position) 파악과 방향타를 잃은 듯이 정부나 업계가 힘들여 나름대로 짜 맞춰가는 정책이나 경영의 퍼즐게임이, 시황과 웰 매치되어 "왔다 빙고"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작금도 고도를 기다리는 샤무엘 버켓처럼 기다림에 지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해운 주위를 꼬박 50년이 넘게 변방에서 먼 발치로나마 바라보던 필자는 이 해운계 시황 위주 역사에서 눈을 돌려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며 해운계에서 명멸해간 인물 탐구에 관심을 보내고픈 방관주의 입장에 흠뻑 빠져 본다. 그래서 현근세 한국해운 60년사에 큰 획을 그은, 이름하여 고관대작을 지낸 벼슬 높은 관리도 많았고 뚝심 행정으로나 사업적으로 크게 이름을 날린 입신양명의 위인들도 많았지만 필자는 우선 앞서 40여년전 필자와 한 조직에서 함께 일한 어느 작은 한 거인을, 타계한 지 불혹이 되는 40주기를 맞아 또 한 번 회싱해 본다.

모두에 밝힌 100억불 수출과 1,000불 소득시절, 6~70년대에 일하다가 70년대에 떠난지 올해가 만 40년을 넘기는 해로 기억돼 세월의 빠름과 함께 19년이란 연령 차이를 차치하고 1960년대 말 교통부 출입기자 시절부터 취재차 동료 기자들과 선주협회를 방문하면 일행을 반가이 맞이하며 마치 해운 괴외공부를 받으러온 학생을 대하듯 뭐든지 친절히 가르쳐주며 심지어 개인 호주머니를 털어 술밥을 대접하면서까지 열성적으로 후배를 이끌던 그 모습이 생생하고 지금도 8~90대로 생존한 원로들은 그 이름 석자를 들먹이기 일쑤다.

중국인가 북한의 어느 상업학교를 갓 졸업 후 월남하여 50년대에 해운업계에 취업하여 독학으로 실무를 익혔고 최후 보직이 한국선주협회 상무이사(별세후 전무이사로 추서)가 고작이요 그것도 57세가 되던, 한창 일할 비교적 이른 나이에 타계한 김선모(金善模)란 이름이 그 누구, 어느 높은 벼슬을 지낸 위인들 보다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로 인구에 회자되며 그 이름이 생존 당시에도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작고한 지 40년이 넘은 지금에도 그를 기억하는 원로급 해운계 인사들에게 화제가 될 때가 많으니 사람이 태어나 한 평생을 살면서 어쩌면 그리도 한 업종, 한 직장, 한 업무 분야에 열성을 쏟으며 오로지 그길 한 길을 올 곧게 앞만 보며 살다가 갈 수 있을까,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전자계산기가 없던 당시, 상고 출신답게 주산 실력이 뛰어나 해상운송관련 각종 통계나 자료를 분류 집합,정리, 분석 및 해석, 이론화 하는 두뇌가 뛰어나 자국어처럼 거침없는 일본어 실력을 활용, 상승효과를 보인 인물이었다. 당시 협회 간부 중, 동경대학과 교통부차관 출신의 김병식(金炳湜) 이사장, 동경상선대와 한국해대 학장 출신의 윤상송(尹常松) 이사장, 서울상대와 해운공사 런던지점장 출신의 김희석(金熙錫) 상무, 조도전대 출신의 황승호(黃承昊) 총무부장, 한국해대 출신의 이인구(李仁求) 조사부장 등등 기라성 같은 사무국 간부들도 김상무의 해운에 대한 열정과 애착과 지식과 통계 및 견문은 인정하고도 남았었다.

그는 비록 한창 일할 나이 57세에 간암으로 별세했지만 해운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해운을 위해서 몸바쳐 일하고 그 누구보다 가장 해운을 사랑하다가 애석하게 떠났다는 전설적 인물로 기억하고 실제 그런작은 위인으로 그 당시를 함께 호흡했던 해운계 인사들로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고 특히 대원로들을 가끔 접하면 지금도 업계 시니어들은 그의 이름을 자주 입에 담아 칭송, 듣기에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마지막 떠나던 날 필자가 졸문으로 쓴 조사를 업계를 대표해서 김용배 이사장이 흐느끼며 읽던 모습이자주 떠오른다. 심지어 점심 시간도 아껴 우유 한 잔에 빵 한조각을 입에 물고 빼곡하게 각종 통계나 수치를깨알같은 글씨로 메모하던 수십개의 노트들을 정리하던, 50대에 이미 백발이던 모습이 선명히 눈에 떠오른다.

얕은 학력과 뛰어나지 않은 직책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당시 업계를 쥐락 펴락 하던 주무부처 고급 관리들도 김상무의 해운에 대한 해박하고 광범위한 실무 지식이나 백의종군 하듯한 노력과 열성에 탄복해서 식사를 사러 온 그에게 되레 음식이나 주안상을 대접했다는 일화는 한 두 사람에게서가 아닌 너무나도 잦은 화젯거리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상무는, 70년대초 한국해대 학장과 선주협회 이사장을 거쳐 지금의 해사문제연구소를 창설한 윤상송 박사를 멘토로 모시고 무교동의 '애주촌(愛酎村)'으로 기억되는 주점을 찾을 때 필자가 한참 아래 나이에도 자주 따라 다녔던 기억과 해돈회(海豚會)란 모임의 정규 멤버였던 것도 생각난다.

해운계의 1923년, 계해년생(癸亥年生) 돼지띠 출생들이 해돈회란 동갑모임을 만들어 선주협회 강상혁 상무, 김선모 상무, 선박대리점협회 김유경(金裕卿)  전무, 윤인석(尹麟錫) 에베렛기선 및 기독교방송 사장 등이 모임을 가질 때마다 19년 아래 필자는 특별 수행원으로 따라 다녔고 바다의 돼지들이 친목을 다지던 호쾌한술자리와 우정어린 모습도 눈에 선하다. 선주협회 사무국 이사장 김용배 대장도 동갑이긴 했으나 함께 어울리진 않았었고 이들이 생존했다면 금년 아흔 일곱수가 됐겠다. 현재 수년째 병상에서 고통받는, 12년 아래 띠동갑으로 협회 사무국 뒤를 이은 최재수(崔在洙) 전무이사도 나중에 같은 돼지띠니 “나도 준회원”이라 했던 농담도 생각난다.

또 당시 일본서도 '일본의 김선모'라 불리며 해운에 미친(?) 사람으로 일본 해운집회소 발간, 역사와 전통이깊은 월간지 ‘가이운(海運)’의 편집장을 오래 했고 나중에 타이완 ‘에버그린’의 동경지점 이사를 지낸, 필자와도 여러 차례 만난, 학자풍 해운인 ‘이노마다 야쓰오(猪悅夫)’가 있어 항간에 한국에 ‘김선모’가 있다면 일본에는 '이노마다'가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오로지 해운에 몸바쳐 외길만의 족적을 남기고 떠난 두 비슷한 인물이 있어 지금도 이들을 기억하는 원로들은 일생을 어느 한 분야에 사심없이 한 알의 밀알이 되었던 이들의 과거를 동시에 회상하는 것은 양국 해운사에서 작은 흔적으로 함께 기억되는 인물이기에 안성마춤 같다.

해운학이나 해사법학 또는 해운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현저한 해운계 인사에게 주어지는, 해사문화상 수상자 명단을 봐도 제1회 윤상송, 한동호, 남동희 등 세분에 이어 제2회 수상자로 김선모란 인물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고, 황부길(3회), 이시형· 허동식(4회), 손태현(5회), 서병기(6회), 이준수(7회), 이맹기(8회), 박현규(9회), 박종규(10회)가 선정된 후 2019년 제28회는 해양수산부장관과 한국해대총장을 역임한 오거돈 부산시장이 받는 걸 봐도 직위에 걸맞지 않게 당시 내로라 하는 해운계 유명인들의 틈에 한 사람으로 끼어 객관적 인정을 받은 게 확실하단 생각으로 필자에겐 지금도 함께 일하며 업무를 익혔던 40여년 전이 그리운 추억으로 아롱진다.

하늘의 별 보다 더 높다고 자처하며, 별이 한 개나 두개라도 장군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장'이란 호칭으로만 불러 달라던 김용배 예비역 대장, 이사장도 동갑의 직속 부하인 김상무에겐 늘 숙연한 자세로 경외심을 보였다. 한편 그때를 전후해서 또 하나의 필자 소속 조직의 작은 화제가 하나 있어 회상한다. 필자가 맡은 조사부에는 ’78년들어 작은 변화가 생겼다. 교통부 해운국시절 목포지방 해운국에서 근무한 경력에다가 필자보다 11세나 위여서 일제 강점기 중학교 과정까지를 수학, 일본어 해독이 가능해 조사부 출범시에 필자와 함께 참여했던 김용문(金溶文) 과장이 이직하는 바람에 일어 해독 가능 대타를 찾던 중 화학병과 통역장교 소령출신 김화형(金華炯)이란 과장을 뽑아 그동안 요긴하게 필자와 손발을 맞춰 당시 해운계에 크게 사랑받던 선주협회보를 500회에 걸쳐 잘 만들어 온 김과장도 필자에겐 기억이 남는 잊지 못 할 동료 중의 한 사람이다.

김과장 역시 나이는 11세나 연배였으나 품성이 온순하고 연령에 관계 없이 상명하복과 위계질서를 철저히준수할 줄 아는 육군 화학단 근무경력이 있는 장교 출신으로 일어에 영어까지 능통하고 대학신문 경력으로 편집기능까지 갖춰 필자에겐 보배같은 존재였기도 했지만 별도로 기억되는 화제의 한토막이 따로 있다.김과장은 아들만 둘을 뒀는데 당시 대학 수능시험이 학과 320점 체능 20점으로 합계 340점이 만점일 때 한해 차이로 해를 두고 두 아들이 320점대를 육박하는 고득점을 취득해서 가난한 해운 단체 과장 아들이 최고 수준의 국립 의과대학에 합격을 하고도 남는 점수를 땄던 일이다.

그때가 아니고 지금이라도 자녀가 수능시험 고득점으로 유명 의대에 간다는 건 분명 가문의 영광(?)이요 본인의 영예임에 틀림없는 일이 아닐 수 없을테니 말이다. 얼마 전 모 종편 TV에서 화제와 관심리에 방송된 'SKY캐슬'이란 드라마 생각이 난다. 옛날에 들은, 진정한 엘리트의 산실로 일컫는 영국 이튼(Eaton College)의 교훈, "1.남의 약점을 이용하지 마라 2.비굴하지 않은 사람이 되라 3.약자를 깔보지 마라 4.항상 상대방을 배려하라 5.잘난체 하지마라 6.다만, 공적인 일에는 용기있게 나서라" 와 그들이 늘 가슴에 새기고 다닌다는 "약자를 위해, 시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란 버전이 우리나라 하이스펙 엘리트 집단에서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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