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남 편집위원
최재수(崔在洙) 국장은 중도에 관복을 벗고 공직에서 물러나 낙하산을 타고 한국선주협회 전무이사 자리로 안착을 했다. 그러나 사무국에는 군번 1번 이형근(李亨根) 대장과 함께 별 넷 단 대장 '폼 잡기'로 쌍벽을 이뤘던,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제17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용배(金容培) 예비역 대장이 비록 해운에는 비전문가였지만 역시 낙하산을 타고 먼저 내려와 직속 상위직에 버티고 있으니 크게 불편한 일은 뻔한 일이었다. 특히 김 이사장은 단순 '장군'이란 호칭은 별이 한개나 두개도 장군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를 때는 꼭 '대장'을 붙여 별이 4개, 4성장군임을 강조하여 "김대장님"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협회 업무 관계 요로에 연말 선물을 보내는데 새로 부임 인사를 겸해 '최재수 전무이사'가 본인 명함으로 이를 보낸 게 들통이 나서 '김 대장' 이사장이 사무실 집기를 집어던지며 대발노발한 사건이 생각난다.

그러나 조직관리에 능한 최 전무는 이듬해 정기총회에서 그간 이사장이나 상근부회장으로 차관급 이상이 맡아오던 협회 사무국을 김대장의 퇴임을 찬스로 정관을 개정하여 사무국 최 상위직을 전무이사가 총괄 관장하는 체제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본인이 수장 직위에 올라 외항해운업계 업무 전반을 맡아 순발력과 두뇌회전이 빠른 엘리트 공무원의 경험과 산하 선사와의 유대 도모 등에 능한 재능을 살려 그간 노쇠현상을 보이며 매너리즘에 빠졌단 지탄을 받기도 했던 사무국의 손보기에 착수, 우선 기능의 활성화를 위해 발빠른 추진력을 보였다. 사무국의 혁신적인 활성화를 위해 우선 회장과 전무이사의 주례 회동과 업무보고, 회장단회의 최고 의결기구화와 이의 정례화, 이사회 및 회원사 간담회를 정기화하고 가시적인 활성화 행보를 시작했다.

 
그간 극도로 사업비 지출을 억제하여 좀비화된 협회의 적극적인 대내외 활동과 국제업무의 활성화를 위해 애쓰는 모습도 역력했다. 퇴물(?) 공무원 출신이나 청탁인사로 채웠던 사무국 직원의 점차적 교체, 외국어 공부의 강제 시행, 실제 승선을 통한 해운관련 업무 체험 등등 별로 크지 않은 체구에 가재미 눈(?)으로 감시를 하고 방울소리를 내며 직원들을 다그치고 독려했다. 외국인의 영어 전화가 오면 이를 받아 제대로 답변하는 직원이 드물다며 외국어 공부를 비롯한 직원들의 자질향상을 강제화 했다. 사무국의 모든 임직원은 무조건 일과 시작전 아침에는 영어반, 퇴근 시간 후의 저녁엔 일본어 공부를 하도록 독려했다. 그리고 반기별로 LATT나 TOEIC 시험을 통해 취득한 점수에 따라 여직원은 물론 운전기사일지라도 일정 기준으로 해당이 되면 외국어 수당을 지급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영문학을 전공한 영문과 출신 필자가 자연히 영어공부 주무를 맡아 네이티브 영어강사를 섭외 결정하고 매일 출석을 체크해서 벌금을 받아내고 이를 재원으로 술이 취해 간이 커야 영어가 잘 된다는 통설에 따라 퇴근 후 밤이되면 남녀 외국인 강사를 데리고 신촌 연세대 근처의 프리 안주 호프집을 자주 찾았다. 신촌 로타리 일원의 호프집에는 연세대 FLI(외국어학당)에서 외국어나 한국어를 배우는 원어민 학생이나 강사가 많아 섭외가 용이했고 그 중 선주협회 간부 출신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남선생 '콜린스(Collins)'와 여선생 '리자(Lisa)'가 협회 소속 직원처럼 가까이 지내던 모습이 지금도 추억으로 새롭다.

또 하나 최 전무가 강행한 획기적인 업적(?)은 당시 자동차 운전면허가 없는 전 임직원들에게 운전면허를 예외없이 무조건 취득케 한 일이었다. 차량 운전만 생각하면 머릿속에 대형 교통사고가 연상돼 엄두를 못 내던 필자도 그 때를 놓쳤더라면 평생 무면허로 이 나이를 맞았을 것을 상상하면 최전무의 파쇼적인 당시 직원 통솔과 운영 방침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일이고 독려하는 상급자나 책임자가 지시나 주문만 쏟아내면 저항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함께 하고 같이 뛰었기 때문에 외국어 향상이나 업무 수행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었다.

그밖에도 과장 이상 간부들은 자기가 수행하는 직무 관련 분야를 주제로 테마를 정해 심층적으로 조사 연구 한 결과를 매주 한번씩 돌아가며 전 임직원을 모은 가운데 강의를 하도록 의무화하고 이를 강력 시행했다. 비록 각자가 수행하는 업무일지라도 이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여 남들 앞에서 강의 형태로 발표를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자기 차례를 맞은 직원들은 죽을 맛으로 특강 홍역을 치뤄야 했다. 또 각 부장을 중심으로 부서별로 관장하는 업무를 대상으로 고료를 지급하며 원고를 쓰게 해서 '한국해운의 현황과 실제'라는 제하의 단행본 책자를 출판, 해운계에 배포했고 이를 해양계 교육기관에서 교재로 쓰일 정도로 해운입문서로 인기를 얻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놀라운 성과는 차치하고 협회라는 경제단체에서 이같이 면학정신을 북돋우는 조직 운영은 참으로 본받을만한 일로 여겨져 유익했던 기억으로 남는다. 그는 적어도 선주협회에 와서는 추진 업무뿐만 아니라 한잔 마시고 노는 회식 문화에도 앞장섰다. 철따라 임직원의 부인들도 동행시켜 회식을 함께 하거나 나이트 클럽에 가서 디스코를 함께 추며 친목을 도모하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매년 개최되던 '해운의 날' 행사가 끝나면 뒷풀이 담당 필자가 주관하여 사무국 임직원과 가족까지 함께 격의 없이 어울려 노래방이라도 가서 마이크를 잡던 여흥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가끔 직원들이 "그때 그시절, 최정권 시절이 좋았었다"는 향수는 지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또 한가지, 능력위주의 적재적소 인사 방침과 진급 원칙을 위주로 하는 그는 가끔 연공서열을 뒤엎는 파격을 보이기도 했다. 그 중 필자에 대해서도 인간적 비호감이 원인이었는지 아님 관리 시절 기자실에 유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너무나 파격적인 보직 변경 인사를 단행했었다. 그간 여러번 밝혔듯이 기자 출신의 필자를 어느날 갑자기 황당하게도 해양계 출신 해기사, 마도로스가 적격인 해무부장으로 전보를 시켰던 것. 지금 생각하면 결론적으로 이왕 해운계로 진로를 바꾼 마당에 일반 업무 외에 전공을 바꿔 평생 짝퉁 해기사로서 해상업무를 맡아 주특기를 바꾸게 한 건 어쩌면 업계 경력을 두배로 넓히는 계기를 준 셈이라 다행이란 생각이지만 최재수적(?) 발상은 지금도 의아하다.

최초로 한국해대의 한바다호를 타고 원양실습에 참여시켜 본선을 익히고 선원들의 해상생활을 몸소 견학하게 했고 이후 계속 바톤을 이어가며 직원들을 바다로 내보내 본선의 현장 메커니즘을 익히게 한 일 등 역발상적인 아이디어 연출을 계속했다. 선박을 구심점으로 사업의 주체 삼아 해상운송을 통해 돈을 버는 업종이 해운이라면 당연히 본선에 대한 메카니즘을 익혀야 마땅하다는 직원 통솔에 대한 그의 발상 전환은 조직을 업그레이드 시킨 대표적 케이스다. 필자가 실습선 한바다호를 타고 대만의 키룽, 인도의 갠지스와 캘카타, 버마의 랭군, 일본의 나가사키 등을 한국해대 실습생과 함께 승선 견학을 다닐 때에는 이들 실습선을 후원하는 실무책임을 필자가 맡고 있어 사관식당 식사때마다 선기장 앞자리 연습감과 동급 좌석에 배치된 까닭을 학생들은 물론 교관 사관들도 몰랐던 게 에피소드로 남는다.

때마침 해운의 동서문제 못지 않게 남북문제가 국제해운의 현안으로 대두되자 UN이 IMO 전신 '정부간해사자문기구(IMCO:Inter-Governmental Maritime Consultative Organization)'란 국제해사협의기구를 발족 SOLAS(해상인명안전조약), MALPOL(해상오염방지조약) 등 각종 국제조약이 제정되고 이를 시행을 앞두고 이를 국내법으로 수용해야 하는 문제가 업계 현안으로 대두 되자 이의 팔로우잉을 주관하는 각종 기구의 국제 회의에 담당 직원을 참석시키는 등 협회 사무국은 최 전무를 비롯 온 간부들이 머리띠 매고 공부를 해야했고 비해기사 출신 필자를 보좌하기 위해 회원 선사 소속의 엘리트 해기사들을 파견형식으로 상근시켜 함께 일하게 조치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 중인 한해대 출신 성용경(成龍慶/23N), 박찬재(朴燦在/27N), 문병일(文炳日/34N) 등 뭍에 오른 육근 해기사들과 함께 근무한 기억도 새롭다. 또 최 전무는 정부 당국의 지시에 따라 필자를 실무 책임자로 별도의 작업을 지시, 지금의 해양수산개발원(KDI)의 모태가 된 해운정보센터란 이름의 조직을 만들어 독립기구로 발전시키거나 해양오염문제가 해운의 핫 이슈로 부각하자 현재의 해양환경공단(KOEM)의 효시가 된 해양오염방제실이란 부서를 신설하여 이를 조합형태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한 업적은 당시 최 전무의 아이디어와 행정력이 크게 발휘한 덕택이란 찬사를 보내며 고인의 당시 업무 추진력을 추억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해운이 급격한 불황으로 집단 도산사태에 이르러 1983년 말부터 일대 변혁기를 맞은 해운산업합리와 과정을 거쳐 업계가 집약되는 시점에서 겪어야 했던 사무국의 산더미 같았던 일들을 처리하던 모습과 합리화 자구책 문제로 범양상선의 박건석(朴健碩) 회장과 한상연(韓相淵) 사장이 극심한 갈등을 빚을 때 중재역할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는 세 임기 6년 근무를 끝내고 협회를 떠난다. 1986년 후임 낙하산으로 해운항만청에서 퇴임한 이종순(李種洵) 운영국장 출신에게 바톤을 넘기고 두양상선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통폐합 과정에서 발생한 운영자금 부족으로 압류된 선박을 고철로 매각하여 회사를 살린 노력과 경매로 나온 원목선을 유리한 조건으로 경락받아 사세에 도움이 됐던 현업 선사 근무 무용담을 가끔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던 최재수 부사장은 어느날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대학교수로 늦깍이 변신을 하여 대학 강단에 서게 된다. 유비무환으로 협회 재직시 소리 소문내지 않고 중앙대학 무역학과 박사과정을 거쳐 학위를 취득했던 게 주효했다. 보통고시와 고등고시 공부 경력을 십분 발휘하여 남들은 직장 수장이라면 다른 데 눈 돌릴 사이에 그는 박사과정 학업을 착실히 밟았던 것이다. 마침 학위담당 주임교수가 필자의 대학 동기동창 절친 교우, 사회과학대학장을 지낸 장치순(張致順) 박사라 이쪽 저쪽 얘기를 전해 들으며 웃을 일도 참 많았다. 그것도 최 교수는초빙 케이스가 아닌 1988년 교수 모집 신문공고를 보고 지원하여 공채를 통해 당당히 대학 강의를 맡는 영광을 안게 됐으니 더욱 값졌다.

그는 훗날 여건상 서둘러 완성하여 취득한 학위 논문이라 부실하단 죄책감을 가져 왔으나 몇 년 후 일본에서 해운 관련 저명 교수들이 찾아와 본인 논문이 자주 인용된다는 말과 한국해운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칭찬을 듣고 너무나 기뻤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서슴치 않고 실토하길 "일반적으로 교수는 전문 지식을 충분히 습득한 후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나는 거꾸로 교수가 된 뒤 교수에게 필요한 전문 지식을 습득해가며 가르쳤다"고 술회했다. 여하간 관리를 거치면서 정책을 익혔고 선주단체에서 업계 전체를 리뷰하고 이어 현업에서 실무를 익힌 현장 경험이 시너지 효과롤 보여 학생들에게 산 지식을 전달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고 자평을 했다.

2001년 2월 정년퇴직까지 14년에 걸쳐 해운경영학부 교수로 재직 중 기억에 남는 강의가 뭐냐는 생시 필자 질문에 인류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해운의 역할을 중심으로한 세계해운사 분야의 강의였다고 회고했다. 대학 퇴임 후 그는 한국해대 학장과 선주협회 이사장을 거쳐 한국해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동경상선 출신의 윤상송(尹常松) 박사의 후임으로 한국해대 제1기 졸업 후, 고려해운과 KCTC 대표이사 및 국제로타리클럽 3640지구 총재를 거쳐 동 연구소의 바톤을 이어 받아 오늘에 이른 박현규(朴鉉奎) 이사장으로부터 연구소장이란 직함을 얻어 외주 받은 연구과제를 이원철(李源哲) 전무이사와 주축이 되어 대표 집필을 하는 일에도 몰두했다.

개별 선사의 숱한 사사(社史)나 해운관련 업종별 단체의 연사(年史) 출판물 발간 대행은 물론 선주협회 이규만(李奎萬) 상무이사도 참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한해운공사의 전말을 남긴 3인 공저, '잃어버린 항적' 을 비롯하여 기록의 사각에 묻혀 소외됐던 본선 운항의 주역 해상직원의 전반에 관한 체계적 고찰, '우리 선원의 역사' 발간 등이 결과물이다. 특히 획기적으로 한국 해운의 역사를 방대하게 집대성한 역작 '한국 해운 60년사'는 필자의 상투어 "역사는 관심 갖고 기록하는 자에 의해서만 기록되어 남는다" 는 어록(?) 마따나 기록의 불모지 우리 해운업계에 큰 역사 전과 교과서로 남아 필자에게도 해운 큰사전이나 백과사전으로 유용하다. 그리고 60년사 참고자료로 별책 발행된 '해운사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월간 해양한국의 연재를 모은 에세이 성격의 야사를 담아 흥미로운 해운 캔터베리 테일스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 최 박사 85년 생애에 관한 자서전적 서술은 필자가 알고 있는 것들만 모아도 필설로 다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심경은 비록 적은 나이는 아니었고 어쩌면 알맞게 살다 갔단 생각도 들지만그래도 지금은 서운하고 아쉽단 말 밖엔 더 이을 말이 없다. 며칠전, 한때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재직했던 코리아쉬핑가제트(KSG)의 초창기 취재부장 출신, 조선 전문지 '선박뉴스(The ShipNewsKorea)'의 정호인(鄭鎬仁)발행인을 만난 자리에서 최 박사를 화제로 얘기 중, 이구동성으로 우리나라 해운전문 기자들의 잊을 수 없는 멘토는 공직과 선주단체 및 교수 출신의 최재수 박사와 그리고 대리점과 포워딩 및 하역업계의 해기사 출신 이윤수(李允洙) 회장 두 분이 현장의 투톱으로, 문무(文武) 양대 산맥의 대표격이었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파안 대소하며 오래 기억하자고 다짐도 했다.

자주 한국해대 2기 졸업 KCTC 신태범(愼泰範) 회장 사무실에 모여 해운 원로들끼리 바둑을 즐기시던 모습은 물론, 늘 필자더러 "이 세상에서 부러운 사람은 오직 서대남 너뿐"이라거나 "만년에 서대남 술 사 주는 재미로 산다"며 유난히 지갑을 자주 열던 모습이 왠지 짠하다. 또 필자의 부산지부 귀양(?) 근무 시절, 가끔 중앙동서 한해대 1기 졸업의 천성이 학자, 고 이준수(李俊秀) 학장과 최 박사를 모시고 전설적 연습선 선장 출신 15기 허일(許逸) 교수와 필자가 기쁨조가 되어 도토리묵 안주로 유쾌하게 막걸리를 마시던 추억이 이제는 머나 먼 전설이 되고 보니 유행 가사처럼 가을 타는 남자가 되어 치맛바람 감싸는 한줄기 바람에도 깊어가는 가을의 센치를 더하듯 최 박사가 떠오른다.

"보고 싶은 최재수 박사님, 40년 전 김선모(金善模) 상무 별세 때는 제가 정성껏 조사를 썼었는데 최 박사님 마지막 길에는 이 졸고가 조사를 대신하오니 부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편히 쉬시며 한국 해운 잘 발전하게 도와 주이소!!"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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