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信 교통부장관 지시사항을 메모하는 鄭泳薰 해운국장(왼쪽)
金信 교통부장관 지시사항을 메모하는 鄭泳薰 해운국장(왼쪽)

 

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1970년께 당시 필자가 28세의 교통부 출입기자 시절, 10년 위 38세의 젊은 정영훈(鄭泳薰) 해운국장을 처음 만났던 때가 50년이 넘어, 반세기가 흘렀고 그가 타계한지도 벌써 11년이 지났다. 당시 교통부 출입기자 중 경제지의 성격상 외골수로 해운 쪽만 취재에 열을 올려 기사를 유달리 많이 쓴 탓에 당연히 취재 대상으로 자주 만나 닥치는 대로 지면을 통해 기사를 쏟아내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38세'란 젊은 최연소 정 국장 얘기를 회자시키며 화제의 대상에 자주 올리기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며칠 전 책꽂이에 꽂힌 그의 희수 기념 회고집 '정치는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를 우연히 발견, 안경 낀 정국장 표지 사진이 와락 반가워 황급히 일독하는 기회를 가졌다. 저자 메모에 회고 집은 2009년 1. 19일 한국무역협회 회의실서 개최된 한국해운물류학회 주최 제18회 해사문화수상식에서 그가 수상자로 결정되어 상을 받는 자리에서 필자에게 건네준 것이다.

그는 신설 해운항만청장 하마평에 오르다가 기획관리실장을 끝으로 관복을 벗고 여의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 배지를 단 후에도 행사장 등에서 필자나 해운관련 인사들과 마주치면 상투적으로 "내가 해운국장 때"를 연발했고 특히 필자를 보면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Bare Boat Charter/BBC TC)이란 용어는 내가 만든 거 당신이 잘 알지?"를 되풀이, 만날 때마다 '라떼(Latte)' 현상을 보이며 함께 70년대 초반의 해운 얘기를 나누며 파안대소 한 기억도 새롭다. 또 한 가지 당시 '정영훈 = 연세대'란 등식이 먼저 떠오른다. 까닭은 모르지만 졸업생도 서울대는 '동창회(同窓會)', 연세대는 '동문회(同門會)', 고려대는 '교우회(校友會)'라 각기 달리 불렸던 것 같다. 60년대, 대학가에 유행했던 SKY 촌평 우스개도, "첫째, 돈 10원이 생기면 서울대생은 공책 사고, 연대생은 구두 닦고, 고대생은 막걸리 마신다. 둘째, 서울대생은 도서관에서, 연대생은 이발관에서, 고대생은 대폿집에 가야 만나기 쉽다. 셋째, 서울대생은 존경의 대상, 연대생은 연애의 대상, 고대생은 결혼의 대상"이라며 웃었던 생각은 나지만 필자는 최근까지 정영훈 신상에 대해서는 고향이 경기도 광주 어디 하남 쪽이란 것만 알았었다.

하지만, 그가 그리도 너무나 어렵고 힘들게 눈물겹게 공부하여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이란 건 뜻밖의 일이었다. 지방서 행세하는 명문가의 부잣집 귀공자 출신으로 연세대를 졸업한 전형적인 스마트, 댄디형 인물로 알았고 해운국장 재직 시 교통부 출입기자 27명 중 연대 출신이 온통 제일 많아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우선, 1961년 5.16 후, 1964년 월남파병,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에 이어 1967년부터 본격 궤도에 오른 제2차경제개발 계획이 순조로이 진행되어 국제교역의 급격한 확대와 아울러 해운수요가 급팽창하던 해운산업의 고속 성장기에 주무국장을 지낸 긍지와 자존심을 소중히 간직하고 국회의원 시절의 금배지 보다 약관 38세의 최연소 해운국장 시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큰 긍지를 갖고 활동하던 다이나믹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시절, 정확한 직급, 직책은 희미하지만 기억나는 범위의 교통부 간부급들로 김구(金九) 선생 차남으로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신(金信) 장관, 이재철(李在澈) 차관, 이용(李龍), 오용운(吳容雲) 철도청장, 김완수(金完洙) 육운국장, 민영환(閔泳煥) 항공국장, 김정학(金正鶴) 부산지방해운국장, 김상진(金相珍) 선박담당관, 김창갑(金昌甲) 총무과장, 박수환(朴秀煥), 김준경(金準卿) 지도1, 2과장, 김병훈(金秉薰) 내항과장, 최각(崔角) 외항과장, 이덕환(李德煥) 선원과장 등이 떠오르고 이들 거의가 타계한 원로들이라 옛 모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밖에 당시 기억나는 인물로, 해운국장과 철도청장을 지낸 최훈(崔薰),  최장화(崔章和), 이원(李沅) 사무관과 주사급들이 몇 년 뒤 서기관과 국장급으로 진급하여 공채 17기생들과 함께 1976년 3월 13일에 종로 삼양사 빌딩에 간판을 걸고 탄생한 신설 해운항만청의 주역을 맡아 강창성(姜昌成) 초대 청장과 함께 주요 간부급으로 활동했던 인물들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그는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야탑리(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야턉동)에서 정성대(鄭性大) 아버지와 이옥순(李玉順) 어머니 사이에서 1932년 9월 17일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둘, 아래로 누이가 셋, 남동생 둘로 8남매였다. 집이라곤 17채 밖에는 없는 산간벽지 소 부락이었다. 산을 세 개나 넘어야 하는 이매리에 있는 돌마초등학교는 소달구지도 못 다니는 좁은 길이었지만 힘든 줄 모르고 토끼길 같은 산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고 그래도 성적은 1, 2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찔레 순을 씹으며 오디 열매를 딱 먹고 열심히 다녔던 학교는 지금은 성남시 분당으로 옮겨졌고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기억에 떠 올릴만한 흔적은 그 어디서고 찾을 길이 없다고 정영훈은 회상했다.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으나 형편상 엄두조차도 못 냈지만 1945년 3월 제7회 졸업생 대표로 우등상을 수상하며 일단 소학과정은 마쳤다.

소작농을 하는 엄한 아버지에게 중학교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농사일을 돌보며 밤에는 아랫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통감(通鑑)을 익히던 중 8.15 해방이 됐으나 그가 농사일에서 헤어날 기미는 만무했다. 아버지는 우리 형편에 중학교는 무슨 중학교냐며 서당에서 한문이나 열심히 배워서 면서기나 하면 된다는 식이었던 것. 아랫탑골에서 자기보다 공부를 못 하던 친구들이 중학교복을 차려 입고 으스대는 모습과 달리 논바닥에 서 있는 자신을 보니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영훈 학생은 어쨌든 중학교를 가야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일구월심 어린 나이에도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각오로 드디어 가출을 결심한다. 1946년 당시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신작로를 오가는 장작마차와 트럭뿐일 때였다. 

장작마차는 서울의 생활 연료인 장작을 만들어 실어 나르는 운송수단이었으며 산들이 많은 곳이라 사람들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패서 장작으로 만들어 내다 팔았는데 주로 옛날에 '시구문밖'이라 불린 지금의 신당동까지 가서 팔았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교통수단이 전혀 없어 6, 70리 길을 두발로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고 탑골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송파까지 걸어서 똑딱선을 타고 한강을 거슬러 뚝섬까지 가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가는 방법과, 또 하나 천호동을 거쳐 광장동까지 가서 자동차로 갈아타고 동대문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수중에 돈이 없는 영훈은 일단 가출을 결심한 후 고민 끝에 장작마차가 저녁에 떠나는 것을 알고 디-데이를 잡아 어느 날, 밤이 이슥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식구들 몰래 집을 나섰다. 집을 떠난다는 불안감이나 아버지의 꾸중 보다 반드시 중학교에 가야겠다는 열망이 더 컸기 때문에 망설임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회고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1946년 9월 16일밤, 밤이 깊어 어두워진 신작로는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고 마차바퀴 소리와 소의 숨소리뿐, 사방은 고요하기 짝이 없는데 어린 소년은 마차꾼과도 대화 한마디 없이 그저 묵묵히 마차 곁을 따라 밤길을 걷다보니 자정이 지나자 동쪽 하늘에 푸른빛을 띤 하현달이 떠올랐고 어느덧 장작마차는 천호대교를 건너 신당동에 도착을 했다. 밤을 새워 걸으면서도 피곤함은 몰랐으나 배가 몹시 고파 마차꾼과 같이 해장국을 허겁지겁 퍼 먹다가, "아 ~ 이게 가출이란거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아, 열다섯 살, 집 나온 소년은 하염없는 슬픔을 처음 맛보게 된다. 그러나 저러나 서울에 유일하게 아는 곳이란 초등학교 4학년 때 한번 가 본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에 있는 외갓집뿐인데 종일을 헤매다 겨우 찾았다. 그러나 신학기가 3월이 아니라 9월이라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차선책으로 우선 동인중학원이란 학원의 시험을 거쳐 보결입학을 통해 경신중학교 2학년 편입시험에 어렵게 합격, 시골 소년 정영훈은 꿈에도 그리던 중학생이 된다.

급히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 몰래 한번만 도와주면 혼자 힘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약속을 해서 어렵게 입학금 2천5백환을 얻어 오긴 했지만 숙식은 외가에서 해결하리란 믿음과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외삼촌이 가출 사실을 알고 나서는 부모 몰래 집을 나온 천하의 못된 놈으로 인식하고 화를 내는 바람에 외가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날벼락이었으나 학비 조달을 위해 간신히 신문배급소를 찾아가 거기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신문 뭉치를 한아름 안고 정릉에서 미아리와 장위동까지 신문을 돌리려면 3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도 여전히 학비가 부족하여 돈을 벌기 위해 성냥이나 여성 화장품용 크림을 팔기도 하며 몇 푼이라도 손에 돈이 들어오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 건 닥치는 대로 했다.

그 시절 평생 가슴 아프게 겪은 한 맺힌 사연도 있었다. 혜화동 어느 대문 큰 집에서여느 때와 같이 초인종을 눌렀더니 갈래머리 여학생이 문을 열기에 "저는 고학생입니다. 성냥 좀 사주시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여학생 얼굴이 순식간에 확 달라지며 "손님이 오신 줄 알았더니 별게 다 와서 대문을 두드려!" 하며 대문을 쾅 닫고 들어 가버린 일이었다. 그는 그 때의 모멸감을 일생 잊지 못하고 살았고 그때가 영원히 머리 한 곳에 감돌아 같은 또래의 여학생에게 입은 깊은 상처와 창피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했다. 초라한 모습으로 비까지 맞으며 발걸음을 돌리던 옛 일을 회상하면 언제고 문득 떠오를 때마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두고두고 물밀듯이 밀려왔다. 또 날씨가 더운 계절에는 서빙고에서 사 온 얼음을 잔뜩 깨어 넣고, 소금을 뿌려 섞어 응집을 시킨 후 우유, 설탕, 레몬 가루를 물과 섞은 후 두 겹 양철통 안통을 돌려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토요일엔 한 통, 일요일에는 두 통을 만들어 돈암동 시장에 가서 팔기도 했다.

2학년 1학기가 끝나가는 1947년 12월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신문배달을 같이 하던 선배가 서울대학 병원에 가면 X-레이 찍은 폐 필름을 싸게 파는데 돈벌이가 된다고 같이 해보자고 권했다. 원남동 서울대 병원서 옛날에 찍은 X-레이 필름을 더 이상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되자 싸게 팔아 이를 사와서 양잿물에 넣어 검은색을 녹여 투명하게 만들어 파스곽을 만드는 재료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음화필름을 녹이려고 독한 양잿물에 손을 오래 담근 탓에 손등과 손가락의 관절 부분이 부어올라 피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통증이 너무나 심해 신문배달 업무를 못 하게 되어 보급소장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받은 대목에서는, 시골서 서울에 유학 온 같은 처지의 필자로서도 향토 장학금이 넉넉하진 않았어도 저렇지는 않았는데, 참으로 너무 처참했구나 하는 마음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양잿물 사건 이후 신학기가 되어 3학년이 되자 경신중학교에 각 학년별로 전체에서 1등을 하면 다음 학기는 학비 전액을 면제하는 새로운 장학제도가 생겼다. 그 공고를 보자 장사를 해가며 고학을 하는 것보다 수석 장학금 쪽이 낫겠다 싶어 신문 배달만 계속하고 코피를 흘려가며 공부를 했지만 너무나 힘든 장사에 비하면 공부쯤이야 별 것 아니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1948년 9월, 3학년 1학기에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장학증서를 받아 들자 두 해 전 야밤에 장작마차를 따라 몰래 떠나온 집으로 가려니 그 전에는 없었던 매주 토요일에만 운행하는 돌마면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생겼단다. 그러나 고물차라 가다가 서거나 승객이 밀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아예 중간에서 걸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동대문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어렵게 찾아간 고향집이었으나 너무나 반가워 들고 있던 바가지를 떨어뜨리고 얼싸안는 어머니와는 달리, 들일을 마치고 저녁 무렵 귀가한 아버지는 땅바닥에 삽을 메어치며 "제 집 싫다고 나갈 땐 언제고 왜 돌아왔냐?"며 당장 도로 나가라고 버럭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말려도 공부를 계속하겠냐?"고 묻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하겠다"고 물러서지 않자 드디어 아버지는 "내가졌다."며 "앞으로 먹을 쌀은 대줄테니 집에도 자주 오너라." 하며 물러섰고 그 후로는 신문배달도 그만 두고 거처도 아버지의 허락 덕분에 외가로 옮길 수 있었다. 가출한지 만 2년이 되던 1948년 9월이었다. 학제가 바뀌어 경신도 중학교 3년에 고등학교 3년으로 개편됐다. 드디어 1954년 사립명문 연희대학(延熙大學) 법과에 입학하는 영광을 안게 되고 장학금도 받게 된다. 1954년 이전까지 대학생이라곤 한 명도 없던 고향마을에서 그간 '호로 자식'이니 '몹쓸 녀석'으로 취급받던 정영훈은 아주 대견하고 영광스런 청년으로 칭송을 받게 된다.

1957년 연희대와 세브란스가 합쳐 연세대학교로 개칭되어 용재(庸齋) 백낙준(白樂濬/1899~1985) 박사가 초대 총장을 맡아, 대한민국 헌법을 초안한 법학자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고려대 총장과 함께 양대 사학의 라이벌로 쌍벽을 이루던 시절, 정영훈은 연세대 초대 총학생회장에 직선제로 당선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총학생회장 경력은 그의 인생과 생애에 획기적인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필자가 첨 만났을 때도 정영훈 하면 늘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란 수식어가 뒤따랐다. 젊은 시절 그 어떤 캐리어 보다 그가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 졸업 후 사회활동 중에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는 건 스스로의 자랑일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큰 명성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1958년 2월 28일 연세대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학업을 마치고 그해 7급으로 공무원이 됐고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1등으로 수료하고 1962년 사무관 시험에 합격, 1963년 교통부 관광계장으로 승진했다. 이어 1964년 8월에는 안경모(安京模) 장관 비서관으로 발탁됐고 관광국 기획과장, 1967년에는 해운국 기획과장을 맡아 해운과 항만정책을 세우고 지방해운국을 통솔하며 전국 14개 항만의 부두운영에 관한 감독에 열중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항만운영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지방 해운국 직원이 항만에 들어가려면 세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웃지 못 할 일이 다반사였다. 중요한 부두는 모두 세관에서 보세구역으로 설정하여 해운관계 직원은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었던 것. 그의 지혜롭고 끈질긴 추진과 노력으로 항만의 운영과 관리권을 지방해운국이 가지게 되어 항만운영관리업무를 일원화 하는 업적을 남겨 그간 불편을 겪던 화주와 선사의 불편을 해소하는 위업을 남겼다.

부산항 운영을 정상화 시킨 뒤 1969년 인천지방해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1970년 수로국장을 거쳐 드디어 1971년 4월에 정영훈은 우리 해운사상 약관 38세의 최연소 교통부 해운국장이란 대망의 벼슬자리에 오른다. 용선을 포함한 총선복량이 322척 882,000G/T으로 일본 1개 선사 보유 선대에도 못 미치던 시절이었다. 해운의 중요성은 강조됐으나 민족자본이 형성되지 못했고 정부 정책의지도 해운진흥을 위한 계획이 확고하지 않았으며 해외에서 선박 도입을 하려해도 관세율이 턱없이 높아 엄두를 못 내던 때였다. 그는 우선 영세한 한국해운을 보호하기 위해 해운진흥법상의 웨이버(Waiver/국적선불취항증명서) 제도를 국제관례에도 어긋나는 악법이라며 항의하는 일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해운협정을 지연시켜 가며 존속시키는 데 주력했다. 웨이버라면 필자가 한국해운협회로 옮겨 실무 책임을 맡았던 업무라 영원히 함께 하는 젊은 시절의 추억 많은 제도라 가슴 철렁인다.

또 선박도입 때 관세율이 선령 10년 미만은 선가의 5%, 10~20년은 선가의 10%였는데 선령 10년 미만은 면제하고 10년 이상은 3%로 감면케 재무부 근무 연세대 인맥을 동원하여 관세법을 개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밖에 국비로 양성한 우수한 해기사들이 일본으로 송출되어 일본은 운항기술이 앞서 가는데 반해 한국선박에는 실력과 경험이 부족한 단기 양성과정의 해기 인력이 승선함으로써 해난사고가 잦은 점을 들어 교통부 고시로 선원송출을 금지시켰다. 해외 선원 송출업체들이 외화가득을 막는다고 강력하게 반발, 대내외적으로 압력과 모략을 받기도 했다. 특히 해군참모총장 출신으로 해운공사 사장을 역임한 이맹기(李孟基) 제독이 운영하는 코리아라인(KLC)의 불만이 심했고 나중에 국적선사로 전환하는 계기도 됐다.

필자가 한국전력과 상공부 외청 등을 커버하다 김현옥(金玄鈺) 서울시장과 이택규(李宅珪) 관세청장을 거쳐 교통부로 출입처를 옮겼던 때였다. 그는 특히 자금이 부족한 우리 해운회사들이 손쉽게 선박을 도입할 수 없어 5년 이내에 국적을 한국적으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우선 나용선을 도입해서 한국선주가 운항하도록 이를 정부가 적극 지원하고 용선 선박을 국적선박 범주에 넣어 국적선이용 촉진제도인 웨이버제도상 한국화물 수송 자격을 부여하여 국적선으로 인정하게 하는 제도를 정착시킨 업적을 가장 큰 공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늘 자찬도 일삼았다. 이어 관광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불려가 다시 해운국장 명찰을 달고 가서 해운진흥방안을 브리핑하자 국가 예산 3조원에 해운투자 9천억원을 제시한 선박 도입을 극구 반대하던 태완선(太完善) 부총리도 고개를 끄덕였고 수석비서관으로부터 결재서류를 건네받아 박대통령이 희(熙)자 사인을 멋지게 하던 모습을 훗날 가장 영광스런 추억으로 회상했다.

정영훈은 직업 관리로선 최고위 직인 기획관리실장을 끝으로 관복을 벗고 퇴임했다. 신설 해운항만청 창립을 추진하면서 청장 직을 희망했으나 국군보안사령관 출신 강창성의 낙하산에 밀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학에서 관광학 강의, 88서울올림픽 준비위부본부장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992년 정계에 진출하여 제14대와 1996년 15대에 걸쳐 경기 하남시·광주군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당 정책조정위원장, 국제협력위원장 등 의정 활동에도 적극성을 보였고 의원 외교로 IPU(국제의회연맹) 한국대표로도 크게 활약했으나 그의 정치철학 빙공영사(憑公營私)하는 정치인이 되지 않으려 했다는 한마디로 의정활동은 집약된다. 또 더불어 살자는 기치아래 병원 자원봉사에 이어 장학재단 하광(河廣)장학회 이사장을 지내며 1,1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녹조, 홍조근정훈장과 체육훈장 맹호장과 연세대 동문회가 주는 '자랑스런 연세인상'을 받았고 모교 행정대학원의 행정학 석사학위, 미국 루이스관광호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지 워싱턴대학 행정경영대학원에서 수학도 했다. 2000년 6월 부인인 문태정(文泰廷) 여사의 폐암을 알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를 탈당과 동시에 모든 공직을 다 내 놓고 병간호에만 전념했고 미국 휴스턴의 MD엔더슨캔서센터병원까지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4년 만에 별세하고 말아 "아내와 정치생명을 동시에 잃는 쓰라린 경험을, 순간의 잘 못된 선택으로 본인의 일생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은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는 회고집 마지막 부분을 읽고 20대와 30대에 해운이란 한 마당에서 만났던 '정영훈 해운국장'을 다시 회상하며 2011년 4월 19일 향년 78세로 타계하지 않고 생존했다면 50년 전 반세기 그 시절을 함께 유쾌하게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더욱 아쉬움이 크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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