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항행 끝내고 영면한 耕海 金鐘吉
지구별 항행 끝내고 영면한 耕海 金鐘吉

항해학(한국해양대/항해학과 제13기)을 전공한 해기사 출신으로 그간 해양분야에서 남달리 실무와 논리를 겸해 선원선박국장, 해운국장, 부산지방청장 등 본선의 해상직원 문제와 해운물류 행정 분야의 관계 요직을 두루 거치고 뒤늦게는 학창시절 꿈꿔 왔던 문필가의 길로 들어서 수필문학가로 등단하여 활동, 퇴임후 8순을 넘어 한국 해운 및 물류 항만계의 원로 반열에 오른 '경해(耕海) 김종길(金鐘吉)' 해운 원로가 지난 2022년 2월 22일 별세했다는 비보를 보름이 지난 뒤에야, 그것도 뒤늦게 간접적으로 우연히 전해 듣고 너무나 뜻밖이라 필자는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애니콜이란 닉으로, 불러서 마시든지 불려가서 마시든지, 아니면 우연히라도 누구든 만나면 개구일성이 "술 한잔 합시다"가 상투적 구호인 필자가 코로나 때문에 오래 전에 보고 한참 소식이 끊겼던 전 양해해운 최영후(崔榮厚) 사장과 흥아해운 최문흠(崔文欽) 사장, 그리고 대산청장과 케이엘넷 사장을 지내고 현재 해항회에 재직 중인 박정천(朴正天) 상근부회장 등 옛 동지 네명이 모처럼 인사동 골목서 회동, 자리에 앉자마자 "김종길 청장께서 돌아가셨다" 해서 자초지종을 물으니 한림병원에 시신을 기증하고 별세 후 열흘이 지난 뒤에나 지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라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철저히 함구했다가 뒤늦게 가족들이 타계 소식을 전해 알게 됐다는 후문이었다.

그간 필자와 가끔 만나면 곧은 선비형의 기품 그대로, 꼭 할 얘기와 옛 관직시절의 추억에 남는 업무 수행시의 에피소드와 자작글 이야기와 PEN클럽 활동 상황 등을 전하는 게 고작이고 주로 필자가 화제를, 그것도 약간 부풀려서 이런 저런 세상 얘기와 함께 해운계 소식을 나누곤 했었다. 그리고 근년들어 특이한 현상이라면 옛 추억어린 업무 수행 이야기를 겸해 자녀와 손주들 자랑이 조금 잦았던 것 같긴 했고 바깥 활동을 하기엔 힘이 부쳐 안양 주변만 맴돈단 얘기는 더러 했었다. 2020년 11월 13일 한국해대2기 KCTC 신태범(愼泰範) 회장과 정연세(鄭然世) 전 해운항만청장과의 모처럼 롯데호텔 오찬시에 연락책 필자가 12기 이윤수(李允洙) 전 부회장과 함께 김종길 국장을 불러 식사 후 환담 자리에서 그냥 건강이 썩 좋지는 않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코로나 창궐 후에도 2021년 7월 7일엔 필자가 옛 관세청 출입기자 시절부터 알게 돼 50년이 넘은, 경해의 한국해대 졸업 동기, 울산의 대동관세사무소 김동수(金東洙) 박사(울산포럼대표)의 상경시에 23기 성용경(成龍慶) 후배와 함께 자리했을 때도 별 탈이 없어 보였고 그후 10월 22일에도 신태범 회장실에서 15기 지홍식(池弘植) 남성해상 사장과 함께 식사 후 환담자리에서도 거동이 활발하지는 않았으나 무거운 입 탓도 있지만 근력이 부친단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작년 가을부터는 외출은 꺼려해도 궁금한 일이 있으면 자주 전화로 장돌뱅이로 나돌며 쏘다니는 필자에게 이것 저것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왔고 지루할 정도로 장시간 전화하기를 거듭했었다.

그러던 작년 12월 7일께 상태가 좋지는 않아 보여 이상하게는 생각해도 상태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일로 필자와 통화중 대 선배 1기생 한국해사문제연구소 박현규(朴鉉奎) 이사장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재서 약속을 했으나 당일 아침 약속 시간에 모습을 안보여 여러차례 전화 시도 끝에 겨우 통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해서 우리끼리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아마 그때가 마지막 길에 접어든 매우 어려웠던 고비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박 이사장을 이승에서 마지막 보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어 더욱 안타깝다. 여하간 필자로선 개인적인 친소관계를 떠나 한국해운계 또 하나의 귀중한 별이 지고 말았단 생각에 계속 가슴이 찡하기만 하다.

평소 해운계 인사 그 누구를 만나도, 자칭 한국해대 16.5기(?) 필자는 한국해대의 조커 기수이기 때문에 싱글 기수뿐만 아니라 13기도 모두가 동기라며 우스개를 시작하기에 김국장을 만나도 13기 얘기만 나오면 구자완(具滋完), 김석기(金石祈), 김태관(金泰灌), 노병호(盧炳昊), 이윤우(李潤雨), 이진풍(李振豊), 임경호(林敬浩), 임원규(林元圭), 함영명(咸泳明), 허진구(許璡九), 현정춘(玄正春), 홍원유(洪源裕), 황석갑(黃錫甲), 황흥석(黃興錫), 김동수, 도정만(都丁萬), 조찬호(趙燦昊) 등등을 줄줄이 외며 누구는 어느 조직에서, 누구는 무슨 일로 알게 됐고, 어떤 일을 함께 하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이야기 보따리를 꺼내면 끝이 없던 일들이 이젠 모두 추억의 뒤안길로 묻혀 버리고 말았단 생각으로 가슴이 아프다.

그의 수필집, '人生은 지구별 航行이다' 제하의 수상록에서 경해 김종길은, "지구는 하늘의 수십억 별들 중 하나이고 인생은 지구별 항행으로 영겁(永劫)에서 보면 수유(須臾)에 불과하며 그 항행이 끝나면 영혼은 영겁 세계로 떠나고 자신의 영혼이 머무를 별나라는 어디 있을까"를 자문하는 글을 썼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먼 훗날 그 시대에 그 사람이 그렇게 세상을 살았구나"란 흔적만이라도 남기려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막사발 속살 드러내듯 작품을 썼다"고 했던 그의 말처럼 김 국장이자 또 김 청장이기도 한 그는 이승에서의 삶의 마지막을 접고 지금은 자신의 영혼이 어떤 별을 만나 영원한 휴식을 취하며 영면에 들었을까, 평소 자주 만나고 통화하며 그의 문학 세계를 익히 엿본 필자는 얼마전의 생시 모습이 너무나 선명히 떠올라 긴 항행을 마치고 그가 어느 별에 닻을 내렸는지 몹시 궁금하다.

실은 관리로서의 경해는 해운이란 한 지붕 밑에서 활동했지만 맡은 보직상 업무 현장에서 필자와 맞부딪혔던 경우는 드물었다. 퇴임 후 2011년 그가 수필가, 문필가로 등단 후 활동할 때 주로 해운전문지 지상에 글을 발표했던 때부터고 주옥같은 작품들을 모아 1917년께 해양수필 '저녁노을 바라보며'란 이름으로 단행집을 발간한 뒤부터로 기억된다. 그는 "내가 누구일까?" 하는 회의와, 더하여 겨울들판에 홀로 서성거리듯 외로움이 밀려와 지나온 삶을 한 번쯤 성찰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붓을 들었고,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자신을 부풀릴 수밖에 없어 수필을 선택했다며 마음의 얼굴이란 일념으로 순간순간 상념들을 붓가는대로 썼다고 밝혔다. 그는 백자처럼 상큼하진 못하지만 막사발이 속살을 드러내듯 소탈하게 쓰고 싶었다고 희수에 작품을 낸 감회를 소상히 밝힌 심경이 필자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문학 장르중 가장 독자들 가슴에 부담없이 다가오는 분야가 에세이이기에 국민수필가 피천득(皮千得)선생이 수필은 청자의 연적(硯滴)에 난이요 학이요,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 했듯이 경해 그의 작품마다 행간을 가로 지르는 간결한 문체가 한눈에 들고 해운계에서 다양하게 겪은 체험이나 경력 만큼 버라이어티하게 짙은 삶의 향기가 곳곳에 묻어나는 주옥같은 저서란 생각이 들었다. 필자 역시 조금 늦지만 반세기가 넘게 먼발치서나마 해양이니 해운의 울타리서 작가와 한솥밥을 먹었기에 작품 한줄 한줄이 모두 낯익어 공감 부분이 많아 더욱 감동적이었고 관료이기 전 학자요 수필가로 인류 미래의 삶터 바다를 갈아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의 '경해(耕海)'란 필명을 즐겨 썼다.

글쓰기 전문 작가나 직업 문필가들이야 늦은 나이에도 작품이나 저서를 내는 경우가 많지만 여든 다섯 나이이도 불구, 또 '내 삶의 순간순간들'이란 단행본을 내고 필자에게 일독을 권하는 책자를 우편으로 보냈을 때는 저자의 문학을 향한 열정을 누구보다도 익히 알고 있는 필자로서도 오로지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따름이었다. 제목이 말해주듯 첩첩이 감추어져 있던 삶의 순간순간과 살아온 기억의 편린들을 저자 특유의 필치로 곱게 나비어 삶의 향기가 듬뿍 묻어나는 간결한 문장들과 눈길을 접하니 마치 고즈넉한 산사나 오솔길 풀섶에 저자와 마주 앉아 정담을 나누듯 소박하고 순수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한편 글월의 행간에서 연륜의 돋보임을 공유하게 되고 경해만의 외길, 삶의 심연 속에 묻혀 있던 추억의 실타래를 펼쳐 보이며 늘 동화 속 할아버지가 자장가를 곁들인 속삭임이나 귀엣말을 전하듯 독자들의 흉금을 보듬고 토닥였다. 특히 경해는 자기 글을 필자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상당히 신경쓰며 작가의 다양한 체험과 경력에 걸맞는 짙은 문향이 곳곳에 묻어났고 한편 글월 모두가 읽는 이의 자기 얘기같은 탄산수로 상큼하게 다가왔다. 특히 주옥같은 작품들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4계로 나누어 실었고 그중 '경애하는 수녀님께' 는 86세로 선종한 데레사 말가리다 수녀에게 "영원한 빛과 안식을 주시옵소서"하며 위령기도를 드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017년 '내 나이 望九'란 글에서는 81세에 이르러 90세를 바라보며 가파른 아홉계단을 더 올라 가려니 막막하다고 전제하며 눈은 아물거리고 귀는 먹먹하고 정신은 혼미하다고 했다. 앞으로 허리는 꾸부정하고 걸음걸이는 휘뚝거릴 노추의 자신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고 썼던 그는 그 경지에 이르기 전에 미리 지인들에게 작별인사 한마디 못 전하고 훌쩍 떠난 같아 더욱 안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해 김종길 고인이 필자에게 전해온 얘기 중에는 그간 써 온 글들을 모아 서간집도 한권 발간하려 했는데 힘이 달려 이를 접고 "서간집 발간을 포기하다니! 참 아쉽구나!!" 하는 글을 써 보내줬던 게 진하게 기억에 남는다.

내용은 며느리에게 그 안타까움을 전하는 심경을 글로 쓴 내용이었는데 요약하면 '어미에게'로 시작하여 "2016년부터 지금까지 5년간 너희들이 보낸 이메일은 지우지 않고 컴퓨터에 담아두었다. 500편이 넘었다. 답장들을 합치면 무려 1,000편이 훨씬 넘었다. 그것들을 읽는데 꼬박 열흘이 더 걸렸다. 2016년 전엔, 메일들을 프린트해서 파일로 보관했다. 표지에 <영국통신>이라 기재된 것이 5권, 뒤를 이어 <미국통신>이 3권이었다."가 그가 적은 문장의 첫 단이었다. <중략> "다슬아! 네가 보고파서 필라델피아까지 왔다. 교장선생님이 네가 최우등생이라고 칭찬하시더라." "할아버지! 고마워. 교장선생님을 만나주셔서 나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워. 할아버지 사랑해"

<중략>"나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편지』와 『할아버지와 손녀들과의 이메일』을 서간집으로 발간하려고 계획했다. 소재가 희귀하여 우리 국문학사에 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일 14권과 컴퓨터에 담아둔 천 편 이상의 이메일을 정리하여 서간집으로 발간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늦었다. 정신력과 체력이 소진되어 불가능하다. 하여 서간집 무늬만이라고 남겨두고자 어미 너에게 이 글을 썼다.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구나! 고생하는 너와 귀여운 손녀들을 남겨두고 떠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절여온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는데 어찌하랴! 어미 네가 힘이 부쳐서 헤쳐갈 수 없을 때 하느님께 “왜 저를 이토록 버려두시나이까”라고 불평불만을 털어놓아라. 하느님께서 너를 도와주실 것이다." 로 마친 이글이 마지막이 될 줄을 필자는 전혀 몰랐다.

경해 김종길, 그는 1937년 7월 9일, 지리산에 등을 기대고 섬진강을 가슴에 품고 노량 바다를 딛고 서있어 풍광이 아름다운 경남 하동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독립운동을 하던 할머니를 정성껏 모셔 효부상을 받기도 한 어머니와 연산군이 부관참시한 정필재 김종직의 후손이란 자부심을 버팀목으로 세상을 산다고 술회했다. 호남 수재들이 모인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연스런 면학 분위기 속에서 '학행일치(學行一致)'란 교훈을 인생의 표지석 삼아 장준한 교장선생을 비롯한 실력과 철학을 갖춘 은사 모두를 존경한다고 했다. 고교시절인데도 영어 부교재로 모조지에 필경을 해서 햄릿을 배웠고 미술사, 논증기하, 현대·고대국어, 서양사 등을 공부한 게 인생의 자양분이 됐다는 고교시절에 필자는 정말 놀랐다.

졸업 후 당시 모교 교사들은 대부분 대학교수가 됐고 동기생들은 정치, 경제, 문화, 학계, 의료, 관료, 군무 등 각 분야에서 동량이 됐다고 했다. 기울기 시작한 집안 사정으로 하는 수 없이 국비로 부담이 적은 한국해양대학으로 진학을 하게 된다. 단체생활과 상급생들의 기합은 대학의 자유와 낭만을 빼앗아 우울과 무기력할 때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1961년 한국해양대학교 항해학과 제13기로 졸업했으나 전공과목 보다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 전신) 출신으로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신성모(申性模/1891~1960) 학장의 강의와 저명 인사들의 특강을 즐겨 경청했다는 것. 4학년 승선실습 때 세관 감시원이 선원들을 죄인처럼 다루고 뒷거래를 하는 것이 못 마땅해 하선, 절간에 들어가 학교 강의에서 접할 수 없는 정치원론, 경제원론, 사회학, 심리학, 행정법을 익혔고 홍진기(洪璡基) 해무청장이 해사행정을 일원화시킨 탁월한 행정가라고 소개해서 줄곧 신 학장같은 삶을 사는 게 학창 시절의 꿈이었다고 회고했다.

졸업 후 탈 배가 없어 5.16 혁명정부의 공무원 공채모집에 응시, 1964년에 교통부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관계에 첫발을 디뎠다. 백선엽(白善燁) 교통부장관, 박경원(朴慶元) 내무부장관 시절인 1970년 12월 15일 탑승자 338명 중 323명이 수장된 국내 최대 해난사고 '남영호 침몰'때 제주해운국 해무과장을 지냈고 이어 노르웨이해운아카데미에 유학하는 행운을 잡고 해운시황, 용선계약, 해운중계, 해상보험, 국제협약을 흥미롭게 공부했다. 주요 보직을 보면 1982년에는 해운항만청 선원선박국장, 1985년에는 인천지방해운항만청장, 1988년에는 마산지방청장 및 항무국장, 1989년 운영국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91년에는 부산지방청장, 1993년의 해운국장을 끝으로 관복을 벗고 1994년부터 6년간은 산하단체, 인천항부두관리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특히 선원선박국장 시절에는 해양계 출신 마도로스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해상안전 문제를 주무국장으로서의 소명으로 삼고 국제해사기구(IMO)가 빈번한 대형 유류오염사고에 대비하여 적극 추진했던 국제해상오염방지협약(MARPOL)과 선원훈련자격당직협약(STCW)을 비준 수락하고 이에 맞춰 선원법과 선박직원법을 전면 개정한 일을 자랑했다. 또 선원들의 재교육을 위해 부산에 해기연수원을 설립하는 등 선원과 선박정책의 전환기를 이룩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 한국선급(KR)에 IMO사무국을 설치하여 관련 협약을 번역 출간하고 이어 IMO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켜 대 IMO활동을 궤도에 올린 일에 큰 보람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그는 또 직업공무원으로는 당시 최초로 소련에 입국하여 IMO와 소련정부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오데사 세미나에 참석한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지만 1983년 9월 1일 06시 24분 소련군부가 사할린 상공에서 KAL기에 미사일을 발사하여 269명이 희생되어 동서냉전이 극한으로 치닫던 때를 전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1983년과 1985년 세미나 자료를 번역하여 'IMO 해사안전관리'와 '항만안전관리'를 출간하여 IMO 활동과 소련해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업적에 큰 긍지를 갖는다고 했다. 선주협회 실무를 맡았던 필자에게도 큰 추억으로 남지만 1983년 10월 인도 선주협회장을 역임한IMCO(IMO)의 스리바스타바(Srivatava) 사무총장이 방한하여 박건석(朴建碩) 한국선주협회장 일행과 오찬을 끝낸 후 청와대로 가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방문했던 일을 자주 회자시켰다.

부산청장 재임시절 부산항이 부산시민들에게는 시민 세금으로 건설한 도로가 항만물동량이 도로 파손은 물론 교통량을 증폭시켜 시민들의 통행이 위협받고 있으며 또 항만이 친수공간을 차단하고 있다고 부신시가 여론몰이를 할 때 방송 플레이를 통해 부산지역 소득의 1/3이 항만에서 창출된다는 반전 여론으로 역전시켜 시민 93%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결과를 큰 업적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해운국장으로 부임해서는 한/중, 한/네덜란드, 한/EU 등 해운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반면에 1993년 10월에 위도/격포간의 서해페리호가 전복되어 292명이 사망하는 대형사고를 맞자 뒷 수습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느라 지친 심신을 휴식시키기 위해 떠나야 할 때에는 떠난다는 생각으로 명예퇴직을 신청하여 3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퇴임 후 현직 때 못 했던 일본 해운을 배우려 준비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 인천항부두관리공사를 맡으라는 권유에 따라 이를 수락하고 8부두 하역을 하겠다고 임직원을 잔뜩 뽑아 놨는데 하역업체의 반대로 무산되자 목포항 석탄부두를 인수했으나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됐다고 회상했다. 직원급료를 못 줄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나서 경비요금을 인상하고 과감하게 구조를 조정하여 5년간 100억원을 적립해 놓고 떠났다고 자랑했다. 그밖에도 평소 해운행정을 하면서 해운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 해운항만청의 의뢰를 받아 '선박행정의 변천사'를 항만청 관료였던 박경현(朴慶鉉/한국해대 항해학과 11기) 선배와 공동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늘 그는 지금 대면하는 사실들이 훗날 사실(史實)이 된다고 생각하며 공직자로 재직 때 보고 듣고 체험했던 사건들을 국내외 국외, 소련괴 노르웨이 기행 등을 63개 항목으로 엮어 '되돌아본 해운계의 史實'을 발간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경해가 남긴 기록 중 손꼽을 공적은 오늘의 한국해운을 건설한 해운인 100명 정도의 발자취를 추적하면 현대해운사의 공식 비공식 숨은 이야기까지 캐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영예로운 海運人들'을 발간하여 해운계의 인물사를 남긴 일이다. 그러나 체력의 한계를 느껴 더 이상 50명으로 일단 마감하고 더 잇지 못한 걸 몹씨 애석해 했다. 어느날 필자를 불러 나머지 50명을 더 해야할텐데 이 바톤을 이을 사람은 "서대남 당신뿐"이라며 간곡히 부탁했으나, 나름 하는 일도 있고 감당이 어려워 이어받지 못 한 게 퍽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해기사들의 긍지와 영예를 드높일 수 있는 '해기사 명예의 전당'이 부산 영도 태종대공원에 건립된 일을 큰 보람으로 여겼다. 또 2007년 모교 광주고등학교로부터 받은 명예로운 '光高人賞'과 2012년에 한국해대가 시상한 '자랑스러운 海大人賞' 을 받은 일과 한국해운물류학회의 '해사문화상'을 국가훈장 '홍조근정훈장'보다도 더 값지다고 자랑스럽게 밝힌바 있다. 그리고 학창시절 한국PEN 클럽을 최초에 이끈 모윤숙(毛允淑) 시인을 흠모해온 경해는 2017년 5월 2일, 65년만에 젊은 날의 동경이 성취되어 국제PEN클럽 회원이 된 것을 크게 자랑스럽고 크나큰 영광이라고 했다. "경해 김종길 원로님, 지금은 어느 별에 계시는지 모르나 궁금한 게 있으면 옛 처럼 주저하지 마시고 언제나 전화주세요!!"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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