造船 용광로에 불을 붙여 세계 1등 조선국을 만든 朴正熙 대통령과 申東植의 첫 만남
造船 용광로에 불을 붙여 세계 1등 조선국을 만든 朴正熙 대통령과 申東植의 첫 만남

 

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배를 짓는 한국의 조선산업이 근년 들어 부침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올 들어 부동의 세계 제1위를 다시 탈환했다. 바다의 지게꾼 한국의 해상운송세력은 세계 제7위, 국제교역을 통한 무역 규모는 세계 7위에 이어 1인당 국내 총생산액도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국가 중 6위에 오르고 군사력 또한 세계 6위다. 세계 5대 원유 수입국이기도 하지만 세계 5대 공업국에 올라있다. 경제력 순위도 2018년 10위권 진입에서 2019년에는 12위로 밀려났다가 2020년 다시 10위권으로 올라섰다. 무엇 보다 1964년 UNCTAD(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 출범 이후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로 성장하여 UN의 만장일치 합의 아래 선진국으로 인정받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56년만의 첫 사례가 된 것도 가히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세계 10위권의 올림픽 성적을 비롯하여 FIFA 월드컵 연속 본선 출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과 더불어 LPGA 세계 골프대회 최 다수 우승, 그리고 BTS(방탄소년단)의 빌보드 차트 제패, 넷플릭스 석권, 그리고 영화 분야별 아카데미 수상 등등 다방면에 걸쳐 우리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니 기초교육을 194~50년대에 받은 필자 같은 80대 시니어들에겐 참으로 작금의 우리나라 한국이 너무나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산업 디멘션 구분으로는 제2차 산업, 즉 제조업으로서 제3차 산업 해상운송이란 서비스업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육상에서 배를 지어 진수만 하면 바다를 산업기반으로 하는 우리 해운과는 '바늘과 실' 이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배를 짓는 산업은 세계 일등 금메달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개인적으로 한국 조선업계 불멸의 성좌로 우뚝 선 전설적 인물 신동식(申東植/1932~) 박사도 배쟁이로는 전 세계를 아우르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상천하 세계 제1위다.

1946년 8월 22일 서울대학교 발족으로 조선공학과(현재의 조선해양공학과)라는 조선 분야 인재 양성 기관이 태어난 것은 우리나라 현대 조선산업 발전사의 중요한 전기가 됐다. 그러나 사실상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중공업 발전에 올인 하기 전까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그 어떤 통치자도 조선산업 육성에 큰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 질곡의 세월을 거치면서 서울대학, 한국해양대학 등을 비롯하여 바다와 관련된 고등 교육기관이 설립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비로소 바다 개척을 위한 국가 차원의 시스템을 갖추고 인재를 양성하여 배출하게 되었다. 뒤늦게나마 배출된 인재들은 선박설계사, 해기사 등등 바다를 개척하는 새로운 직업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세계로 진출하여 대한민국을 오늘날 세계 최고의 조선국과 세계 7위의 해운강국을 만드는 주춧돌이 되었고 해양진출을 위한 배 짓기 산업 분야에서는 불멸의 신동식이 혜성처럼 빛나고 있다.

99.7%가 해상운송을 통해 이루어지는 무역업이 해운업의 선행지표이듯 선박을 만들어 공급하는 조선업은 이를 수요로 하는 해운업이 그 선행 지표가 되어 무역, 운송, 조선이 3위1체로 맞물려 잘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번에는 문득 때맞춰 '영원한 조선인'이란 닉으로 그야말로 한국 조선업을 대표하며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고 있는 (주)한국해사기술(KOMAC) 회장 신동식 박사를 확대율 높은 고성능 현미경으로 조명해 보기로 한 것이다. 조선분야라면 한국조선학회와 조선공업협회, 조선공업협동조함, 한국선급(KR), 한국해운협회, 한국해운조합, 그리고 대한조선공사, 현대·삼성·대우조선을 비롯한 대형 조선소와 중소형 조선소, 조선기자재 협동조합 등을 통해 필자가 일선에서 활동하던 1960년대 이후부터 현장 취재를 통해 만난인물이 많았었다.

그러나 조선공학도 출신으로 국가를 디자인하는 청와대에 들어가 담대하게 폭넓은 경륜을 펼친 사람은 신동식 박사가 처음이다. 바로 그로부터 전설이 시작된다. 신동식, 그는 지금까지 극지의 두꺼운 얼음을 세차게 부수고 전진하는, 자신이 건조 감리한 쇄빙 연구선 아라온(Araon)호 같은 개척적인 삶을 살아온 인물이기에, 이름하여 한국 조선업계에 우뚝 선 큰 별이며 기둥이요 오로지 외길로 영원한 현역 리베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 필자로선 더욱 존경하는 마음과 경외심을 떨칠 수가 없다. 신 박사의 일대기 '날아라 더 높이, 대한민국 조선'이란 방대한 자서전을 집필한 해운전문기자 출신 '선박뉴스(Korea Ship News)' 매거진의 정호인(鄭鎬仁) 발행인은 그의 저서에서 "한마디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감히 그에게 'Mr Ice-Breaker'라 칭한다. 그는 항상 남보다 늘 앞서 갔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Mr First-Mover'였다. 그는 지금도 변함없이 무수히 많은 접촉점을 가지고 남보다 앞서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개척하고 있다. 올해 91세로 아직까지 현역에 종사하고 있는 신동식의 생애는 우리 조선이 나아갈 방향을 함축적으로 가리키는 전위적인 선각자요 리더"라고 평가했다. 또 "역사에서 가정과 단정은 부질없는 일이라 치더라도 그때 그 시절 박정희(朴正熙/1917~1979) 대통령과 신 박사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 현대 조선 산업이 오늘날처럼 꽃 피울 수 있었을까?"라며 정호인 대기자는 정면으로 반문했다. 힘들었던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 초창기에 두 사람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대한민국의 황량한 벌판에 맨주먹으로 오늘을 내다보며 굳건한 주춧돌을 놓았다."고 술회했다.

신동식이 기안한 『대규모 조선소 건설 추진 기본 방안』은, 이제 비록 누렇게 빛바랜 종잇장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은 대한민국 현대 조선 산업 태동의 생생한 출생신고서로 지금도 그의 가슴 속에 살아있으며 그의 열정으로 대한민국 현대 조선산업의 금자탑을 이룬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것이라 했다. 한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천체물리학자인 옛 도쿄대학 교수 고시바 마사토시(小紫昌俊/1926~2020) 박사의 "우리는 화려했던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미래의 기억으로 다시 만나야 합니다.”라는 충고처럼 신동식도 "젊은 세대는 항상 현재 이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며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우리에겐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라고 역설하며 지금도 '바다와 미래와 세계로'를 강조하는 신 박사는 조선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1932년생이니 91세다. 그는 6.25 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산 피난 시절에 미국 군함을 봤다. 미국 군함이 싣고 온 군수물자와 구호품을 검수하는 체커(checker) 보직을 받은 19세 청년 신동식은 거대한 수송함에서 탱크와 군인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놀란 그는 자기도 저런 배를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이 용솟음쳤다. 뜻한 바대로 서울대학 조선공학과에 입학하여 변변한 교재도 없이 수석 졸업은 했으나 한국에서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 편지를 보내 간신히 유럽 최고의 조선소인 스웨덴 코쿰의 설계부 엔지니어로 채용 되는 기회를 잡았다. 항공편과 숙소와 개인 오피스를 제공받기는 했으나 경험 부족으로 도저히 현장 업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졸들이 기술을 익히는 기능공 양성소에 들어가 12주간의 빡센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은 후 영국 진출이 가능했다. 찰머스와 더럼 공과대학원에서 공부를 더하고 스웨덴의 조선소에서 받은 교육과 경험을 밑천으로 세계 최고의 조선 선진국인 영국에서 최고의 선급협회인 로이드(Lloyd's Register)에서 국제선박검사관이란 영광스런 직책을 부여 받았다. 로이드 본부에서 첫 한국인 국제선박검사관으로 일하면서 작은 섬나라 영국이 어떻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전하고 세력을 키웠을까가 궁금했다. 그래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의 깊은 의미와 함께 영국 발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젊은 그 시절을 회상했다.

특히 그때 경제기획원장관에 임명된 김유택(金裕澤) 주영 대사로부터 '구미 시골에서 태어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우리는 반드시 바다를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한 해양개발 관심사를 전해 들었고 아울러 한국을 해양국가로 만들기 위한 인물을 찾고 있다고도 들었다. 그리고 로이드 소속 일본 근무 시 일본을 지나던 박정희를 만나 귀국을 종용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곳에서의 전문지식 습득을 위해 미국으로 진출하여 미국선급협회(American Bureau of Shipping)에서 한국인 최초의 검사관을 역임하고 있을 때였다. 1962년 뉴욕 월도프 아스트리아 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서 존슨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와 미국선급 ABS 검사관으로 근무하던 신동식이 다시 만나게 된다.

"대한민국 조선을 살리시오. 우리나라는 삼 면이 바다잖소!" 한 사람이 조선 혁명을 제의하자 즉각 혁명 동지가 된 또 한 사람 신동식이 "실패할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로 화답하여 부러진 두 조각의 칼을 맞추어 부자(父子)지간을 확인한 주몽(朱蒙)과 유리(楢璃)의 설화를 연상케 하는 한 편의 의기투합 드라마가 잠자는 대한민국 조선산업을 깨우는 불씨가 되었다. 신동식은 존슨 대통령이 내준 전용기를 타고 박 대통령과 함께 급거 귀국했다. 불과 32세의 신동식에게 박정희는 '신국보(申國寶)'라는 칭호를 붙여주며 막중한 과제를 맡겼다. 1965년, 경제학자나 경제 각료가 아닌, 우리나라 최초의 청와대 경제수석 자리를 임명 받은 젊은 선박 설계사는 양철 한 조각을 만들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감히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짓겠다는 꿈을 가지고 과감한 도전장을 던지게 된다.

그 밖에도 또 장관급의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과 경제과학심의회의 사무총장 등의 고위직을 거치며 조선에서 시작하여 제철, 석유화학, 기계, 전자산업의 기초적 발전 계획을 수립하는 6년 간의 공직 생활을 계속했다. 그간 경제기획원 건물에 각 부처에서 파견된 50여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한국 해사행정을 실질적으로 통괄하고 계획하는 '신동식 군단'이 탄생하여 조선발전계획과 해운수산발전 계획 및 모든 항만·해사 관련 계획을 수립했다. 수립한 계획은 심의위에서 토론을 거쳐 관련 관련 부처 장관들과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으며 수차례 수정을 거친 후 확정 계획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일이 젊은 신동식의 몫이었다.

1969년 6월, 그가 수석비서관 시절, 대통령 영애 자격으로 성심여고생 박근혜(朴槿惠)와 함께 대한석유공사의 합작회사 걸프가 발주, 일본 미쓰비시(三菱)가 건조한 32만 톤 급의 당시 세계 최대 유조선 '유니버스 코리아'호 명명식에 참석했다. 일선 취재기자 시절에 당시 뉴스를 필자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극동해운 남궁련(南宮鍊) 사장이 조선공사를 인수하여 옥포조선소를 계획할 당시, 신동식은 공직에서 물러나 필자도 한때 근무한 적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운 전문 정보지 코리아쉬핑가제트(KSG)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후 조선공사 해외담당 사장으로 부름을 받고 재소집 되기도 했다. 건설부와 협력하여 전국을 누비며 새로운 조선소가 자리 잡을 적지를 물색, 거제 옥포 지역에 조공의 제2조선소를 건설하고 아울러 삼성을 설득하여 지세포에 조선소를 세울 계획을 진행시켰다.

한편 같은 때 울산에는 현대조선소를 세우는 계획도 함께 진행되었다. 이때 조선에 경험이 없는 기업인들은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조선사업에 손을 대기를 주저했다. 결국 남궁련 사장과 정주영(鄭周泳) 현대중공업 회장만이 대형조선소 계획에 참여하고 삼성의 이병철(李秉喆) 회장은 망설임 끝에 초기엔 불참했고 지세포는 대신 고려원양 이학수(李學洙) 회장이 맡음으로써 비로소 대형 조선소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러나 조선공사 옥포조선소는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 회장이 맡아 지금의 대우조선해양이 되었고 삼성중공업은 1974년 8월에 탄생했다. 1977년 삼성조선이 설립되고 같은 해 대성중공업을 인수하여 흔히 일컫는, 현대·삼성·대우의 '조선빅3'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신동식은 대한조선공사 기술고문으로 조공 정상화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경제기획원장관 기술고문으로 활약하면서 제1,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중 해사 부문을 담당, 해사산업발전 종합계획을 수립하며 최초의 엔지니어 출신 대통령 초대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경제와 산업기반이 없던 어려운 시기에 조선을 포함한 여러 핵심 산업분야의 정책 수립과 중화학공업, 과학기술, 경제 분야를 두루 넘나들며 헌신했다. 기업인으로서 정주영이 현대중공업이란 세계 1위 조선사를 창업하고 키워 역사적 유산으로 남긴 '현재완료형' 인물이라면 신동식은 지금 이 순간도 선박 디자인을 손에서 놓지 않는 '현재 진행형' 인물로 평가 받는다. 정 회장 역시 전경련 회장 시절 산업정보요원과의 미팅이나 울산의 선박 진수식에서 뵙던 옛 모습이 초창기 현대상선 역사와 함께 오버랩된다.

애송이 청년 신동식은 대통령 민정비서관에 임명된 후 초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 기획원에 신설된 외자도입위원회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공직을 접고 나서 여러 관련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의 러브콜과 스카웃 제의를 뿌리치고 당시 경영이 어렵던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 이를 50년째 경영하고 있다. 컨테이너선 같은 기본 화물 운송 선박부터 시작하여 쇄빙선, 심해탐사선, 친환경 선박 등 특수선에 이르기까지 2000 여종의 선박을 설계하는 놀라운 실력을 보였다. 오늘날 우리 조선이 쌓아 올린 금자탑은 박대통령의 불타듯 강력한 조선 입국 의지와, 정부 관계자들과 조선 전문가들, 그리고 저돌적으로 뛰어든 기업인들, 헌신적으로 몸 바친 현장 기술자들이 함께 이룩한 영광의 산물이라고 신 박사는 6~70년대를 회고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칭찬에 대해 "다만 그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저는. 그리고 그때는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나라에 힘을 보태야 할 사람이 필요하던 때였습니다. 저의 조그마한 힘이 나라를 일으키는데 이바지했다는 것은 그때 그 시절의 산업전사였다면 누구나 죽기 살기로 몸 바쳐 일했을 것이라는 말과 똑 같은 말입니다."로 겸손해 하며 "황량한 들녘에 피어난 들꽃처럼 비바람 서리 맞으며 견뎌 온 인고의 삶, 처절하게 가난했던 상황에서 조선입국으로 대 변혁을 이룬 배쟁이들, 그대들은 코리아의 희망이요 등불이다. 그대들 앞에 영광의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오, 저 찬란한 미래의 역사는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 후배들이여, 역사를 통해 선배들이 무엇에 열정을 바쳤고 무엇에 고뇌했으며 무엇을 남겨 주려고 노력했던가를 들어보라"고 눈물겹게 감격적인 옛 추억을 회상했다..

이에 15세기 세계의 바다를 개척한 서양에 못지않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해양강국을 이룩하기 위해 몸을 던진 바보 같은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영원한 배쟁이, 한국 조선업의 영원한 상징적 인물, 신동식 박사를 우러르다 문득 필자는 옛 다산(茶山)과 황상(黃裳)이 나눈, 풀을 뽑고 바람으로 우러른다던 '발초첨풍(撥草瞻風)'이란 고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또 신동식 박사는 자신의 조선 인생을 회고하며, '비이장목(飛耳長目)'. 하늘을 더 높이 날고 귀를 열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멀리 앞을 내다 보자며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볼 수 있다고 했던 리처드 바크(Richard Bach)의 『갈매기의 꿈』의 주인공 조나탄 리빙스턴(Jonathan Livingston) 처럼, 귀와 눈을 닫지 말고 "높이, 높이, 더 높이 날자!"고 소리없는 함성과 울부짖음으로 후배들에게 외친다.

후배 조선인들에게 "월급봉투 두께보다 더 소중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땅의 조선 산업을 지켜내자"고 강조하며 "그 책무는 우리의 시대적 소명"이라고 역설한다. 이어 글로벌 시대를 맞아 큰 일을 내고 도발하고 도전하며 땀을 즐기고 생각의 틀을 바꾸어 별을 따올 생각으로 화성에 가서, 달나라에 가서 배를 지을 생각을 하라고 독려했다. 미래의 조선업은 조선공학의 기초 위에 우주공학, 4차혁명산업, 나아가 생명공학과도 손을 잡아야하며 문사철로 상징 되는 인문학과 조선공학을 접목시키고 인간공학을 융합시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공감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그곳은 바로 우리 조선이 끝나는 지점이라고 못 박으며 미래지향적 조선업 앞날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그동안 "우리나라 조선산업의 산 증인이며 살아있는 역사란 분에 넘치는 과찬을 들어왔지만 젊은 시절에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결과 세계 어디를 가도 일등 조선국, 일등 조선인으로 가슴 펴고 다닌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불사르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우리 조선인들이 앞으로 100년 후에 벌일 찬란한 미래의 축제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미리 한 아름 안고 간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 밖에도 신 박사는 『한국조선산업의 발전』주제로 전국 20여 개 대학의 조선공학과를 순방하는 대학 특강 순례에도 힘썼다. 또 세계 일등 조선국으로 현재 바다에 떠다니는 5만 톤 이상 선박의 85%가 '메이드 인 코리아'이며 명품 핸드백처럼,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해운사들이 한국 아닌 다른 국가에서 건조한 선박을 운항할 경우는 "쪽팔려 한다"는 우스개도 빈 말은 아닌 것 같아 필자도 흐뭇하다.

그래서 신동식은 로이드 250주년과 ABS 150주년 창립 기념식에서도 '조선산업의 아버지(Father of Shipbuilding)'로 스크린 이벤트로 칭송과 함께 기립박수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국내 빅3 업체는 호화 유람선, 쇄빙선, 드릴쉽 석유시추플랜트 등 고부가가치 선박으로 중국의 저가 공세 등을 뿌리치고 그동안 쌓은 노하우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약진을 계속하고 있다. 클락슨 리서치에 따르면 올 1분기 전 세계 발주량 920만CGT 중 457만CGT를 한국이 수주, 386만CGT를 차지한 중국을 제치고 각각 50%와 42%로 1위를 고수했다. 따라서 올 3월 한 달 수출액이 전년 비 18.2%가 증가한 634억8천만달러로 무역 사상 최고치를 달성하는 등 해송 물량 증가에 힘입어 보유선박 1,033척 4,845만CGT, 7,490만DWT에 달하는 한국의 해운 세력도 작년의 400억 달러를 기점으로 운임 수입이 점차 늘어날 전망으로 기대된다.

한편 "앞으로도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되풀이되겠지만 조선산업은 인류 역사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내다보는 신 박사를 두고 정 기자는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가가 아니다. 나는 기자다. 기자는 사실을 전한다. 기자가 쓰는 전기의 가치는 주인공을 미화하는 데 있지 않고 팩트를 기록하는데 있다."고 밝히며 『영원한 조선인 신동식』이란 역작을 시작하면서 "나의 불면의 밤은 시작되었고 그를 안 순간부터 흥미 있는 취재 대상이었다. 나는 단순한 개인 기록 이상의 사료적 가치가 있는 그의 일대기를 남기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고 전하면서 우리 조선이 장대하게 발전해 온 역사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우리나라 조선 산업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싶은 바람의 절반의 성공은 달성했다고 필자에게 귀띔했다.

<편집위원 서대남(徐大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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