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대에 나란히 접안하고 있는 '한바다'와 '한나라호'
한국해대에 나란히 접안하고 있는 '한바다'와 '한나라호'

 

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며칠 전 뒤늦게, 한국해대의 '한국해양대학교 실습선 75년사 -《바다에 남긴 자취》' 발간 소식을 듣고 급히 이를 구해 표지에 실린 1947~2022와 실습선 '한바다'와 '한나라'호 사진을 보고, 문득 그 해가 몇 년도쯤이었던가, 1970년대 초반 팔자에도 없는 한국선주협회(현재 한국해운협회)의 해무부장이란 직책을 맡은 이래 해기 면장 없는 짝퉁 해기사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평생이 넘게 살아온 회한이 다시 울컥 가슴을 자멱질 했다. 해운계로 밥벌이를 옮긴 후 느닷없이 짝퉁으로 해기사 노릇마저 해야 하는 운명이 닥쳐 우선 승선 경력부터 쌓으려고 울며 겨자 먹기로 어느 추운 겨울날 어둑히 해 질 무렵 바로 저 '한바다호'를 타고 부산항을 출항했던 기억과 이를 전후하여 얽히고 설킨 수많은 사연들이 노안의 시야에 아롱지고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며 만감이 교차했다.

경제기획원(EPB)에 들렀다가 담당 직원들이 "돈이 없는데 무슨 배를 만들어" , "당장 집어치우라고 해"라는 볼멘 소리를 우연히 엿듣고 앞서 60년대 초에 한국해대 방문시 신입생 정원이 항해·기관 각 50명이란 브리핑을 듣다가 즉석에서 각 100명씩으로 늘리라고 지시했던, 바로 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이때도 즉석에서 대일청구권자금에서 350만달러 배정을 하명하자 1975년 5월 23일, 일본 규슈의 우스키(臼杵) 조선소에서 기공식을 갖고, 선명(船名) 결정 교수회의에서 배병태(裵炳泰/항해과 7기) 교수가 제안하여 채택된, 실습선 '한바다호'에 첫 승선을 했던 시절, 문자 그대로 필자로서는 처녀항해(Maiden Voyage)로 난생 처음으로 배를 탔던 그때의 항정(航程)이 추억의 파노라마가 되어 눈앞에 아련히 떠오르며 전개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본보(SNN) 창간 이래 10여 년간, 횡설수설 황혼연설 삼아 이 얘기 저 얘기를 110여 회 넘게 에세이 형식 컬럼으로 써 오다가 이번에는 필자 최초의 승선 이야기를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한번 적어볼까 한다. 김현옥(金玄鈺) 서울시장, 이택규(李宅珪)관세청장에 이어 마지막 김신(金信) 교통부 장관을 끝으로, 당시 주요한(朱耀翰/대한해운공사사장) 한국해운협회장(한국선주협회)의 스카웃 제의에 못이겨 졸지에 종이쟁이(?)를 접고 당시 협회 조사부장을 맡아 해운업계로 밥벌이를 옮긴 것 까지는 좋았는데 몇 년을 손에 익은 조사, 홍보부서 근무를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본선과 해상업무를 담당하는 해무부장으로, 필자에겐 천지개벽 같은 디비에이션을 해야만 하는 인사 발령이 내렸다. 유능한 선기장 출신이 맡아야 제격인 선박, 선원, 해상업무를 필자 전공 분야와 거리가 먼데다가 또 육상 근무 해기사 출신을 두고도 강제로 이를 문외한에게 떠맡기니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했는데 알고서도 어려운, 바다에 배를 띄워 돈벌이를 하는 해상운송 기업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이 되는 본선 자체에 대한 지식이나 이를 운용하는 승선 요원들의 교육 훈련 및 선박과 선원에 관련되는 각종 운항술 그리고 관련 법령 및 안전문제와 산박보험문제, 그리고 국제 항로에서의 제반 협약의 이해와 대책 수립은 물론 당시 강성 산별노조의 하나인 선원노동조합을 상대로 사용자 측의 노사대책 수립과 시행 등 제목만 보고도 머리에 쥐가 나는 업무 분야를 맡으라니 감당이 불감당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실무에 밝은 해양계 선장출신과 1, 2등 항해사 등 예하 직원들의 도움으로 겨우 부서장 업무를 관장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우선 본선과 선체에 관한 메커니즘적 지식과 운항술의 숙지가 절실히 필요한데 고작 낙동강 나룻배 한 두번, 창경원 보트 몇 번 타 본 게 승선경력의 전부인 필자가, 그것도 도약단계로 접어들어 해운 선진국을 지향하는 우리나라 외항해운의 유일한 해운단체의 기술을 겸한 전문부서 해무부장직을 맡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소가 웃을 일이었다. 업계나 주무 당국 그 누가 봐도 비아냥과 입방아 대상이 되기에 안성마춤이란 자격지심과 자괴감이 앞섰다. 하기는 생화 같은 조화 - 조화 같은 생화? 진품 보다 더 진품처럼 고가 판매되는 가짜 상품이 판을 치며 성행하듯 사람도 무늬만 그럴듯 했지 속 빈 강정이나 허울 좋은 개살구가 많기도 한 게 세상사이기도 했던 시절에 필자가 바로 그꼴이었었던 것 같다.

출신이나 신분을 고의로 속이지는 않더라도 심지어 배우자를 찾는 결혼을 위한 맞선 자리에서도 자기 스펙이나 몸값을 과대 포장하여 결국은 큰 소동을 빚거나 들통이 나서 사기꾼으로 몰리는 사례를 적잖게 보고 듣기도 하던 때였다. 요즘에도 취업이나 선거판에서 더러 가짜 학위로 학력을 속이거나 소위 명문대학 졸업을 사칭하여 물의를 빚기도 하고 각종 자격증이나 면허증을 위조했다가 매스컴 보도를 통해 진상이 밝혀져 망신을 당하는 사례가 자주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던 때였고 지금도 그런 류가 다반사이긴 하다. 심지어 그 시절 아주 큰 화제로는 국립 명문대학에 응시하여 불합격이 되고도 합격을 했다고 소문을 내고 심지어 학부모나 클래스 메이트를 속이다 끝내 들통이 난 일이 빈번하기도 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지금도 생각나는 한 가짜 학생은 수재들만 모이는 모 대학 무슨 과에 매일 등교를 하고 강의 시간에도 열성을 보이자 출석율도 좋고 품행도 우수하고 보니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학과 대표로 선출되는 바람에 학적을 조회하는 과정에서 응시는 했으나 낙방했던 가짜 학생임이 밝혀져 매스컴의 토픽으로 떠 올랐고 매 신학기마다 심심찮은 화제였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그리고 물품의 진위나 신분 및 자격을 속이는유사한 가짜 사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긴 하다. 따라서 유사품? 모조품? 근사품? 대용품? 이미테이션? 듀플리케이션? 돌팔이? 그리고 근년에맹위를 떨치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유행하고 있는 '짝퉁'은 국어사전에는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영어로는 'Fake' 또는 'Imitation'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면 이는 정품이나 진품을 최고로 치는 보석류나 유명 브랜드 혹은 귀중품이나 명품의 세계에만 따라 다니며 판을 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케이스를 찾아보면 어느 때고 어디에고 무엇에나 다 있을법하며 심지어 우리 사람 중에서도 그 유사한 케이스나 종류를 발견할 수도 있을지 생각해 봄직도 하다면, 이 필자가 바로 그런 케이스에 해당됨 직하다. 해운계 출입기자를 하며 취재 과정을 통해 취득한 수박 겉핥기식 알량한 단어나 어위 몇 개를 가지고 어찌 해운업이란 망망대해를 헤쳐 나갈까 걱정이 태산같아 그저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고무 새총 쏘기도 서투른 필자에게 LMG나 박격포를 안겼으니 어디를 당겨야 발사가 되는지 알길이 없는 형국이었다. 그 순간은 지금도 아찔하고 소름 끼친다.

때는 5.16 후, 단계적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70년대를 맞자 급속히 늘어나는 수출신장에 따라 원자재와 완제품을 실어 나를 우리의 외항선복이 부쩍 늘어나는 데다가 안전과 오염문제를 중요시하는 국제해운시장도 UN이 주관하는 국제해사기구, IMCO(IMO전신) 와 ILO(국제노동기구) 등 세계해운총독부(?) 가 등장하던 삼엄한 때였다. 소위 해운의 남북문제와 동서문제가 격돌하게 되며 이익충돌을 일으키던 때라 STCW(선원의 교육훈련·자격증 및 당직에 관한 표준)를 비롯해서 SAR(해상인명구조), MARPOL(해상오염방지협햑), CORLEG(국제해상충돌예방규칙), GMDSS(세계해상조난안전제도), PSC(항만국통제) 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각종 국제협약이나 규칙이 헤아릴 수도 없이 쏟아지던 때라 이를 조속 입수 파악해야만 했다.

바로 회원 선사 담당자들을 불러 대책을 수립, 당시 해운항만청(KMPA) 담당 주무국과 함께 우리나라의 입장을 전달하고 런던의 IMO나 ISF(국제해운연맹) 총회에도 참석해야만 했디. 그러다 보니 짧은 바지 입고 긴 대님 못 맨다 했고 도둑질도 배워야 한다고 했기에 좌학 삼아 대학입시나 행정고시라도 준비하듯 해양계 대학인 한국해대와 목포해대의 교과목과 칼리큐럼 전반에 걸쳐 제목만이라도 익히려 머리띠 두르고 밤새워 독학을 해야만 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듯, 진골 해기사들 어깨 너머로 힘써 공부를 함과 동시에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했으니 해기사라면 육해상 근무 그 누구에게나 모르는 것은 물어 배우기에 온 정성을 쏟으며 업계는 물론 관계나 학계의 해기사 인맥도 보학(譜學) 삼아 샅샅이 익히기에 전력을 다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돌팔이 의사가 메스를 쥐고 수술환자 앞에서 당황하듯 선박과 선원에 관한 숱한 당면문제를 놓고 긴장하며 현안 문제를 두고 제 앞을 가리지 못하면서도 혼쭐나게 수삼년을 짝퉁 해기사로 근무하다 보니 드디어 꾀도 생기고 요령도 늘어갔다. 끝내는 반풍수가 지관인양 행세하는 비법을 터득하게 되고 드디어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듯 진짜 해기사가 된듯 완전히 그쪽 족보(?)에 등재된 편입생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해운계 출입 취재 시절 미리 익힌 낯도 많거니와 당시 내로라 하는 업계 원로나 양개 대학 싱글 기수들도 다수 알던 터라 소속을 함께 하고 그들과 같이 주요 정책 입안에 참여하다 보니 선박, 선원, 영업, 법령,국제문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실무적으로 깊숙히 개입하는 계기가 됐다.

승선 근무를 끝내고 육상 근무를 시작, 협회가 소집하는 각종 회의나 기타 민원업무 처리차 사무국을 찾는 해기사 출신 주니어들은 필자 해무부장이 체어맨이 되고 보니 짝퉁인 필자가 정규 해기사 출신인 줄 알고 "어디 몇 기(期)이십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는 머뭇거리지 않고 한결같이 모범 답안이 준비되어 있었다. 첫번째 답은 "저는 와일드 카드, 조커 기수입니다"였고 또 "한국해대는 16.5기, 목포해대는 8.5기 상당입니다", 에 이어 "1942년 1월생이니까 가상 입학년도 오차한계를 고려 차별화한 유일한 소숫점 기수랍니다"로 답하며 웃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친히 지내는 시니어급 후배들은 필자더러 16.5기를 들먹이며 유쾌하게 파안대소하는 게 노년의 큰 자랑이요 보람이다.

여하간 당시는 늘어나는 선복량을 충족시킬 해상직원의 교육과 양성이 수요를 따르지 못 해 협회 의결기구, 해무위원회를 열어 회원 선사의 사장과 중역들이 연일 모여 그 대책 마련에 몰두했다. 그 결과 한국해대 단기 해기사 양성 코스인 전수과의 부활, 부산과 인천에 선원학교 신설, 해기연수원 설립과 기능 확충, 해기사 해외취업 억제 등 그 시점에 부족했던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매일 머리를 맞대고 묘안을 찾아 나섰다. 이 순간도 실무 심부름꾼으로 종횡무진 쏘다니던 기억은 감회가 새롭다. 특히 잊혀지지 않는 일은 한국해대 연습선 한바다호 운영 지원을 위해 정부와 학계, 업계 고위층이 어렵게 출범시킨 '실습선 후원회'의 실무 책임을 맡아 최재수(崔在洙) 전무이사와 함께 한국내 입출항하는 5,000G/T 이상 선박은 무조건 20,000원씩을 강제 징수키로 하고 필자가 직무규정에도 없는 악명 높은 세리(稅吏) 노릇을 했다.

해외취업 외국선사들은 "한국의 국립대학이 해기사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비용의 일부를 외국의 민간 기업에 떠맡기는 부담은 한국정부의 국고를 강제 지원하라는 처사인데 어디 이를 규정한 강제징수 국제 조세법규가 있느냐고 항의했고 대리점들도 합세하여 개인적으로 필자를 공격하며 징수 거부를 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필자도 "이를 이행치 않거나 미납이 누적되는 선사는 해기사 해외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짱을 놓자 심지어 국제법에 의해 소송을 제기하겠다며 항의를 했다. 그러나 당시 해운진흥법이란 우리의 효자 악법(?)에 한국해운협회로부터 웨이버(Waiver/국적선불취항증명서)를 발급받지 않으면 외국적 선박들은 한국항에서 화물을 실을 수 없는 제도가 있어, 이 역시 필자 소관 업무라 이를 징수하는 세리의 갑질(?)도 도움이 됐었던 같다. 나중에는 목포해대도 실습선 '유달호'의 지원을 요청, 함께 지원 대상에 포함시켰던 기억도 생생하다.

게다가 목포해대의 경우는 실습선으로 소화 못하는 학생들을 국적선사에 의뢰하여 분산 실습을 시켜야 했던 어려움과 고충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난관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당시 선사들은 국비로 양성된 완성품(?) 해기사는 선호했지만 비용이 들고 위험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라 선주 부담을 줄이려고 해기사 자격취득의 관건이 되는 승선실습 기회 부여는 도외시했다. 필자는 선사의 해기사 출신 담당 부서장에게 한명이라도 더 태워달라고 애걸복걸했다. 혼신을 다해 눈물겹게 호소하고 애원하던 모습은 지금 돌이켜 봐도 너무나도 처연하고 비참하게 회상된다. 그리고 목포해대 하면 꼭 기억하고 싶은 두 학장, 지금은 작고한 한국해대 기관과 10기 졸업 임정배(任正培) 학장과 역시 기관과 9기 출신 조창희(趙彰熙) 학장 두 분이다.

특히 목해대생 선박통신학과 실습의 경우는 더더구나 힘들어 취업은 차치하고 졸업이나 자격취득 길마저 막히게 되어 학부모들이 필자를 찾아와 처절하게 읍소하며 각개전투로 문전 실습 걸식(?)을 해야했던 기억은 너무나 가슴아픈 처절한 회억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재임시 두 학장은 나란히 몸사리지 않고 실무자처럼 뛰었다, 그리고 이같이 힘드는 일을 맡아 처리해준 해운협회와 선사 보답의 뜻으로 매년 목포의 상징적 명물 세발낙지를 산 채로 바스킷 가득히 담아 와 회원 선사 실습 담당자까지 대회의실에 모아 놓고 왁지지껄 웃음꽃을 피우며 상추, 풋고추와 함께 소줏잔을 곁들여 회식을 하던 소박한 추억은 지금도 주무 담당 필자를 비롯한 그 시절 이에 동참했던 그 누구나의 가슴에도 벅찬 환희로 남는다.

이러던 1980년, 당시 우리나라 외항선복량은 국적선 448척 395만G/T, 국적취득조건부 나용선 82척 120만G/T으로 총 530척 515만G/T에 달해 5.16 당시 관공선을 포함한 전체 총선복량 10만톤의 50배를 웃도는 선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벌크선이 40%를 차지했고 북미와 구주 및 호주항로까지 태극기를 단 한국 선박이 취항하는 본격적인 원양정기항로를 개설하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됐다. 당시 두 해양대학이나 해양고등학교, 부산 및 인천선원학교와 해기연수원 등 해양계 교육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나름대로 정신을 차리고 제법 익숙히 일하던 필자에게 최전무는 또 하나의 큰 과제를 안겼다. 조사 홍보 업무 주특기(MOS)를 팽개치고 해무부장을 맡아 짝퉁치고는 나름대로 행정업무를 익혀 앞뒤를 가리자 이번에는 한 술 더 떠 해운계 전체업무를 관장해야 할 협회 해무부장이 승선경력이 전혀 없어 직무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니 우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보라는 분부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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