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117m, 높이 8.15m, 속력 17.5kts의 6700톤급 최첨단 실습선 《새한바다호 》
길이 117m, 높이 8.15m, 속력 17.5kts의 6700톤급 최첨단 실습선 《새한바다호 》

 

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지금까지 배탄 경력이 전혀 없이 뭍에서만 놀던 해무부장, 이 해가 가기 전에 빨리배를 타고 나가라!"에서부터 시작하여 "돌팔이 신세를 면해 서당개 처럼 풍월이라도읊으려면 우선 배부터 타고 봐야지" 등 신문을 만들다가 출입처와의 인연으로 해운단체로의 이적도 낯설고 물설어 죽을 판인데 갑자기 전문 행정직, 해무부장으로의 졸지 보직 변경도 모자라 끝내는 배를 타고 직접 바다로 나가라니 너무나 기막힌 일이었다. 사다리에 올려놓고 마구 흔들듯, "배탔던 사람들 두고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하는 소리가 입가에 맴돌았지만 그러나 당시 유행했던 시쳇말, "맨땅에 헤딩하기"로  각오하고 조직이 시키는대로 쓴맛(?)을 감수하는 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승선경력자를 두고도 하필이면 필자를 그 자리에 골라 앉힌 까닭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모르는 일이다. 한국 외항해운 이익단체로서의 구심점 역할을 다하며 정부 당국과 업계의 가교 역할을 담당, 해운행정 전반을 총괄하는 해운협회의, 그것도 해양분야 전문 기술직에 속하는 해무부장이 낙동강 나룻배 한두 번 타보고, 창경원 보트 놀이 몇 번 해 본 승선  경력으로는 도저히 맡은 바 업무 수행이 불가하기 때문에 우선 본선 경험을 쌓기 위해 얼치기 해기사라도 되기 위한 첫 걸음으로 배를 타라는 지시를 받고 보니 또 한번 눈앞이 아찔했던 40년 전의 옛 일이지만 뇌리에 생생하다. 

드디어 1981년 12월 12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집권 초기였다. 단 한 번도 업무와 관련하여 상선을 타 본 적이 없어 직무를 수행하느라고 쩔쩔매며 한많고 설움 많았던 짝퉁 해기사 해무부장, 필자가 한국해양대학 제35기 후반기 승선 실습생 200여명에 끼어 배를 타야 했다. 출항 일자가 잡히고 나선 밤마다 배타는 꿈만 꾸다가 끝내는 갑판에 올라 역사적인 처녀 항해(Maiden Voyage), 43일간의 대장정에 올랐다. 날씨마저 을씨년스럽던 겨울철 해질 무렵, 필자로선 평생 처음, 첫 출항을 위해 배에 오르던 감격과 닻을 올리고 뭇 환송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오륙도를 뒤로 남기고 서서히 부산항을 떠나던 기억은 40년이 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 아로 새겨진 두려움과 감회가 새삼 역력히 반추된다.

신민교(辛玟敎/기관 8기) 학장을 비롯한 대학 교직자와 학부모 그리고 시민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어둠에 잠기는 밤바다를 향해 연습선 '한바다호'는 서서히 항해를 시작했다.(위 사진은 필자가 과거 탔던 한바다호가 임무를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대체선 '새한바다호'로 대신). 우선 연습선에 올라 숙식을 해결할 선실을 배정받았다. 나지막한 방이 아담 사이즈 필자에겐 불편이 없었다. 첫 대면은 저녁식사 때 '살롱(Salon)으로 불리는 사관식당에서였다. 선기관장을 중심으로 한 일반 상선과 달리 실습선에는 최상위직 선장과 별도로 '연습감(Commisioner)'이란 승선 교육 직제상 최고위직이 동승하고 이하 선기장을 비롯한 운항라인(Navigation)과 기관라인(Engine) 및 항해중 교육을 총괄하는 '교관장'이란 직책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연습감으로는 민우홍(閔右泓/기관 7기) 교수가 함께 했고 교관장 구홍(具洪/항해15기) 교수는 동승하지 않았다. 사관 식당의 좌석 배열은 필자가 연습감의 맞은 편에 배치되고 이하 연습감 좌측과 필자 우측으로 선장과 기관장에 이어 1, 2, 3등 항해사와 기관사 그리고 선원수첩 없이 열외로 동승한 교수 1명 및 의사 1명도 함께 지정석에서 하루 네 끼 식사를 꼬박 챙기며 한 자리에서 한 솥밥을 열심히 함께 하던 모습이 40년이 흐른 지금에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허일(許逸/항해 15기) 선장과 배종욱(裵鐘旭/기관 22기) 기관장, 유대근(柳大根) 통신장을 비롯하여, 당사자들은 필자를 기억할 이가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도 얼굴이 생생히 떠오르는 곽규석(郭圭錫/항해 28기), 박석주(朴錫柱/항해 28기), 문경만(文慶萬/기관 28기), 김시화(金是和/항해 30기), 이중우(李重雨/항해 31기), 이태우(李太雨/항해 32기) 등 젊은 사관과 그밖에 갑판과 기관 소속 여러 부원들이 함께 타고 갔던 기억도 소상히 재생이 되고 남는다.

한국해대는 1960년 초 대한해운공사(KSC)가 운항하던 낡은 화물선, '김천호(3,081G/T)'를 양수하여 선명을 '반도호'로 고치고 선체를 개조하여 학생 수용시설을 늘려서 실습선으로 활용해 왔었다. 그러나 1937년에 건조된 반도호는 1970년대에 들어서자 선령이 30년이 넘게 된 데다가 화물창을 침실로 개조했기 때문에 하역 중에는 소음이 심했고 통풍과 채광 기능이 열악하여 실습선으로서의 기능이 불가한 상태에 이르렀다. 따라서 신조 계획을 세웠으나 너무나 자금 조달이 어려워 포기상태에 이르렀을 때 마침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특단의 배려로 대일 청구권자급무상분(PAC)으로 예산 확보 길이 트여, 일본의 우스키(臼杵)조선소에서 1975년 7월에, 배병태(裵炳泰/항해과 7기) 교수가 작명한 대망의 '한바다(Hanbada)'를 인수하게 됐던 것.   

전장(LOA) 99.80m, 선폭(Breath) 14.5m, 깊이(Depth)는 주갑판(Main Deck) 7.0m 차량갑판(Shelter deck) 9.5m, 흘수(Draft) 5.21m, 총톤수(Grt) 3,491.77tons, 최대속도(Maximum Speed) 16.556knots, 순항속도(Cruising Speed) 15.00kts, 승선인원(Complement)은 승무원(Crew) 38명, 실습생(Cadet) 174명, 사관(Officer) 16명 등 정원(Total)이 228명에 달하는 3,500톤급의 십습선 한바다호는 당시 수만 톤 급의 대형 상선에 비하면 작았겠지만 길이가 100m에 이르고 보면 필자의 첫 눈에는 대단히 크게 보였고 무엇보다 지독한 길치에 속하는 필자로선 식사 때마다 살롱을 찾는 길에 익숙치 못 해 애를 먹었고 특히 야간의 경우는 매번 수없이 헤맨 부끄러운 기억도 새롭다.

또 당시 협회의 해무부장이란 직책이 해양계 교육기관에서 소정의 좌학과 실습과정을 마친 후 국가로부터 해기사 면허를 취득한 초임 해기사들의 명단을 입수하여 선사에 취업 배정을 하거나 해외 취업과 재교육 문제를 협의 결정하는 보직이었다. 따라서 해무 전반 및 해상직원 관련, 행정적 절차나 사무적인 문제는 실습과장을 맡은 민병언(閔丙彦/항해과 10기) 교수와 이은영(李銀泳) 실습계장이 필자와 함께 참으로 일사분란하게 한 조직처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며 갖가지 업무를 수행했다. 한마디로 참 열심히 했었다. 그러나 이를 큰 보람으로 삼았던 필자로선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졸지에 불우하게 타계한 민 교수의 차분하고 온유하며 조용하게 업무를 처리하던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 너무나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렵사리 필자가 말로만 듣던 선장이란 직책을 가진 인물을 처음 만난 게 허일 교수였기 때문에 40년이 넘은 지금도 그때의 진한 인연으로, 해사 관련 각종 행사나 국내외에서 개인적으로 만나 대포라도 한잔 나누게 되면 어김없이 부르는 호칭, "전설적인 실습선 선장교수 허일"이고, 그때 하선 이후 다시 뵐 기회는 없었지만 늘 기억에 새겨진 엔진 치프로, 주일이면 예배까지 인도하던 배종욱 기관장은 조용하고 인자하며 턱수염을 길렀던 모습이 떠오른다. 막상 배를 타고 보니 해양계 대학을 '상선사관학교'라 일컫듯 평소 선내 교육이나 보행시에 규율이나 위계 질서가 3군 사관학교 생도 이상으로 엄격했었단 기억이다.

식사때나 각종 행사시 좌석 배치 역시 철저하게 군대조직 질서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38선 넘어 최전방에서 하사관학교의 고된 교육과 힘든 훈련을 받으며 육군하사로 군대생활을 하던 현역병 시절이 상기됐다. 필자는 열외였지만 매일 눈에 띄는 광경이 신병 훈련소에 재 입소한 기분이었던 느낌도 회상된다. 총 43일간의 항행 실습계획 기간 중 첫 콜링 포트, 기항 항구는 대만의 키룽(基隆/Keelung)항이었다. 아마 스피드 5~6이나 7~8 낫트 정도로 3~4일간을 항행하는 동안 실습 학생 대다수가 뱃멀미를 하며 심하게 구토를 하고 허둥지둥 헤매다가 끝내 기진맥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막판에는 거의가 드러눕고 말았다. 가히 치열한 전쟁터의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얼굴 표정에서는 승선 경력이 있어 보이는 상당수의 운항 요원들도 단련과 면역은 됐으되 멀미의 고통을 겪는 모습이 역력했다. 심지어 이를 경우를 대비해 동승한 치료 담당 의사마저 고통받는 학생들을 돌보지 못하고 길게 누워버리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것은 어찌된 셈인지 처음 배를 타고 바닷길에 오른 필자만이 유독, 멀미는 커녕 눈도 까딱않고 멀쩡하게 선실과 갑판을 오가는 모습이었다. 

파도가 높아 롤링이나 피칭으로 배가 심히 흔들릴 때에 정신이 멍하긴 했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아 언제쯤 멀미 증상이 나타날지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지만 선원수첩 없이 승선한 세 사람 중 필자만 통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멀쩡했다. 하긴 배 안에서 맡은 직무가 없기도 했고 언제고 편리한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는 보직(?)이긴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멀쩡하게 어설렁거리며 다니는 모습이 스스로도 참으로 놀랄 노짜에 요상하다고 느꼈고 주위에서 쑥덕대는 눈빛을 느끼고 보니 뭔가를 해 낸 같은 자부심이 들기도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듯 어렵게 승선 기화를 잡았으니 선박 구조를 샅샅이 살피고 브릿지에서 키를 잡고 조타 기술도 살펴 익히고 시끄러운 엔진룸에도 여러 차례 들어가 그간 체험하지 못한 선체 내부의 분야별 기능을 열심히 공부하며 메모하는 독학생이 됐었던 기억이다. 때로는 실습생들의 강의실에 들어가 청강을 하며 해기사로서의 좌학 과정과 실습 과정을 동시에 이수하려는 각오가 처연하기도 했으며 한편 대견스러웠다. 원래 먼저 알아야 면장을 하는데 면장이 되고 나서 거꾸로 면장의 지식과 기능을 익히는 과정이 녹녹치 않고 쉽지는 않았으나 그때 얻은 체험이 긴 세월에 버무러져 알량한 지식으로 승화했다는 생각이다.

잘은 몰라도 당시 강성 산별노조, 선원노동조합과 근로조건 개선, 임금인상, 복지문제, 관련법령 개정 등 단체협약 협상 테이블의 카운터 파트인 사용자단체의 실무 책임자 해운협회 해무부장의 승선견학이란 명분이 필자 외 승선 실습생을 비롯한 다른 200여명에겐 어떻게 비쳐지고 평가 됐을까, 아득한 옛 얘기지만 지금도 많이 궁금하다. 실습선을 통해 상선의 근무 상태나 작업환경과 노동강도 등 노사협상 카드로 사용할 현장 파악의 첩보성을 띄고 탔으려니, 모두가 은근히 필자가 엉금엉금 기며 초죽음을 당하는 꼴이나 눈물이 쏙 빠지는 고초라도 겪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해 보였던 건 필자만의 괜한 오해였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비록 본선에 올라 보직 없는 항해를 하긴 난생 처음 경험이지만 그래도 교통부 출입기자 시절부터 그간 10년 이상을 집중적으로 '바다해(海)'와 '배선(船)'에 올인하며 육지에서도 늘 승선 분위기에 젖어 몰입 근무를 한 경력도 바로 도상연습 삼아 승선경력 쌓기에 보탬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짝퉁 치고는 일말의 뱃사람 소질이 있어 보인다고 자위를 하니 쌓아가는 승선경력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착각도 일었다. 그러나 육지와 가족과 떨어진 상태에서 해상근로란 위험성에 노출된 채 황천과 싸우며 대양을 항해하는 일은 참으로 고달픈 노동이란 생각이 들고 하루 당직 근무가 8시간이라지만 배를 타고 있다는 자체가 노동에 속하므로 육상 근무와는 근로시간 수치 개념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연습선이 각 기항지에 입항하게 되면 보통 2박 3일이나 3박 4일 정도를 체류했던 것 같다. 밤낮 없이 계속 하늘과 바다만 보다가 가끔 먼 발치서 지나가는 다른 배를 보거나 조그마한 섬이라도 시야에 들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듯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날 드디어 첫 기항지 키룽항에 입항한다는 소식이다. 첫 도착지의 닻을 내린 후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오른 첫 발은 참으로 신기하고 흥분됐다. 크루즈 여행시 상륙증(Shore Pass)을 발급받아 기항지 투어를 하듯 별도 승선한 열외 일행 셋은 3인조 외인부대를 만들어 키룽항을 돌고 다음 날은 타이페이(臺北)를 갔다. 고궁(故宮)박물관과 장개석(蔣介石)의 중정기념관(中正紀念堂) 등을 둘러봤다. 

지금도 크게 기억되고 인상 깊었던 일은 당시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귀했던 바나나 값이 너무나 저렴해 하루 한 끼는 바나나로 식사를 했던 사실이다. 말로만 듣던 이름도 모를 열대 과일은 우선 보기에 신기했고 향기와 맛도 좋았던 것 같다. 냉장고에 냉동시켜 아이스 바나나를 만들어 먹던 일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러나 배안에서는 항공기와 달리 캘린더를 보고 매일 체크를 않으면 날자 가는 계산이 흐렸다. 그리고 며칠 사이, 서울서 부산으로 내려가 부두를 떠날 땐 섣달의 추운 날씨였는데 키룽항 도착하고부터는 12월인데도 불구하고 더운 날씨가 계속됐다. 

아열대 지역의 더운 날씨 키룽에서 3여일을 보내고 인도양을 거쳐 인도의 콜카타로 향하는 뱃길. 자동차나 비행기는 가다가 자주 쉬지만 한바다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름 정도가 걸려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기억된다. 적도를 지나며 진짜로 실감나는 적도제를 올리기도 하고 드넓은 대양을 가로질러 항행하는 한바다호 갑판 위에 누워 무료함을 달래려 일광욕을 즐기던 생각도 그립다. 가끔 브릿지에 올라 허일 선장과 유대근 통신국장과 우스개를 자주 나누던 때가 회상되기도 한다. 당시 한바다의 통신 시설은 단측파대전송(單側波帶傳送), 즉 SSB(Single Side Band) 시스템으로 가고 오는 목소리가 동시에 이뤄지지 않아, 소위 '오버(Over)' 를 연발하며 통화를 해야 했다.

가끔 유 통신국장은 필자가 집으로 전화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해서 유익했다. 한번은 집으로  전화를 하는데 계속 받지 않아 "여보세요"를 여러번 되풀이 하는 필자 옆에서 이를 엿듣던 허 선장이 "바람났다. 춤추러 갔다"는 농담을 건네며 많이 웃었던 에피소드를 자주 회자한다. 그때 국제전화를 할 때는 상대방과 미리 전화 거는 시간을 정해 놓고 주고 받는 방법이 시간과 요금 절약에 유리하다는 걸 배우는 계기가 됐었던 것 같다. 정확한 날자는 몰라도 키룽항을 출항 1주일쯤 뒤에 한바다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거쳐 콜코타(Kolkata)로 향하는 긴 항해길에 올라 말라카 해협을 통과 후 밤낮 보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어느 새벽녘에 흙탕 강물에 대소변을 보고 그 물에 멱을 감고 쌀 씻어 밥도 한다는 갠지스강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누추한 광경을 직접 보게 되니 너무나 신기하기도 하고 비참한 모습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도 새롭다. 수로를 따라 전진하던 배는 콜카타 인근에 닻을 내렸다. 당시 마더 테레사가 거주하는 곳이라고 누가 귀띔했다. 말로만 듣던 갠지스강과 현지의 주민은 참으로 형언키 어려운 모습들이라 내가 사는 조국이나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케 했다. 콜카타 일원과 도로에 소들이 한가히 거니는 황당한 풍경을 비롯하여 정비되지 않은 무질서한 도로와 흩날리는 쓰레기와 폐지들의 난무, 중앙분리선 없이 마구잡이로 오가는 차랑들의 행렬이 너무나 소름끼치게 황량하고 인상적이었다. 

콜카타 시가지를 오가며 빅토리아 기념관과 성당과 불교 사원 등지를 구경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오로지 3인조가 짝을 지어 붙어 다니며 시가지를 구경했고 곳곳서 함께 간 학생들을 자주 만나 온통 그곳이 한국판이었단 생각이 났었다. 마침 지금 필자가 따로 쓰고 있는 원고,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슬럼독 밀레어네어(Slumdog Millionaire)'의 주무대 '뭄바이(Mumbai)' 빈민가를 연상시켜도 보고 현재는 크게 발전했고, 출장때마다의 뉴델리 시가지를 오버랩시키며 회상의 끈을 이어 본다. 인도 담에는 세번째 항구 미얀마의 양곤(Yangon)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신경써 하는 일 없이 그저 전진하는 한바다와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물결, 그리고 하늘만 쳐다 보노라니 지루하기 보다도 승선한 우리 일행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크게 챙기지 않던 가족과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고 그저 하루 속히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특히 밤바다 위에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면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래서 집떠나 달을 보면 그리움이 샘솟으며 뮤즈를 동반한 시상이 떠올라 누구나가 시선 이태백(李太白)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킬링타임으로 바둑이라면 오목도 못 두기에 지루할 땐 장기라도 두기로 하고 시작한 게 할 일 없이 계속 두다 보니 제법 고수(?) 실력을 갖고 하선한 일이 갑자기 떠오르기도 한다. (계속)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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