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카타를 반환점으로 해서 인도를 떠난 한바다호는 미얀마(Myanmar)와 양곤(Yangon)으로 개명하기 이전의 당시 '버마(Burma)'의 수도 '랑군(Rangoon)'으로 힘차게 출항을 시작했다. 갈 때 보다는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세고 물결도 높아 항해 속도가 느려 지루함이 더했다. 그래도 어떻게 길을 알고 잘도 가는지 며칠 밤을 새고 나니 어느 날 오후에 기항지 도착 낭보가 들렸다. 집으로 가는 귀국길이기도 하고 필자에겐 관심많은 나라 미얀마였기에 하선을 서둘렀다. 당시 양곤항에 입항할 때 기억은, 한바다호 갑판 양편으로 멋들어지게 흰 세일러 유니폼 정장으로 차려 입고 한껏 폼을 낸 실습생들의 도열과 함께 브라스 밴드가 경쾌하고도 우렁차게 신나는 행진곡을 연주하며 서서히 접안을 위해 부두로 다가가던 일이다. 

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배가 부두에 입항하여 접안을 끝낼 때까지의 그 황홀한 장관은 계속 되었고 한바다호 방문을 반기는 시민과 학생, 행인들의 열렬한 환영과 함성에 완전히 매료됐던 필자는 그 장면을 생각의 슬로우 비디오로 회상하며 지금도 전율적 감격과 감동 그리고 가슴 벅찬 환희의 순간으로 그 시절 추억의 여로를 회상하며 눈을 지긋이 감고 회한의 미소를 짓는다. 이어 현재 기억으로는 하선을 끝낸 해대 실습생 일행이 5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양곤 시가지를 주행할 때에는 차량경호 치고는 최상급인, 소위 '제차정지(諸車停止)' 명령이 시달되어 폴리스 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국가원수급(?) 방문의 예우를 받았었던 기분으로 회상된다.

실습생을 실은 버스가 지나갈 땐 모든 도로의 차량이 일단 정지상태 후, 우리 차를 통과시킨 뒤에 떠나는 놀라운 대우를 해주니 그저 황홀하기만 했었다. 또 미얀마에서의 가장 큰 기억은 온 국민이 가장 신성시한다는 황금색 불교 사원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를 관람하고 그 웅장함과 미려함에 정신이 홀렸던 일이다. 신발을 벗고 참배를 한 일, 그밖 여기 저기 사원이 많았던 기억과 그리고 당시 아웅산 장군의 묘지를 탐방했을 때에는 시각적으로 이렇게 초라한 곳을 왜 참배해야 하는지 궁금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식민지 역사가 길었던 탓도 있지만 더운 날씨 때문에 모든 국민이 게을러 먹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하지 않는다는 얘기, 외세 문화 유입 배척 국민성 하며 특히 일본 기모노식의 전통 의상, 론지(Longyi)를 입고 맨발로 다니는 미개인 같이 보였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곳 양곤이 필자에게 일생 가장 감명 깊었던 해외 여행지로 기억되는 일은 따로 있다.  모교 교우회 주선으로 필자가 양곤에 입항한다는 소식을 접수하고,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이계철(李啓哲) 초대 대사가 술 한잔 마실 곳도 없이 건조한 사회주의 국가인 미얀마 양곤에서, 드물게 대사관저로 필자를 초청한 일이었다. 3인조 외인부대 한국해대 불문과 황을문(黃乙文) 교수와 의무관을 대동하고 관저에 도착하니 이 대사와 참사관들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게다가 뜻밖에 KOTRA 초대 무역관장으로 부임 후 짐도 채 풀지 않았다는 같은 과 교우 장소웅(張昭雄) 관장이 얼굴을 내민 그날밤은 한결 더 분위기가 고조되고 취기를 돋웠던 이국적인 잊지 못 할 영원한 추억으로 회상된다. 

대사관저에서 통금없는 긴 밤을 지새우며 술잔을 기울이던 생각과, 머나 먼 남쪽 나라 야자수 풍경과 달빛 밝은 정원에서 십자성을 바라보며 부어라 마셔라 하며 포효했던 목가적 낭만과 추억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외인부대끼리만 랑군대학을 방문하여 캠퍼스 전역을 두루 돌아보고 남여 학생들과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고 돌아올 땐 무역관 차량편으로 귀가를 희망하는 여대생들과 함께 장소를 옮겨 긴 이야기를 나누며 양국간 우의(?)를 다진 일도 추억의 책 갈피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어 가끔은 그때가 무척 생각난다. 그 앳된 여대생들도 아마 이젠 족히 환갑은 지났으리란 생각을 하니 그 시절 이 추억 또한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또 다른 긴 상념과 함께 만감이 교차하는 서글픈 회억의 하나로 남는 사연도 있다. 해양대 실습선이 다녀간 다음해 1983년 10. 9일에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공식 방문시 아웅산 묘지 참배시간에, 북한 소행으로 밝혀진 테러사건으로 대통령의 공식 비공식의 고위직  수행원 17명이 사망했고 당일 이 행사에 참석했던 이 대사도 순직한 일이었다. 그때 희생된 고인들에게 다시 한번 삼가 명복을 빈다. 그리고 항해 중 앞서 언급했듯이 대양에서 항행을 계속하다 보면 오로지 도착 목적지 외에는 관심이 없고 또 시야나 주위 환경에 변화가 없어 그날이 그날 같고 세월이 오는 건지 가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갑판에 올라가면 시야에 가리는 게 아무것이 없는데다가 언제고 해와 달과 별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먼저 밤낮 없이 보면서도 항해 중에는 시간 개념이 흐려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가운데 당일 기분에 따라 시간은 빠른 같기도, 느린 같기도 했다. 수십일 동안 단 한번도 휴식을 취하지 않는 거대한 선박의 엔진은 가끔 바다와 배와 내가 조용히 만나는 날에는 소리를 멈추기도 하는 것 같았다. "바다는 언제 잠드는가?".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바다가 있네"란 글귀로만 겨우 필자와 대화를 텄던, 한국해대(항해과 16기) 를 거쳐 LASCO와  범양상선 선장 출신으로 2002년 작고, 1971년 '청진항(淸津港)' 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된 김성식(金盛式) '선장시인' 의 여러 글도 생각났다. 

35년간을 배를 타고 바다 보다 큰 허무속에 잠겨있는 절망을 길어 올리듯 쓴, 필자와 갑장인 그의 시를 필자는 전공인 영미 시문학 보다 더 관심을 가지려 노력했고 세계 문학사에서도 유례없이 많은 해양시를 쓴 해양문학의 대가로 높이 평가하고 싶었던 바 이는 김 선장시인이 소설, 희곡, 동시, 동화 그리고 드라마와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배를 타고 다니면서 필자도 가끔은 손에 금세 잡힐 듯 함박별들이 쏟아지는 대양의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리 한반도가 어디멜까 그려도 보며 시심을 북돋우는 시도를 해봤으나 뭐라고 쓸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다. 또 너무 먼 바닷길이 지루하여 태양계 중에서 작은 줄로만 알던 지구가 이리도 큰 줄은 참으로 알 길이 없었다. 선내 비치 도서실에서 그저 시문학 분야 서적을 겉만 뒤적이다 말고 해양문학에 접근할 기회를 놓친 게 지금도 무척 후회스럽다.

또 한 가지, 시간이 지날수록 애들이 보고싶었다. 지금은 둘 다 50대로 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당시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 아들 딸이 아빠가 보고 싶다고 밤마다 얼마나 울어댈까 걱정도 되고 몹씨 보고싶기도 했다. 배를 타는 해상직원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워하는 일,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떨어짐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귀국해서 안 일이지만 애들은 처음 며칠은 아빠가 보고싶다고 자주 찾다가 일주일쯤 지나니 아빠는 없어도 괜찮은 양, 그 뒤론 계속 아빠란 말도 꺼내지 않더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기항하는 항구마다 예쁜 것만 보이면 이것 저것 골라 선물꾸러미를 정성껏 싸고 챙겼던 수고가 부질없었단 생각이 들었던 기억도 있다. 

콜카타와 양곤을 떠나 어딘가, 남지나해(南支那海)라 했던가, 그 어디 근처라 하는 소리를 40년 전에 들은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긴 한데, 우리를 싣고 마지막 입항할 네번째요 마지막 포트,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가는 뱃길은 정말 힘들어 보였다. 출항한지 제법 오래된 것 같은데 배는 제자리 걸음을 하며 호수나 연못에 떠있는 가랑잎처럼 좀체 나아가지를 않고 철썩거리기만을 되풀이 하는 것 같아 불안도 하고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소땐 잘 안보이던 허 선장도 갑판에 나와 직접 지시를 하는 모습에 아마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긴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섰다. 뒤에 항해사들의 얘기로는 남지나해에선 흔히 있는 현상이라고는 했지만 대충 필자 추측에 기류나 풍향에 따라 배의 진행 방향과 반대편으로 해류가 역류를 하여 흐르기 때문에 4천톤에도 못미치는 한바다호의 성능으로는 이를 거슬러 더 이상 스피드를 내며 전진할 수가 어렵다는 뜻으로 새겨 들었었던 것 같다.

"열흘 운 놈이 보름은 못 울까?"라고 했듯 그간 고생은 많았으나 현지까지 잘 왔으니 너무 성급해 하지 말고 좀 더 기다리라는 분위기였다. 차항 나가사키를 두고 헤매며 곤혹을 치르던 한바다는 당초 도착예정일(ETA) 보다 며칠 늦긴 했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입항하여 그간 잘 견딘 데 대한 보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포와 불안을 떨쳐 버리고 배는 닻을 내렸다.  2차대전의 참상과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비참하게 폐허가 됐었던 그곳을 두 눈으로 똑똑히 가시적으로 실감했다. 한편 그 시대에 전쟁이란 비극으로 빚어진 귀중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얼마나 컸을까를 상상하고 일행과 함께 전쟁의 흔적이 남은 당시 피해 흔적을 둘러 봤다.

1945. 8. 1일 히로시마(廣島) 원자폭탄 투하에 이어 제2차 투하 예정지, 규슈의 고쿠라(九州 小倉)의 일기 부적합 때문에 불우하게도 대체지역으로 결정돼 1945. 8. 9일 오전 11시 2분에 세계 제2차 대전의 종지부를 찍는 원폭의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는 주민 25만명 중 사망자 73, 884명에 부상자가 74,909명으로 모두 15만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었다. 나가사키원폭자료관(Atomic Bomb Museum)에는 핵폭탄 투하 당시의 참혹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 보는 이의 눈을 바로 뜨지 못하게 할 정도로 처참하고 참혹했던 광경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강조하는 산 교육의 현장, 평화공원을 둘러 보며 인류의 최대 재앙인 전쟁은 누가 왜 만들고 누가 피해를 보는가를 생각나게 했고 관람하는 모두를 숙연한 분위기로 몰아가기에 충분했었다. 그때 이후 수년간 이곳엔 필자가 수차례에 걸쳐 다녔기에 그 당시와 지금은 혼동되긴 하지만 1859년 개항 전까지 서양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던 데지마에 들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원폭의 피해를 딛고 이국적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재건된 도시로 16세기 후반 바다를 건너온 외국인들이 살던 구라바엔이란 서양식 건축물이 보존돼 있었다.

저녁에는 외인부대끼리 '나가사키 요루노 사카바'에 가서 일본 사케를 마시고 취기가 오르자 어차피 배를 탔으니 우리도 마도로스가 돼 보자고 어릴 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귀동냥으로 주워 들었던 그노래 "나가이 다비찌노 고까이 오에데, 후네가 미나또니 도마루 요루"를 목청 높여 부르며 '미나도 마찌 주산반지(港町十三番地)'를 외치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해서 필자의 몇 개 안되는 일본 엔카(演歌) 애창곡목에 추가하는 계기가 됐다. 여하간 그곳에서도 소정의 2박 3일간 체류 및 견학 일정을 마치고 비록 43일간, 그러나 필자 계산 확대 햇수(?)로는 2년간(?)에 걸친 첫 승선실습 경력을  쌓고 예정된 필자 대망의 첫 승선실습 일정을 무사히 마감했다.

첫 승선 치고는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고 느낀 것이 제법 많아 그 이후에도 여러 해 동안 수차례에 걸쳐 회원사의 일반 상선이나 목포 해대의 연습선 유달호 승선, 업무 처리를 위한 단발의 짧은 항계내 승선 경험까지를 합쳐, 승선 거리보다 승선 횟수를 늘려가기에 안간힘을 썼었다. 어차피 알려진 짝퉁이긴 해도 무늬라도 해기사를 닮아가는 변신의 노력은 세월 따라 보호색으로 동화되고 진화되어 짝퉁 뱃 사람으로서의 밥벌이에 이골이 나서 이사 진급과 상무직까지 오르며 부산지부 담당 중 임기와 관계없이 IMF 사태로 퇴직할 때까지 짝퉁 해기사 행세는 계속 이어졌었다.

부산항에 도착, 실습선서 내려 아쉬운 이별을 하고 서울서 마중 온 내자와 만났을 때의 감격을 회상컨데, 근년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으리란 추측이지만 오랜 승선을 끝내고 연가를 얻거나 3국간 취항선을 타느라고 수년만에 귀국하여 가족들과 재회하는 해상 직원들의 애틋한 감격의 순간은 어떠할까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늘 그런 순간에 인간이 느끼는 심정은 비애와 환희가 교차되는 만감으로 호흡이 멈춰지리란 생각에는 이 순간도 변합이 없는 게 필자다. 1981년 12월에 출국, 1983년 1월 23일, 43일만에 귀국, 서울에 올라온 첫날 특별히 기억나는 가장 놀라운 사실은 1945년부터 37년간이나 시행되던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없어진, 너무나 기가 막히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당시 그 누구나 마찬가지, 통행금지에 얽힌 수많은 종류의 갖가지 사연들이나 해프닝, 에피소드가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데이트하던 남녀가 통금 때문에, 때로는 고의적인 트릭수법 통금작전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숙박업소에 들어가 숱한 러브 스토리를 낳기도했고, 울며 겨지먹기식 결혼 족쇄를 찼던 예가 수두룩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밤 12시가 넘으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순찰 야경들이 딱딱이를 치기 시작하고 일단 잡히면 훈게방면 조치가 있기는 했지만, 대개의 경우는 즉시 파출소로 연행되거나 순찰차(백차)에 실려 경찰서로 연행되어 하룻밤을 이른바 '닭장'에 갇혔다가 이튿날 아침에 간이 법정에서 즉결재판을 받은 후 구류나 벌금형을 받고 나오게 마련이었다.

필자도, 당시 근로자단체인 산별노조 선원노동조합 카운터 파트너의 사용자단체 실무책임자로서 단체협약을 중재하는 해운항만청의 선원노정과 담당관과 업무상 야간 회식을 하다 통금위반으로 평생 처음 종로경찰서에 연행돼 이튿날 벌금형을 받은 경력이 있어 통금에 대한 공포증이 심했었던 것. 또 승선 후 필자에겐 다른 변화도 생겼다. 난생 처음 배를 탔다는 자부심이 다양한 업무 처리에 용기를 줬고 매사에 자신감도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하거나 우주여행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당시 유행하던 우스개, "누가 물어나 봤냐?"의 자기자랑 빌미로 아무나 만나는 사람마다 우선 배탄 얘기를 하고 싶어서 입술이 간지러웠다. "남자들은 평생 군대 갔다 온 얘기뿐" 외에 필자에겐 입만 벙긋하면 나오는 화두, '배탄 얘기' 하나가 더 추가 되었던 것.

가족들도 필자가 무슨 얘기를하려 들면 "또 배탄 얘기 하려고요?" 하면서 입막음 선제 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다 아는 셈법의 궤변으로 어쨓든 필자가 배를 타고 나간 건 1981년이고 귀국은 1982년이면 날자를 헤아려 43일이긴 하지만 햇수로는 2년이란 말의 빌미가 됐고 그래서 필자 자가 수여 승선경력증도 '2년간 승선필증'이란 사실이 아주 허구는 아니라는 농담이었다. 당시는 주로 김재승(金在昇/항해과 2기), 박경현(朴慶鉉/항해과 11기) 과장 중심으로, 선박과장, 측도과장을 번갈아 했고, 필자도 선박 전반에 관한 해무 업무를 함께 수행했었다.

다시 국으로 승격된 신설 김광득(金光得) 선원선박국장과도 예선업계와 도선업계를 돌며 도선선을 타고 밧줄을 잡고 본선 래더를 올라 도선사와 함께 접안을 하기도 했고 또 삼천포 화력발전소의 예도선료 요율 조정을 위해 현지를 답사, 발전용 무연탄을 싣고 입항하는 웨스트 다오리호를 타고 허진구(許璡九/항해과 13기) 선장, 도선사와 함께 코파이럿팅에 직접 첨여하는 등 짝퉁에서 승선 경력을 쌓은 반쪽 해기사 필자가 벼라별 본선의 실무 업무를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또 업계가 심한 불황으로 선박 운항을 중지하고 계선(繫善/laid up)을 할 수 있는 안전항(safety port) 후보지 물색을 위해 범양상선의 윤희대(尹熙大/항행과 10기), 이윤우(李潤雨/항해과 13기), 한진해운 갈종수(葛鐘洙/기관과 10기), 임상수(林相秀/항해과 22기) 등 선사 임원급 해기사들과 함께 진해 고현만부터 목포 득량만에 이르기까지 해안 일대를 이잡듯이 샅샅히 뒤지던 일도 이젠 오로지 아득한 추억일 뿐이다.

끝으로 노익장 과시하며 아직도 해운 일선에서 헌신하고 계시는 존경스러운 여러 원로 선배님들에겐 버릇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필자 나이도 나이인지라 여든을 넘고도 해운계 내로라 하는 기라성 같은 진품들과 어울려 살아온 게 자랑스럽고 지금도 빈자리 나면 졸업기수 상관없이 필자를 조커로 끼워주는 우정이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앞으론 해운 변방의 머뭄도 얼마 남지 않아 지난 날을 회고하니 울컥 서글픔 같은 것이 가슴에 치밀지만 '무늬만 해기사'에 '짝퉁'으로 강한 자가 오래 남는 게 아니라 오래 남는 자가 강한자라 했 듯 이 곳이 필자가 바다와 배와 해운과 맺은 인연으로, 그 최후의 닻을 내릴 곳이라 생각하니 귀소본능으로 다시 둥지를 찾은 날짐승처럼 여유로운 피안지란 생각이 들어 안도한다.(끝)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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