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망구(望九)라 했던가, 어느덧 나이 여든줄을 넘어 이제야 겨우 철이 드는지 필자의 광화문 쉬핑뉴스넷(SNN) 사무실 건너 편 교보빌딩 곁을 아침 저녁 지나가다 보면 늘 눈에 띄는 바윗돌에 새겨진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너무나 유익하고 감동적이며 교훈적인 표어를 접할 때마다 죽기 전에 그간 못 다 읽은  고전을 챙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되풀이된다. 앞서 이 칼럼을 통해 논어(論語)와 삼국지(三國誌) 및 탈무드(Talmud)를 복습한데 이어 며칠 전에는 먼지 쌓인 책꽂이에서 우연히 눈에 띄는 고서 한 권을 꺼내 보니 '채근담(菜根譚)'이었다. "삶의 터전에서 끊임없이 타협을 요구하는 불의(不義)한 것들 때문에 마음이 흐려질 때마다 여기에 있는 풀뿌리를 하나씩 캐서 먹어라."는 교훈으로 기억되는 채근담을 참으로 오랜만에 접했다.

반세기도 넘은 60여년 전, 필자가 프레시맨 시절이던 1962년 쯤인가 교양과목으로 문장강화를 강의하던  동탁(東卓) 조지훈(趙芝薰/1920~1968) 교수가 역주(譯註)한, 당시 동서고전의 현대화를 내건 현암신서(玄岩新書)로 선보였던 채근담도 불현듯 생각났다. 조 교수는 "열일곱에 처음 채근담을 접하면서 동양의 생리를 알았고 동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며 스물 두살에 다시 읽으면서 둔세(遯世)의 미(味)와 자적(自適)의 멋은 나의 슬픔을 위로하는 정다운 벗이었다"며 인생의 길잡이로서 채근담과의 인연을 밝혔다. 경북 영양 출신의 한의학자 겸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1900~1983) 의 아들로 혜화전문학교를 나와 청록파 시인으로 박목월(朴木月), 박두진(朴斗鎭)과 문학 활동을 같이 하며 고려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 필자는 학점 따는 수강시절이었고 가끔 강의 중 대폿집으로 옮겨 강의를 했던 호쾌한 인품이 기억에 새롭다.

채근담은 중국 명(明)나라 말기 황초도인(還初道人) 홍자성(洪自誠)의 어록이다. 전집은 222장으로 주로 벼슬 후 사람들과 사귀고 직무를 처리하며 임기응변하는 사관보신(仕官保身)의 길을 말하며 후집은 135장으로 주로 은퇴 후에 산림에 한거(閑居)하는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한편 채근은 송(宋)나라 왕신민(汪信民)이 인상능교채근주백사가성(人常能旼菜根卽百事家成) 이라고 한 것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어 먹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고 쓰디 쓴 풀뿌리라도 달게 먹을 수 있는 겸양과 인내가 있다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뜻이다.

"산림에 숨어 사는 즐거움을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산림의 참맛을 깨닫지 못하였고, 명리를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그 명예를 잊지 못한 것(談山林之樂者 未泌眞得山林之厭 名利之談者 未泌盡忘名利之情)"이라, 즉 '명예와 재물을 싫어한다고 말하거나 명예와 재물을 회피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마음 속에 명예와 재물에 대한 욕망이 남아 있는 것'이란 말이 필자에게는 너무나 심오하고도 충격적인 적시로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명˙청시대 가장 왕성한 상업문화를 꽃피운 안휘성(安徽省) 휘주(徽州) 상인의 처세술과 경영법과 상업윤리가 스며든 잠안집이며 이를 은둔과 자연 친화, 자기만족의 소극적이고 퇴영적인 처세를 강조한 책으로 해석한 것은 채근담이 지닌 도회지 시민의 생활철학을 간과한 것이란 안대회(安大會) 교수의 지적도 있다.

그러나 "채근의 담백한 맛이 씹을수록 달듯이 채근담의 맛도 또한 읽을수록 향기롭다"던 조지훈의 지적처럼  중국 명(明)나라 때 홍자성(洪自誠)의 이 저서는 시공을 넘어서 현대인에게도 세상살이의 지혜를 전하고 작금의 우리나라 출판업계에 넘쳐나고 있는 삶의 지혜를 담은 수양서들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또 채근담은 "사람이 채근을 씹어 먹을 수 있으면 곧 백사를 가히 이루리라"고 한 뜻은 "사람이 이상에서초근목피(草根木皮)와 같은 조식(粗食)을 달게 여겨 그 담담한 맛에서 참맛을 느끼고 모든 일을 참고 견디면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도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다.

마음에 욕심이 일면 차가운 못에 물결이 끓나니 산림에 있어도 그 고요함을 보지 못한다 했고 마음이 공허하면 혹서에도 청량한 기운이 생기나니 저자에 살아도 그 시끄러움을 모른다 했다. 수양과 처세의 금언경구(金言警句)를 담고 있는 채근담은 오늘날에도 널리 익히는 대표적 중국 고전이다. 우리나라에 여러 종류의 역서가 나와 있지만 지금까지 오랜 세월 널리 읽히는 책은 조지훈 역주본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작고한 현암사 조상원(趙相元/1912~2000) 회장의 기획 작품으로 그가 문학 지망생으로 소년시절부터 애독하던 책이라 직접 번역하려고 했으나 그 작업이 쉽지가 않아 6.25전쟁 중 대구에서 평소 그의 시세계를 좋아했던 조지훈 시인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탄생시킨 바 있다고 한다.

특히 채근담은 '우수한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서 후세에까지 진리가 되고 존경받을 수 있는 책이란 의미에서 고전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명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귀감으로 삼을 바른 지혜를 담고 있다. 더욱이 원저에 담겨진 그 같은 지혜의 오묘하고도 깊은 이치를 스스로 구체화하여 아름다운 문체로 재구성해 낸 조지훈의 번역은 그야말로 번역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조지훈 전집 제 9 권 채근담은, 홍자성의 채근담을 국역, 주해(註解)한 것인데,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와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을 국역, 주해(註解)한 것도 함께 실었다.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마친 그는 1941년 혜화전문 졸업 후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외전강사를 역임하고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를 통해 읽고 배운 작품도 숱한데 초기 대표작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과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등단했다. 1948년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4.19와 5.16을 계기로 현실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대표적으로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을 발표했다. 1963년에는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서설(韓國文化序說)',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다.

방대한 분량의 내용 전체를 소개할 수는 없지만 필자가 닥치는대로 섭렵한 채근담의 명언 중에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반드시 성실하지 못하더라도 자기만은 홀로 성실하기 때문이며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사람이 반드시 모두 속이지 않더라도 자기가 먼저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생각이 너그럽고 두터운 사람은 봄바람이 따뜻하게 만물을 기르는 듯하여 무엇이든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살아나고, 마음이 모질고 각박한 사람은 차가운 눈이 만물을 얼게 하는 듯하여 무엇이든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죽는다"고 했다. 오래 엎드린 새는 반드시 높게 날고 먼저 핀 꽃은 홀로 일찍 떨어진다. 사람도 이런 이치를 알면 가히 발을 헛디딜 근심을 면할 수 있고 가히 초조한 생각을 없앨 수 있느니라고 했다.

석화의 불빛 속에서 길고 짧음을 다툰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겠는가. 달팽이 뿔 위에서 자웅을 겨룬들 그 세계가 얼마나 넓겠는가. 와각지쟁(蝸角之爭), 와우각상쟁(蝸牛角上爭), 와각상쟁(蝸角相爭), 와우지쟁(蝸牛之爭), 사나운 짐승은 굴복받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항복받기 어렵고 골짜기는 채우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채우기 어렵다. 마음이 넓으면 만종(萬鐘)의 녹(祿)도 질항아리와 같고 마음이 좁으면 터럭 하나라도 수레바퀴와 같게 보이느니라. 새끼로도 톱 삼아서 오래 쓸면 나무를 자르고 물방울도 오래 떨어지면 돌을 뚫는다(수적천석/水滴穿石), 도(道)를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힘써 찾기를 더할 것이니라고 일렀다.

'물이 모이면 도랑이 되고 오이는 익으면 꼭지가 떨어지나니 도를 얻으려는 사람은 하늘에 맡길지니라.' 나무는 뿌리로 돌아간 뒤에라야 꽃과 가지와 잎의 헛된 영화를 알게 되고 사람은 관 뚜껑을 덮은 다음에라야 자손과 재물이 쓸데없다는 것을 알게 되느니라. '사람을 보려거든 그 후반생을 보는 것으로 족하다'는 글에서는 기생이라도 늘그막에 한 남편을 따르면 한 세상의 연분이 거리낄 게 없고 수절하던 부인이더라도 백발이 된 후에 정절을 잃으면 한평생의 맑은 고절(苦節)의 보람이 없다. 그래서 속담에 사람을 보려거든 후반생을 보라는 말이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

군자는 재력이나 지위에 의해 농락당하지 않는다 했다. 상대가 부(富)로 대하면 나는 인(仁)이라는 덕으로 대할 것이며 상대가 벼슬로써 대하면 나는 의(義)라는 절개로 대할 것이다. 군자는 본래 임금이나 정승이라고 해서 결코 그들에게 농락 당하지 않는다. 사람의 힘이 굳으면 하늘도 이길 수 있고 뜻을 하나로 모으면 기질도 변화시킬 수 있으니 군자는 또한 틀 속에 넣고 마음대로 주물러도 변하지 않는다 했다. 부자 앞에서 비열해지는 것은 그 부자에게 은택을 입어볼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권력자에 아부하는 것은 그의 힘을 업어 출세해 보겠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똑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맞선다면 어차피 승산은 없는 것이니 그들의 앞잡이가 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이는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구절이다.

'성공 후에는 꼭 반성하고 실패한 후라도 포기해선 안 된다. 이는 인생이란 유위전변(有爲轉變)하는 것이다.' 즉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또한 인간이란 습관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좋은 상대건 나쁜 상대건 간에 현재의 상태가 그대로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찾아오고 둥근 달은 이지러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는 인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갈 때에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며 역경에 처했을 때도 쉽게 포기해서는 안된다. 현란하게 피는 꽃도 한철이요, 폭풍뇌우도 한때라는 생각을 갖고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기른다면 , 좌절 속에서 재기할 수 있고 낙오되는 비극 속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또 공적을 세워도 스스로 치적을 자랑하면 안된다는 비유로, 세상을 뒤엎을 만큼 큰 공로일지라도 '자랑 긍(矜)' 자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하늘에 가득 차는 허물일지라도 '뉘우칠 회(悔)' 자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다고 했다. 아무리 큰 공적을 세웠다 해도 스스로 치적을 자랑하면 공로가 허사로 돌아가고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스스로 뉘우치면 용서받고 새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교훈이다.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이라도 잘못을 저질렀다면 공적은 어디까지나 공적이요 죄는 어디까지나 죄로 보는 것이 현대인의 사고방식이다. 당사자는 잘못을 공적으로 용서해 주기를 바라겠지만 잘못을 공적으로 상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승리에는 행운도 있을 수 있지만 패배에는 우연한 패배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성공의 참된 요인은 뜻밖에도 당사자 눈에는 잘 띄지 않는 법인데 그런데도 성공한 결과만을 놓고 자랑한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고 무의미한 것이고, 사람이 오만하면 우선 이유 없는 적을 많이 갖게 된다는 것이다. 명예를 독점하지 말고 부끄러움을 남에게 떠넘기지 말라고도 했다. 공적과 명예는 결코 혼자 독점해서는 안되며 남에게도 어느 정도 할양함으로써 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이른다. 또 실패와 오명(汚名)을 모두 남에게 전수해서는 안된다. 자신도 어느 정도는 그 책임을 짐으로써 겸손을 기르고 인격을 연마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일이 잘 풀려 나갈 때 진실된 마음으로 '모두 여러분의 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또 남이 실패하여 곤경에 처했을 때 '운이 나빴던 거야, 나도 성심껏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며 진심으로 동정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주변에는 자연히 힘을 빌려 주고 지혜를 모아 주는 협력자들이 찾아들게 마련이라 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혼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큰 일도 능히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정에 참 부처가 있고 있고 일상 속에 하나의 참 도가 있다. 즉 참된 부처는 평안한 가정에 있고 참된 도는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한 가족이 한 마음이 되어 성실하고 평화롭게 살아간다면 그것은 이미 참선해서 도를 통한 것과 같으니 구태여 하기 힘든 참선이나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가족간에 단절된 대화로 인해 청소년, 노인, 부부 등 가정 문제가 이미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가족간의 대화 단절이 가정의 행복을 무너뜨리는 원흉인 것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만고의 진리란 얘기다. 또 악행은 너무 엄하게 책망 말고 선행은 지나치게 권치 말라고도 했다. 남을 비판하고 교훈을 줄 때 지켜야 하는 마음 가짐은, 남을 비판할 때는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과오를 고쳐 나갈 것인지를 먼저 생각할 일이다. 남의 결함이 눈에 띄고 그것을 꼭 지적해야겠다고 생각할 때는 앞에서 말한 이 전제조건을 잊어서는 안된다. 상대방을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고 나무라는 결과가 된다면 이는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되기 때문이다. 

'각박하게 구는 부자의 행위는 거지의 구걸 보다 못하다.' 부귀한 집은 관대하고 후덕해야 하거늘 도리어 시기하고 각박함은 부귀하면서도 그 행실을 빈천하게 함이니 어찌 복을 누리겠는가. 총명한 사람은 재능을 덮고 감춰야 하거늘 도리어 드러내고 자랑하니 이는 총명하면서도 그 병폐가 어리석고 어두운 것이니 어찌 실패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부유한 사람 중에는 인덕을 갖추지 못한 부류가 있어 남의 입장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으면서 때로는 헐뜯기까지 한다. 그러나 금력과 권력을 잃었을 때 한없이 외로워진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한편 사냥을 잘 하는 맹수는 발톱을 감추는 법이다. 지식이나 재능을 함부로 남 앞에서 자랑할 일은 아니다. 진짜 총명한 사람은 그런 지식과 재능이 있더라도 감추는 법이다. 잘난 체하며 자랑하는 사람은 모두가 경원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낮은 곳에 있어 보아야 높은 데가 위태로운 것을 안다'고 했다. 낮은 곳에 있어 봐야 높은 데 오르기가 위태로운 줄 알고 어두운 곳에 있어 봐야 밝은 데 나가 눈이 부신 줄 알며 정적을 지켜 봐야 밝은 분주한 움직임이 헛수고인 줄 알고 침묵을 지켜 봐야 말 많은 것이 시끄러운 줄을 알 것이다. 자연의 운행에도, 인간의 생활에도 동(動), 정(靜), 생(生), 사(死)의 순환이 있다. 구체적이고 창조적인 생활방법을 추구하고저 하면 리듬있는 순환으로 휴식과 내성(內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슬럼프에 빠졌다느니 실적이 떨어졌단 말을 듣더라도 상관없다. 겉으로 보기에 죽은 것 같은 번데기가 고치 속에서 화려한 나비로 탈바꿈하고 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책을 읽더라도 성현을 보지 못한다면 '지필(紙筆)의 종'일 뿐이고 벼슬자리에 있어도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관복을 입은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학문을 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입으로만 참선하는 사람일 뿐이고 큰 일을 일으키고도 은덕을 삼지 않는다면 눈앞에서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일 뿐이다. 또 '열 마디 말 중에 잘못된 한 마디 때문에 비난을 듣는다.' 열 마디 말 가운데 아홉 마디가 맞았다 해도 신기하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비록 한 마디라도 맞지 않으면 허물을 탓하는 말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열가지 모사 가운데 아홉 가지가 성공해도 그 공을 돌리려고 하지 않지만 한 가지만이라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비난하는 소리가 한거번에 일어난다. 군자는 차라리 침묵할지언정 남보다 앞장서서 떠들지 않으며 졸렬하다 할지언정 재주를 나타내지 않는 법이다.

'지나치게 맑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땅이 더러운 곳에는 초목이 무성하고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때 묻고 더러운 것이더라도 받아들이는 아량을 가져야 하고 깨끗한 것만 즐기며 혼자서만 행하려는 절조는 갖지 말아야 한다. 완전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완전무결한 인간이 없다면 누가 누구를 나무라며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평할 때 자기 기준으로 평함으로써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일이 허다하다. 어떤 면에서는 다소 결점이 있는 사람이 다른 면에서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르 면에서는 놀랄 만큼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는 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포용해서 함께 하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잘못을 나무랄 때는 마치 봄바람이 언 땅을 녹이듯이 하라.' 집안 사람에게 허물이 있거든 거칠게 성낼 것도 아니고 예사로 버려둘 일도 아니며 그 일을 말하기 어렵거든 다른 일을 빌어 은근히 타일러라. 오늘 깨닫지 못하거든 다음 날을 기다렸다가 두 번 깨우쳐 줘라. 가족들, 나아가서는 고용인의 과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적절한 구절이다. 처벌 위주로 치닫는 이른바 관리주의 교육이, 관리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 또는 관리를 당하는 사람 등 쌍방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봄바람이 언 땅 녹이는 교훈은 부모, 교사, 관리직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좌우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늙어서 생기는 질병은 모두 젊었을 때의 응보다.'  대개의 경우 늘그막에 생기는 질병은 젊었을 때 불러들인 것이고, 쇠한 뒤에 생기는 재앙은 모두 성했을 때 지어 놓은 것이다. 군자는 그런 까닭에 시경(詩經) 소민장(小旻章)에 '감히 범을 맨손으로 잡지 않고, 감히 배 없이 황하를 건너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은 하나만 알고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하니 두려워 조심하며 깊은 못가에 다다른 듯 엷은 얼음을 밟듯 하네. 마땅히 군자는 깊은 못가에 다다른 듯 엷은 얼음을 밟듯 매사에 조심 조심해야 함을 이른 말이다.

'뜻을 굽혀 칭찬을 듣느니 뜻을 지켜 미움을 받는 편이 낫다.'고 했다. 뜻을 굽혀 남에게서 기쁨을 사느니보다는 내 몸의 행동을 곧게 하여 남의 시기를 받음이 차라리 낫고 좋은 일을 한 것도 없이 남에게서 칭찬을 받는 것보다는 나쁜 짓을 하지 않고도 남에게서 흉을 잡히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서 인정받고 칭찬 듣기를 좋아한다. 그 반면 남으로부터 책망 듣고 흉잡히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자기 의견까지 꺾어가면서 남에게 아부하여 칭찬을 듣는다든가 인정받을 만한 일도 하지 않았으면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경고다.

'공론을 이용하여 자기 개인적인 감정을 만족시키지 말라.' 많은 사람이 의심한다 하여 자기 의견을 굽히지 말 것이며 자기 한 사람의 뜻에만 맡기어 남의 말을 버리지 말 것이다. 또 사사로운 은혜에 사로잡혀 대국을 해치지 말 것이며 공론을 빌어 사정(私情)을 만족시키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크게는 정치를 하는 의회에서나 작게는 일을 하는 직장에서나 민주적 토의 규칙에 너무나 미숙한 점이 많다. 감정에 이끌려 반대를 하기 위한 반대를 일삼는 일이 있는가 하면 대중의 힘에 순응하여 자신의 의견을 얼른 철회하는 일도 많다,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예사이고 개인이나 자파를 옹호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을 모략까지 하다가 마침내 나라의 큰 일까지 망쳐 놓은 일을 우리는 역사와 현실 속에서 수없이 보아왔다.

또 '은혜를 베풀려거든 그것을 갚지 못할 사람에게 베풀어라.' 남을 보살펴 주는 경우, 대개의 범인들은 반드시 자기가 베푼 것에 대해 상대방이 감사할 것을 은근히 기대한다. 그런 기대를 갖는다면 그 자체가 상행위와 다를 바 없어서 순수한 선의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답을 원치 않는 선행이라면 도저히 보답할 능력이 없을 만큼 처지가 가장 어려운 사람을 고르는 것이 좋다는 권고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을 때의 존경은 그 지위를 존경하는 것이다.' 내가 귀할 때 사람들이 받드는 것은 높고 큰 감투를 받드는 것이요 내가 천할 때 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베옷과 짚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명함에 찍힌 직함을 보고 사람들이 경의를 표하면 마치 자신의 인격이 존경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공평하면 명료해지고 청렴하면 위엄이 선다.' 관원에는 두 마디 말이 있으니 '오직 공평하면 밝은 지혜가 생기고, 오직 청렴하면 위엄이 생긴다'는 것. 또 가정에는 두 마디의 말이 있으니 '오직 용서하면 불평이 없고, 오직 검소하면 살림이 넉넉하다'는 말이다. 공직은 그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철두철미하게 사심을 버려야만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법이다. 가정의 행복을 이루는 기본은 가족의 화목과 경제적 안정에 있다. 그것은 가족 상호간의 이해, 그리고 근검절약하는 생활습관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꽃은 반쯤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술은 거나할 정도로 마셔라.' 꽃은 반쯤 피었을 때 보고, 술은 적당히 취하도록 마시면 그런 가운데 아름다운 취미가 있나니 만약 꽃이 활짝 피고 술에 흠뻑 취하면 문득 재앙의 경지에 이른다 했다. 모든 것은 적당한 선이 있다. 그러나 그 선을 넘어 추태를 부리기 쉬운 것이 또한 인간이다. 술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술은 백약의 으뜸'이란 말은 자기 주량에 맞도록 적당히 술을 마시면 혈액순환도 촉진되고 소화에도 도움이 되어 건강에 좋다는 말이리라. 그러나 이른바 주객들은 그 한계를 넘어 추태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아 채근담을 다시 두고두고 묵상할 작정이다.

끝으로 '음란의 극과 정숙의 극은 서로 만난다'고도 했다. 음란하던 여인이 극단에는 비구니가 

되고 열중하던 사람이 분격하여 불도에 드나니 맑고 깨끗해야 할 절이 항시 음사(淫邪)의 소굴이 됨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한다. 주먹 세계에서 놀던 폭력배 두목이 회개하고 성직자가 되고, 음란의 극을 달리던 여자가 삭발하고 여승이 되는 예는 흔히 있는 일이다. 회개하고 돌아서면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종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극히 선량했던 사람도 극악무도한 죄인이 되는 예도 있으려니 선을 행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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