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요즘처럼 온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가 혼탁한 속에서 국민들이 헤쳐 나가야할 방향을 잃고 헤매일 때일수록,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 더 간절히 생각나고, 목하 나라경제가 위태로울 때엔 이병철(李秉喆, 1910~1987), 정주영(鄭周永, 1915~2001) 두 분의 나라사랑과 국가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생의 전부를 바첬던, 이 큰 별을 잊을수가 없다는 것은 필자뿐만 아니라 6, 70년대 그 시대를 함께 호흡하고 산업전선에 참여했던 시니어들이라면 거의가 함께 갖는 소회란 생각이 든다. 한때는 모두들 그랬다. 우리 대한민국이 창조주에게 감사해야 할 일은, 동 시대에 박정희 대통령, 정주영, 이병철 회장 등 3영웅을 동시에 대한민국땅에 내려 주신 일이라고 했다.  

특히 필자는 삼성그룹을 설립한 전 이병철 왕회장과 함께 건국 후 사기업의 양대 산맥을 이뤄 오늘날 한국경제의 초석을 세운 전설적인 기업가, 전 현대그룹의 정주영 왕회장과 사돈간인 현대상선 현영원(玄永源)회장(1927~2006)을 동시에 또 다시 한번쯤 회상해 보는 까닭은, 두 분 모두가 고인이 된지 오래지만 현역 시절 해운이나 조선업계에서 직간접으로 마주치며 같은 업무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필자 혼자서도 "그래, 왕회장 그 분이 그래서 남다르고 그렇게 큰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거야" 를 되뇌이며 나름대로 흥미롭게 들은 두 분의 이야기 한 토막을 회상함으로써 한국 해운 및 조선을 중심으로 정 회장과 현 회장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는 추모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다.

정주영은 우리나라의 건설분야를 개척했고 조선공업을 일으켰으며 자동차 공업의 활로를 열어 'HYUNDAI'란 깃발을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 드높이 휘날려 경제대통령이란 별칭에 걸맞게 대기업 총수로서 성공한 역사적 인물이자 현대상선과 현대중공업 및 현대미포조선 등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공적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삶 나의 이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제하의 회고록 머리말에서 정 회장은 "나는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노력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지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로 시작해서 인류 역사나 세계 각국의 발전사를 보면 지구상의 많은 국가, 기업들이 흥망성쇄를 거듭해 오고 있는데 이의 근본적인 이유는 국가나 기업의 중추를 이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진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가에 달렸다고 피력한 대목에서 큰 교훈을 얻기도 했다.

5천 년 역사를 표본으로 보아도 그 긴 역사를 통해 진취적인 기상이 살아 있을 때는 대륙으로 한없이 발전해 나갔었지만 그 기상이 꺾인 후 육지나 바다로도 뻗어나갈 생각은 않고 좁은 땅 안에서 집안과 형제끼리 서로 다투는 데만 세월을 허비하기도 했다고 개탄하며 그 예로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 근대는 스페인 포르투갈이 선진 대열에서 자취를 감췄고 로마제국이 사치와 부패와 게으름이 극에 달해 국방조차 용병에 맡겼다가 패망했다고 개탄했다. 그래서 불굴의 개척정신, 창의적인 노력, 진취적 기상을 기업정신으로 삼았었다는 것이다.

호남 출신으로 영남 출신 부인 김문희(金文姬/1928~)씨와 결혼 후 초대 대한해운공사(KSC) 사장을 지낸 장인, 김용주(金龍周)의 바톤을 이어 받아 신한해운 경영을 맡아 오던 현영원씨는 1984년 해운산업합리화 과정에서 현대상선과 합쳐 동사 회장직을 맡고 있을 때 들려준 정주영 회장과의 이야기 한 토막이 지금도 필자에겐 잊혀지지 않아 가끔 이를 해운업계 동료나 지인들에게 전하기도 하고 기록으로 남기고도 싶은 생각을 적어 본다. 우선, 보성고를 나와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정 회장의 5남 정몽헌(鄭夢憲/1948~2003)과 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 현 회장의 2녀 현정은(玄貞恩/1955~)이 1976년 결혼을 함으로써 정, 현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 된 건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필자가 지금 구체적으로 옛 얘기를 하려는 시대는 1992년 겨울이니까 엊그저께 같이 생생하기도 한데 손을 꼽으니 30년이 넘은 얘기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으나 1991년(?) 그해 늦가을부터 현대상선 현 회장이 한 달간인가 병원에 입원을 해서 치료를 하는 바람에 업계 모두가 궁금해 했다. 그러던 어느날 퇴원 소식을 듣고 와병 중 문병을 못 갔던 탓에 한국선주협회(현 해운협회)사무국 박창홍(朴昌弘) 전무이사와 상무이사 직을 맡은  필자는 현대상선 사무실로 뒤늦게 문안 인사를 갔다. 사돈지간이지만 기업 지분 규모나 나이 차이 및 아들 아닌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 왕회장을 늘 경외롭게(?) 생각한다는 현 회장은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본인 스스로도 사돈 정 회장에게 너무나 놀랐다며 들려주는 흥미로운 스토리는 대충 이렇다.

퇴원 후 오랜만에 전화를 받은 현회장에게 정 회장이 그간 바빠 병문안 한번 못 가서 퍽이나 미안하다며 간단히 식사라도 나누며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하더란다. 감히 어떤 사돈인데 싶어 이것 저것 묻는 정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걸 사돈 형편대로 정하면 따르겠다는 식의 답변을 했단다. 서로 오간 대화를 재구성해 보면, "내가 대통령에 출마해서 지금 이 시각은 막바지 선거유세로 한창 바쁘니..."로 시작해서 "장소는 수원 어디 어디 해장국집이 좋겠습니다", "날자는 모레로 하고 시간은 새벽 4시로 합시다"로 해서 얼떨결에 약속은 했지만 사돈 형편대로 하는 바람에 토 한마디 달 겨를도 없이 일방적으로 장소와 날짜와 시간과 메뉴까지 정해진 것 까지는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새벽 4시에 맞춰 수원지역 어느 약속 장소에 가려면 새벽 2시엔 자택을 출발해야 했고 그러려면 운전기사는 12시 자정까지는 서둘러 자기 집을 출발해야 현회장 댁에 늦어도 새벽 2시 안에 도착해서 픽업을 해야 여유있게 약속 시간을 맞출 수 있었기에 긴장된 마음에 약속 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긴장이 됐다고 했다. 드디어 약속 날, 거의 뜬 눈으로 수이잠을 자다가 기다리던 기사가 도착하자 혹시라도 늦을세라 새벽같이 출발했다고 한다. 12월 엄동설한 캄캄한 밤길을 달려 새벽 4시쯤에 약속 장소에 당도하니 정회장은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더란다. 

칠흑같이 캄캄한 새벽녘에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해장국집의 문을 열자 첫 손님들 마수걸이로 개시를 하며 악수를 나눈 후 깍두기에 달랑 해장국 한 그릇씩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그간 밀린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해장국 가마솥 주위에 서린 김에 가려 숟가락이 어디로 향하는지 얼떨떨 했다고 했다. 그러고 잠시 후에 정회장은 작별 인사로 악수한 손을 놓기가 바쁘게 불이나케 그곳 시장 일원의 새벽 선거유세를 하러 홀연히 떠나더라고 했다. 사돈끼리 고작 30분간의 새벽녘 퇴원 축하연(?)을 위해 서울서 수원을 갔다가 급히 되돌아오는 길 승용차 라디오에서는 이미 정회장의 선거유세가 요란했다고 했다. 

그리고 직원들 출근 시간이 되기도 전에 사무실에 와서 텔레비전을 켜니 정 회장은 벌써 수원 유세를 끝내고 금세 울산으로 내려가 이미 양 팔을 치켜 들고 선거구호를 외치며 유세차를 타고 시가지를 누비고 있더란다. 이를 본 현 회장은 그 광경을 보고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당시 현 회장은 사돈끼리 높낮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워낙 거물급인데다가 나이가 12년이나 위 띠동갑 입장이고 보니 을의 처지를 자처하는 듯 했고 게다가 정 회장이 희수가 넘은 나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디서 그런 힘과 정열과 용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내둘렀다.

한참 동안 이를 유심히 듣고 있던 박 전무와 필자도 과연 정 회장은 동화속의 자이언트나 철인같은 전설적(?) 인물이란 어휘 밖에는 달리 표현 할 방법이 없다고 맞장구를 치던 기억이 지금 이 순간도 생생하고 눈에 선하다. 역사는 절차를 생략하지 않는다고 했듯이 5.16 군사혁명 후 단계적 경제개발 계획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이어 단기간에 경·중공업의 연속화로 산업화를 달성하려는 정부의 의지나 업계의 노력이 상승효과로 도약의 발판을 이룩하던 '빨리 빨리' 시절이라 급행료(?)란 관행도 있고 폭탄주로 작업 현장의 피로를 풀며 서부 개척 시대 같던 6, 70 년대이기도 했기에 부조리나 비리가 횡행했던 일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렸다.

그래서일까? "한 해에 수 억씩 뇌물을 주려니 차라리 내가 직접 대통령을 하고 말겠다"고 정계 진출 이유를 밝혔던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후보는 민자당 김영삼의 997만표(41%), 민주당 김대중의 804만표에 이어 388만표(16%)를 얻어 3위에 그쳤지만 국민당을 창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의원을 거쳐 결국은 이같이 비록 낙선은 했지만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는 등 일선 현업에서는 물러섰지만 경제대통령으로서의 큰 위상은 현재까지도 길이 남아있다는 게 필자 생각뿐일까다.

강원도 통천 송전의 아산(我山) 마을에서 태어나 열네살에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돌밭을 개간하는 농사일부터 시작했던 정 회장과는 달리 현 회장의 가계도는 천양지차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호남 최고의 명문 집안에 갑부 출신으로 할아버지 현기봉(玄基奉/1855~1924)은 진사시에 급제한 전남 영암지역 최대 지주와 유지로 활동했고 경성 해동물산주식회사와 목포창고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근대 영암지역에서 으뜸가는 부호였다. 아버지 현준호(玄俊鎬/1889~1950)도 일본 명치대학을 거쳤고 선친으로부터 7,000섬을 수확하는 토지를 포함하여 전 재산을 물려 받아 호남을 대표하는 기업가에 고위 관료도 역임하고 호남은행을 설립하여 은행장을 지낸 갑부 세습자로 그 이름을 널리 떨친 저명 인사였다.

그렇다 보니 장남인 현 회장은 왕자처럼 자라 광주고보를 거쳐 서울대학 영문과를 졸업후 한국은행을 거쳐 대한제철과 신한은행을 경영하다가 1984년 해운산업합리화 과정에서 현대상선과 합친 뒤에 회장직을 수행하고 해운업계 최고의 명예직 수장인 한국선주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니 해운인으로서는 가장 럭키한 일생을 보낸 셈이다. 선주협회 회장단회의 오찬 단골이었던 옛 당주동 세종빌딩 근처서 송하(松河)란 한정식집을 경영하던 동향 출신의 박 모 여사장은 어릴 때 현 회장 댁 저택은 궁궐이라고 생각했고 거기 살던 왕자(?)에게 이렇게 식사를 제공하는 영광은 감개가 무량하다고 회고하던 모습도 당시 선주협회 박건석(朴健碩, 범양상선 회장) 회장과 함께 새삼 기억에 떠오른다.

정 회장과의 결정적 인연은 대한제철 경영시 자금 사정이 어렵던 현대건설에 철근 공급을 한 게 계기가 됐고 그 인연이 자녀들까지로 이어져 사돈간이 됐으니 인연치고는 보통 인연은 아니란 생각이다. 교통부를 출입하며 해운업계를 중점적으로 취재할 때도 두 사람을 만날 기회는 잦지 않았지만 필자가 한국선주협회로 옮겨와 조사부장으로 일할 때 현대조선이 최초로 그리스의 리바노스로부터 수주한 26만톤급 대형유조선(VLCC) 세척이 이 1973년 오일쇼크 여파로 인도를 포기하자 전화위복이랄까, 1976년 현대상선의 전신, 아세아상선이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눈여겨 봤기에 정 회장에 관한 이야기는 적어도 조선 분야만 해도 몇 권의 대하소설로도 부족하겠다. 

회원 선사나 외국 선주들이 신조선 진수나 인수식을 가지게 되면 으레 선주단체 실무 담당으로 현대조선을 여러번 방문할 때 리셉션 행사장에서 정 왕회장을 볼 기회가 많았고 늘 인자하게 웃는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그리고 현 회장을 비롯한 주변에 관해서도 60년대 후반부터 반세기는 족히 해운업계 변방을 서성거렸기에 이미 여든을 넘은 필자에게는 30년 전 전해들은 이 짧은 겨울 새벽 해장국 이야기를 두 회장을 기억하는 모등 이에게 전하고 싶다. 그리고 정 회장의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아 여의도에 새로운 회관을 건립했고 산하에 우리나라 전 산업을 총 망라해 업종별 정보를 교환하는 실무 조직 '산업정보조사위원회'를 격려하기 위해 오찬에서 식사했던 기억도 새롭다.

19층 난초홀에 모아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정 회장이 일러주던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젊은 여러분께 당부컨데, 나 같으면 월급 날 우선 급여의 30%를 떼서 먼저 은행에 저축을 한 나머지 봉투를 들고 집으로 가겠다"던 평생 잊혀지지 않는 충고가, 재산을 모으진 못 했어도 "가진 건 없지만 부족한 것 또한 전혀 없다"며 오늘을 살아내는 필자의 호구지책 좌우명이 되어 이를 후손들에게도 전하고 있다. 현 회장의 경우 필자와의 면담은 신한해운 사장 시절, 북창동 어딘가 업무 협의차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오렌지 쥬스까지는 좋았는데 서랍에서 조심스레 겨우 양답배 한 개비를 꺼내 건네주던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그리고 필자가 기자 출신이란 걸 아는 터였는지 자신도 동아일보 이사직임을 만날 때마다 강조하던 기억이 새롭고 원목 수송을 하던 신한해운 시절 특별히 필자와 친했던 강대홍(姜大鴻) 상무와 손정남(孫政男) 부장이 불현듯 생각난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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