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78년 전, 아마 1945년 8월 하순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애비가 온대요. 빨리 애 데리고 신작로에 나갑시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942년생(음력 1.16일)인 필자와 44년생의 바로 아래 등 두 아들을 두고 일본 혹카이도(北海島)에 조요우(徵用)로 끌려갔던 20대 중반의 아버지가 해방을 맞자 무사이 돌아왔던 당시 4살박이 필자의 지금 기억은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죽지 않고 살아 온 아버지를 위해 잔치를 벌이며 떠들석하게 꽹과리를 치고 자유를 되찾은 환희에 벅찼던 모습이 희미하면서도 한편 또렷하게 떠오른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손 잡고 마을 어귀 대추나무 골을 지나 신작로에 나가 강제 징용에서 풀려난 아버지가 필자를 덥썩 안아 들고 무척이도 반가워했던 기억은 언제나 더욱 새삼스럽다. 나가사키(長崎)와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히로히토(裕仁天皇/1901~1989)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전쟁이 끝나자 북해도 탄광에서 고생하던 아버지는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부모와 자식이 기다리는 고향 경북 선산(善山) 땅에 돌아와 광복의 기쁨과 자유를 만끽하며 일제 강점으로 멈췄던 새세상의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다 별세했다.

1938~1945년 사이 일본의 군수 공장이나 건설 현장 또는 광산에 불려갔던 징용병은 648만 명에 달했고 특히 아버지 같이 탄광에 불려간 징용병들은 일본 광부가 꺼리는 가장 깊은 갱도 막장과 가스발생, 낙반사고 빈발지역 등 산업재해 위험이 높은 곳에 배치됐었다고 했다. 참으로 힘든 노역을 했고 형편 없이 주는 급여도 도망이나 이탈 방지를 목적으로 몇 푼 용돈 외에는 강제 저금 통장으로 몰수돼 굶주림도 많이 겪어었다고 했다. 그러나 타계한 8남매의 외아들 아버지는 비슷한 연배의 생존한 고모들의 얘기를 들으면 아버지는 귀국후 당시 2년에 걸친 북해도 탄광 노역을 크게 저주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했고 필자가 성년이 되어 가끔 나누는 일본 징용 시절의 회억도 그러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중에도 B-29를 보면 질겁을 하며 무조건 방공호를 찾는 두려움 외에는 상당히 느긋해 하며 지난 날들을 옛 추억에 가까운 과거사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철들기 전에 해방을 맞았고 초등학교 때에 6.25를 겪고 이어 4.19를 맞았으며 재학중 자원입대, 육군 하사시절 월남전 참전을 모면한 필자 입장에서는, 최근 언론 보도를 접하면 그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이들이 애국심과 역사관을 앞세워 한일 문제를 쟁점 삼아 국력을 소모하고 게다가 국가를 다스리고 이끌어 가는 높은 나랏님들이 일본에 대고 '반일 즉 애국"인 것처럼 각종 명분을 내세워 "사과하라!", "돈 내라"에 이어 원전 오염수 방류를 두고도 문제에 접근, 정의롭고 지혜로운 해결방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소모성 논쟁만 일삼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약자의 대리전 청부업자처럼 사사건건, 시시콜콜 쏟아내는 비방이나 논쟁이 유치하기까지 하고 스포츠 게임이나 국제분쟁은 반드시 이해가 엇갈리는 상대가 있는 법이거늘 이를 두고 입씨름만 되풀이 하는 모습에서 크게 실망을 금치 못한다. 아침 조간에 북핵을 막기 위해 벌이는 한미일호 국제 해양훈련인데 누구 눈에는 욱일기(旭日旗)만 보이느냐는 기사를 보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상대방 성토와 비판으로 시쳇말 "먹고 사는 경제, 죽고 사는 안보" 문제의 핵심적인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입만 떠드는 무리들이 모든 국사를 이념과 정파에 귀속시키는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필자는 근년 포털사이트, 인터넷이나 이메일로 전파되는 논단 중에서 유난히 필자의 심경을 대필한듯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제하의 글에 관심이 쏠려 이를 지인들과 공감하고픈 간절함에 절박감까지 들어 이를 언급한 적이 있고 최근에는 이웃이나 지인들과의 모임에서도 회자시킨다. 이제는 세계 모든 면에서 우리가 일본과 어깨를 겨루고 분야별로는 앞서가고 있는 것도 많은데 무엇이 두려워 일본 얘기만 나오면 오염되는 귀를 씻지 못하고 탈무드에서 유대인들이 철칙으로 삼는 "들은 얘기를 본 것처럼 전하는" 무리들이 가짜뉴스나 괴담을 일삼으며 제 조국을 남의 나라저주하듯 일삼는 비참하고도 가련한 사례를 밤낮으로 목격하며 사는 노년이 한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 와신상담을 읽고 수차례에 걸친 전화를 통해서 어렵게 수소문을 한 끝에 정년에 이른 장본인이 근무하는 대학으로 장시간 통화를 하며 짧은 시간에 비대면 친구가 된 기분으로 가까움을 느껴 "교수님 생각이 어쩌면 저하고 똑 같아 지명도가 낮은 제 이름보다 교수님 직위를 빌어 이를 인용함으로써 독자들로부터 '매튜효과(Mathew Effect)'를 얻고 이를 극대화 하고 싶다"고 간청을 했다. 혹시 시국의 흐름이나 산업계에 대한 비판적인 제언이 약간은 모난 논조로 저돌적인 모습을 보여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로부터 항의를 받거나 시달림을 당한 탓일까(?), 실은 그 글은 자기가 쓴 것이 아니며 전혀 무관하다는 언급에 일단은 알겠다고 동의를 했다. 필자가 일단 그럴 수도 있겠다는 여지를 보인 것이다.

그리고 소속과 성함을 익명으로 인용 하겠다는 전제를 볼모로 하고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그간 세운 공로가 지대한 흔적이 엿보이는 L교수와 의견을 청취했고 정작 최근 우리나라 산업이나 학계가 국가 기간산업과 전략산업의 지속적 발전을 잇는 백년대계를 위한 원시적, 안정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철학과 비전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L교수가 집약적으로 간추려 피력한 내용들을 가감없이 나열, 전달하면 대충 이렇다. "일본을 따라가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했다. 일본의 예법을 배웠다. 일본을 찾아 다녔다.일본 사람과 사귀었다. 일본 기술자를 초대했다. 일본 제품을 베꼈다. 일본의 정신을 파악했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 70년이 넘게 와신상담했다. 이런 일을 스스로 겪어 보지도 않은 어떤 미친 망나니 같은 놈이 친일 매국이라고 한다."

이는 너무나 꾸밈없이 소박하고 직설적인 체험적 술회로 여겨지고 필자도 함께 호흡하며 겪었던 시절이라 나 자신의 얘기로 공감이 갔다. 첫 구절부터 가슴에 와 닿는 울림이나 감격이 너무나 컸고 어쩌면 60년대 중반에 병역 후 밥벌이를 시작했던, 지금은 모두들 은퇴했으나 1950 ~ 60년대 어려운 여건 아래서 대학을 마치고 구하기 힘든 일자리를 찾아 겨우 직장을 잡은 샐러리맨들은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앞서가는 일본을 모방하며 따라잡기 위해 우선 누구나 방식은 달라도 나름대로 저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의 경우, 특히 60년대 이미 저만치 앞서가는 일본을 따라잡기 보다 흉내라도 내며 뒤따르기 위해 후발 주자로서 모든 분야를 배우고 익히며, 살아남기 위해 우선 아침 저녁으로 근무 시작 전이나 끝난 후에도 지친 몸을 이끌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학창시절의 영어공부 못지 않게 사무실이나 학원을 다니면서 조석으로 일본어 공부를 하는 게 상례였다. 일본은 세계대전 와중에도 일부 엘리트들을 선발하여 전략적으로 미국 유학을 통해 전문분야 영어공부를 시켜 서구의 각종 문물이나 산업 관련 제도 및 법령을 즉시 익히고 일본어로 번역 출판하여 자국민이 접하기 용이하게 만전을 기했었다고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특히 당시 선진 해운국으로 이미 앞서가는 일본과 함께 경쟁해야 하는 한국은 61년경 10여만톤에 불과한 선복량이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법령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않았다. 따라서 관련 법령의 독자적인 제정도 힘에 벅차 서둘러 해상운송사업법, 해운진흥법, 선원법, 선박직원법, 선원보험법, 선박등기법, 선박안전법, 선박적량측정법 등등이 처음엔 일본 법령을 모름지기 번역하여 베끼는 데 급급했다. 그밖에도 항만법, 공유수면관라법, 개항질서법, 도선법, 항로표지법, 대한준설공사법, 예산회계법 등등이 갖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제정하고 정비를 서둘렀지만, 심지어 일본법을 오역하거나 해석의 차이를 모르고 입법한 예도 수두룩, 법령 집행에 부산을 떤 경우도 많았던 것을 실무를 통해 필자도 체험한 기억이 새롭다.

L 교수는 이어 회고하기를 "피와 땀을 흘려 전자산업, 철강산업, 조선산업 및 중화학 분야에서 일본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이제 겨우 자식들 배불리 먹이고 비바람 막고 잠자게 되었다. 국제 거지 신세를 겨우 면했다. 소재산업에서 우리는 다시 80년 은인자중, 와신상담으로 일본을 이겨야 한다. 소재산업은 독일 영국 일본이 가지고 있는 기술의 보석인 것이다. 이런 기술은 100년 200년 갈고 닦아야 얻을 수 있는 보석 같은 가치인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근년들어 반도체 분야에 못지 않게 소재산업의 장기적 경쟁력 확보가 우리 산업의 안정적 미래를 좌우하는 또하나의 결정적 요인이 될 것으로 내다보며 긴장감을 채찍질했다.

한편 그는 오늘을 이룩한 저력을 굳건한 발판 삼아 중단없는 전진을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의 신뢰 구축과 산업 정의의 실현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역설하며 경고하듯 "오기를 부리고 뿔대로 내지르고, 전략도 없이 싸움이나 걸고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는 정신으로는, 절대로 도전 할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철강기술을 가져와 '신일본제철'과 '유니온철강'을 이기듯이, 삼성이 반도체 기술을 가져와 '마쓰시다' 와 'NEC '를 이기듯이, 현대가 조선기술을 가져와 '가와사끼' 와 '함부르크' 를 이기듯이, 은밀하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로 각고의 인내와 과감한 실행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도전이고 성취인 것이다."라고 힘주어, 기계공학 분야 학자의 석학다운 충언으로 다그치며 정신일도하여 조금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고 철저한 미래 준비를 역설했다.

지능형 반도체포럼 위원장, 전 서울대 공대 박영준 교수도 실례로 1990년대 메모리 반도체 국가 사업이 끝난 이후 지난 10년간 우리 정부의 연구 개발 지원에서 반도체 전략이 빠졌다고 안타까워 했다. 이젠 시스템 반도체도 기적을 이룰 수 있게 '무어의 법칙' 이 종말을 맞이하는 때가 새로운 국가 반도체 전략의 기회로 삼아야 테슬라를 뛰어넘게 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란 게 문외한 필자의 견해다. 세계에서 드물게 10nm 이하 반도체 기술도 있고 자동차, 컴퓨터, 가전, 스마트폰도 건재하나 반도체는 이미 부품이 아니라 IT 시스템은 물론 전체 국가산업, 안보를 결정하는 기술이 되고 있다고도 역설했다. 요즘에야 겨우 부산을 떠는 모습이 필자에게도 만시지탄의 안쓰러움으로 북바친다.

그는 또 "이제 대한민국은 일본을 넘어서 독일을 이기고, 영국을 이기고 미국을 이겨야 된다. 이것이 우리의 도전의 대상인 것이다. 작금의 한일간의 갈등에 대응하는 국민들의 정서와 정부의 전략을 보며 솔직히 너무 유치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금 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의 통치력과 정치력의 한계를 본다. 시야는 완전히 우물 안이고 아집에 막혀서 포용력은 완전히 좁쌀이다. 고집을 배짱과 리더십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고 자성하며 섬뜩하게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직격탄 버전으로 너무나 근시안적인 위정자나 사회 각계 지도층의 맹렬한 자아성찰을 촉구하기도 했다.

또 L 교수는 "자신을 반성하고 실수를 인정 할 용기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징용이니 정신대니 아픈 역사를 스스로 들추어 국민들의 아픈 정서를 자극하지 말고 대한민국 스스로 조용히 자신있게 소화를 하자. 친일이니 매국이니 죽창이니, 열두 척이니 이런 유치한 단어들로 선동 정치 하는 짓 중단하고, 더 높은 곳 더 먼 곳을 향해서 도전 하자. 국민 여러분 우리의 위상에 상응하는 품위와 위엄을 갖추고 지혜롭게 하십시다." 라고 강조하며 어쩌면 대학 강단에서 속 시원히 함성으로 외치지 못 한 소회를 밝힌 것으로 추측도 된다. 이 나이 여든이 넘기까지 어릴 때부터 필자도 너무나 많이 들어온 귀에 딱지 앉은 어휘 '징용(徵用)과 정신대(挺身隊)' 이야기는 이제는 역사의 선반에 올려두고 싶다는 게 솔직한 소회다.

몇 해 전, 국내 유력 일간지 사설에서 "반일이면 국제법을 무시한 판결도 좋다는 식으론 안 된다"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앞서와 다른 손해배상 관련 기사에서 우리 국민이나 사법부도 반일이라면 엉터리 판결을 내려도 박수를 받는다는 인식을 갖는 일방적 사례는 이제는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의 논조에 일응 수긍이 갔었다. 특히 한일간의 불행한 과거사에 읽힌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는, 국민적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은 양국 산업분야의 상호 협력 발전에 크게 장애 요인이 될것이란 믿음은 필자의 평소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또 필자도 수년간 본 칼럼을 이어오면서 주제나 테마에 따라 간헐적, 부분적으로 언급한 바 있지만 주지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Presidential Committee for the Inspection of Collaborations for Japanese Imperialism)'가 발표한 반민족행위자명단에, 당시의 상황을 인식할 연령대에 속하지 않은 필자가 속속들이 알 길은 없지만, 학창 시절 존경했던 모교 설립의 저명한 교육 지도자나 해운계 대표 지도자로 모셨던 조직의 수장이 그 명단에 올라 있어 황당했었던 기억은 지금도 그대로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세계에 우뚝 서야 할 우리는 더 이상 소모성 이념적 전쟁을 연장하지 말자는 게 필자의 소신이기 때문이다.

맺음말, "이제 그만 기존 질서의 와해와 보복을 중단하고 자유민주주의 기치아래 멋진 미래 설계와 추진력을 갖추면 어떨까요. 한때 어느 사람의 칭찬을 앞세워 자화자찬만 할 것이 아니라, 검증되지도 않은 성과에 연연할 게 아니라, 닥쳐올 미래를 대비하는 원대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로 극히 예사롭지만 함축성있는 집약적 어휘로 모자람 없이 할말을 다한 '와신상담'이란 글은 끝난다. 그러나 필자에겐 눈에 보이지 않게 시사하는 더 많은 언어와 의미가 다가와 뇌리에 머무는 웅변들의 경청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국제정세의 구조적 상황을 고려, 일본과는 정경분리 원칙에 의해 절친 사이는 못 돼도 적어도 서로의 이익을 모두 해치지 않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슬기가 필요하다는 여운은 이 순간도 반추된다. 백번 천번 옳은 말이다.

우리 해운도 그간 80년간의 와신상담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나머지 80년도 또 은인자중하고 와신상담, 빈틈없는 미래를 설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1954년 4월 20일에 출범하여 명실공히 해운업계를 대표하는 한국해운협회(회장:정태순)를 중심으로 뭉쳐 산하 회원 선사가 6,500만G/T, 8,500만D/W 의 선복량을 보유하고 지배선단은 1억톤을 넘는 상선대를 유지, 세계 5위의 해운강국으로 성장한 이면에는 역사적으로 지울 수 없는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 악몽을 지울 수 없다. 1984년에는 일본의 해운산업정비와 유사한 해운합리화 과정,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장기불황, 그리고 2017년 한진해운 파산 등 숱한 위기상황을 맞고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코로나 팬데믹을 거친 현재에 이르러서도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이 성과를 내면서 지난해의 운임수입은 무려 62조 5천억원에 달해, 2016년 한진해운 사태 때의 아픔을 물리쳤고 부침하는 우리 해운 재건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HMM은 초대형 컨테이너선 20척을 기반으로 고효율 저비용 구조로 체질을 개선하며 괄목할 증가세를 보였다.

올들어 다시 운임 하락세가 염려스럽긴 하지만 원양항로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여 국민경제의 젖줄인 해운산업의 국가경제 기여도를 더한층 높여 향후 계속 쨍하고 햇볕드는 시황의 연속을 기대한다. 내킨 김에 수년 전부터 글쓴이 미상의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교하여 열거한 "한국인과 일본인은 이렇게 다르다" 제하의 글이 각종 블로그나 동호인 카페에 많이 올라 문화라는 것이 나라마다 서로 다를뿐 우열은 없다는 말을 전제로 음미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서 이를 옮겨 적으며 독자들의 오해없기를 믿는다.

​01. 한국인은 사소한 일로 다투기만 해도 지금까지 받은 은혜는 뒷전이 되고 원수가 된다. 일본인은 조폭 이상으로 의리를 중시한다. 한번 신세지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다.

02. 한국인은 귀한 손님을 모실 때면 외식을 즐긴다. 그래야 제대로 대접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인은 귀한 손님은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그래야 정성이라고 생각한다.

03. 한국인은 상다리가 휘게 먹어야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냉장고는 반찬으로 꽉채워 숨 쉴 틈이 없다. 일본인은 공기밥에 단무지 3쪽, 김 3장이면 족하게 여긴다. 냉장고는 늘 비어있다.

04. 한국 여성은 대체로 명품 백을 들어야 남부럽지 않다. 하지만 메고 다니는 루이비통의 97%는 가짜다. 일본 여성도 핸드백을 메고 다닌다. 대부분 집에서 자기 스스로 만든 수제품이 많다.

05. 한국인은 부모를 봉으로 안다. 가르치고 키웠더니 더 안 준다고 원수가 된다. 일본인은 자립심이 강하다. 부모 돈은 부모 돈, 내 돈은 내 돈이다.

06. 일본인은 집 크기를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일본 각료들도 20평이면 만족한다. 한국 여성은 남자를 만나면 몇 평에 사느냐부터 묻는다. 작은 평수면 딱지 맞는다.

07. 한국인은 기록에는 빵점이다. 자기 아내 생일도 모르고 지나다가 싸우기 일쑤다.일본인은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메모를 한다. 기록하는 면에서는 일본인이 세계적으로 탁월하다.

08. 한국인은 공금을 눈먼 돈, 떡고물로 알고 있다. 먼저 먹는 놈이 임자다. 일본인은 공금을 무서워한다. 공금 먹다 걸리면 집안 망한다고 생각한다.

09. 한국인은 별것도 아닌 것도 툭하면 소송한다. 통계적으로 일본의 13배가 넘는다.일본인은 웬만하면 대화로 끝낸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것이다.

10. 한국인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뛰기 일쑤다. 교통사고 1위국으로 등극했다. 일본인은 아무도 없는데도 신호를 지킨다. 우리가 볼 때는 멍청한 것 같다.

11. 한국인은 구제품을 명품으로 착각한다. 구제품은 서양에서 입다 버린 넝마다. 일본인은 근무복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데이트할 때도 작업복을 입고 나간다.

12. 한국인은 누구를 만나면 주량을 자랑한다. 양주를 병째 마시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일본 술잔은 병아리 요강만 하다. 째째하게 이것으로 홀짝 홀짝 마신다.

13. 한국인은 의리를 찾기 힘들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이다. 일본인은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4. 일본인은 노숙자도 독서에 열을 올린다. 직장인의 한달 독서량은 7.5권이다. 한국인은 전철을 타면 스마트 폰을 꺼내 게임을 한다. 한달 독서량은 0.7권이다.

15. 일본인은 준법정신이 강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없다. 한국인은 돈버는 일이라면 목숨을 건다. 그래서 못할 짓도 서슴 없이 한다.

16. 일본인은 근검절약이 부자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이자가 없어도 은행을 이용한다. 한국인은 어디 한탕해 떼부자 될 것이 없나만 생각한다. 그래서 사기꾼이 많고 로또가 성행이다.

17. 한국인은 경찰을 우습게 안다. 데모대에게 얻어 맞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경찰은 아마 우리가 유일하다. 일본인은 공권력이 절대적이다. 국민들은 경찰에게 힘을 실어준다.

18. 한국인은 주먹구구로 일을 한다. 정년 후에 사업하다 99%가 망한다. 일본인은 무엇을 하려면 전문가를 찾는다. 그의 조언대로 행동한다.

19. 한국인은 자녀가 추울까봐 옷을 겹겹이 입혀 내보낸다. 옷이 무거워 뒤뚱거리며 걷는다. 일본인은 한겨울에도 반바지를 입혀 학교 보낸다. 추위를 이기는 극기훈련이다.

20. 한국인은 대통령을 우습게 안다. 사고만 터지면 뭐든 대통령이 책임지라고 한다.일본인은 총리 말이 절대적이다. 그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21. 한국인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노인들이 그래서 더 힘들다. 일본인은 누구에게나 '하이하이'하며 깎듯이 대한다. 동방예의지국이 과연 어딘지 헷갈린다.

22. 한국인은 잘못하고도 무조건 오리발부터 내민다. CCTV에 찍혀도 내가 아니라고 발뺌한다. 일본인은 잘못은 끝까지 책임진다. 책임자가 할복자살하는 걸 너무 자주 본다.

23. 한국인은 약속은 해놓고 지키지 않는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하고 변명한다. 일본인은 약속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킨다. 그들에게 약속은 생명과 같다.

24. 한국노조는 회사가 수천억 손실이 나도 성과급 달라고 파업한다. 일본노조는 흑자가 나도 회사의 앞날을 생각해 임금동결을 받아들인다.

25. 한국인은 잘 웃지 않는다. 언제나 화난 얼굴을 하고 다닌다. 그러나 실제로 화난 것은 아니다. 일본인은 잘 웃는다.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보다. 그러나 속마음에는 칼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26. 한국인은 말을 퉁명스럽게 한다. 한국 방송은 싸우는 것처럼 들린다. 일본인은 상냥하게 말한다. 듣다 보면 귀가 간지럽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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