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엊그제 얘기가 아니긴 하지만 최근 잇달아 '금수저' '흙수저' 등 부모들의 경제적 지위가 대물림된다는 이른바 '수저 계급론'의 대두와 이의 확산, 그리고 젊은이들의 자조적인 자기비하나 박탙감에 대해 살 날이 그리 많지 않은 노년의 입장에서 한번 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요즘 심경이다. 개천에선 용이 날 수 없고, 노력해도 바뀌는 게 없고, 티끌은 모아도 결국은 티끌이라고 좌절하며, 오로지 부모가 뒷받침하는 재력이 없으면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부익부 빈익빈'의, 누구나 갖는 절망감에 필자도 공감은 한다.

계속적으로 저성장에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부의 대물림과 불평등이 그 폭을 더할 것이란 우려를 지울 수 없고 특히 인생의 목표 설정, 이의 달성을 위해 한창 장래를 개척하며 열심히 일해야 할 젊은이들이 이미 이 같은 결과는 고착화된 한국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운명적이라 믿는다면 예사 문제가 아님엔 틀림 없겠다. 수저론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 즉 옛날 유럽 귀족은 식사 때 은수저를 썼고 유아에게도 유모가 은수저로 젖을 먹이던 부유한 가정의 표현서 비롯됐다고 한다.

'수저계급론'에서 부터 '21세기 신계급의 탄생', '인간 등급표'라는 어휘가 탄생하여 요즘의 청춘 신세대 사이에 유행되고, 심지어 이를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으로까지 비화, 계급별 정형 유형마저 생기고 있다니 작은 일이 아니다. 수저론이 최근 급속히 번지고 있는 배경은 2030 젊은이들이 부모의 소득과 가정환경이나 사회적 신분 등 출신 배경을 반영하는 생활 정도를 흔히 밥상에서 사용하는 '수저'를 기준으로 상징화 한 데서 비롯된 데는 까닭이 있다.

우선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등으로 나뉘고 발표된어느 자료에 의하면 이는 구체적으로 수입액의 기준표에 따라 나뉜다는 것. 내용인즉, 이를테면 ▲다이어 수저 - 자산 30억원~50억원 이상' 혹은 가구 연수입 5억원 이상(상위 0.1%) ▲금수저 - 자산 30억원 이상 혹은 가구 연수입 3억원 이상(상위 1%) ▲은수저 - 자산 20억원 이상 혹은 가구 연수입 2억원이상(상위 3%) ▲동수저 - 자산10억원 이상 혹은 가구 연수입 1억원 이상(상위 7.5%) ▲흙수저 - 자산 1억원 미만 혹은 가구 연수입 3,000만원 미만.

이는 2,000년대 들어 부쩍 개인의 재산에서 본인의 노력이나 능력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돈이나 부동산이 재산 규모 결정에 결정적 역할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 같이 불평등한 기회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기가 힘들고 상속이 저축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부의 축적 경로가 되는 사회로 빠르게 전이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고 관련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국가 경제는 성장했으나 부의 분배가 비합리적인 결과이며 경제성장률과 실질 소득성장률이 반드시 함수관계에 있지 않다는 논리로 국민적 좌절분위기를 완화하긴 어렵단 결론이다.

무엇 보다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들을 앞질러 노력 여하에 상관 없이 수저의 계급과 인생의 계층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뼈아픈 선입관이나 패배 심리가 팽배하다면 자본주의의 냉혹함이 청춘들을 강타하고 취업조차 어려운 '방황하는 청춘' 2030 세대들에게 젊음을 바탕으로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내겠단 필사의 도전정신으로 완전무장하고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단단한 각오로 임하란 격려도 많기는 하고 필자도 그러고 싶다.

한편 돈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행복의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지만 재화나 물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전제 아래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수저 계급론 자체를 과감히 배격해야 한다는 반론도 드세다. 흙수저를 물고 나와도 경제 규모가 커지게 되면 자기 노력에 따라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는 많다는 것. 신분이 법제화 돼 있던 인도의 카스트제도나, 서구의 신분제도 및 조선시대의 양반과 상민제가 아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흙수저도 왕성한 경제활동과 저축수단을 통해 재산형성이 가능하다는 고무적 주장이다.

심지어 노조가 자녀에게 일자리를 대물림하는 현실을 직시하며 신분상승과 계층 이동의 징검다리 같았던 기회의 사다리가 사라졌다고 해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에서 금수저는 이미 충분히 갈증이 풀린 상태라 우물을 팔 필요가 없지만 흙수저는 아직도 목마르면 계속 우물을 파서라도 금수저에 맞설 수 있게 추격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금수저를 넘어서게 된다는 진인사대천명 같은 격려이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사기 저하된 청년들에게 인생은 마라톤 같이 장시간을 겨루는 경기이기때문에 자기 페이스에 맞춰 대기만성, 유종의 미를 거두는 삶, 그리고 물질보다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삶을 권장하고 싶다. 모두 무한 경쟁시대에 살고 있지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스스로 만족하며 여유로이 살면 좋겠다. 그래서 시저지탄(匙箸之嘆)으로 자기 수저의 신계급론에 몰입, 수저타령만 하지 말고 비록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도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라니 '흐르는 물은 서로 앞서려고 다투지 않는다'는 교훈을 들고 싶다.

흐르는 물은 서로 앞서려고 다투지도 않는다. 물은 흐르다 막히면 돌아가고 갇히면채워주고 넘치면 넘어가게 마련이다. 물은 빨리 간다고 뽐내지 않고 늦게 간다고 안타까워하지도 않는다. 물은 자리를 다투지도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더불어 함께 흐른다. 물은 흘러온 만큼 흘려 보내고 흘러나간 만큼 받아 들인다. 물처럼 살라는 것은 막히면 돌아 가고 갇히면 나누어 주고 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물처럼 살라는 것은빨리 간다 늦게 간다 조급해 하지 말고 앞선들 뒤선들 괘념치 말라는 것이리라. 물처럼 살라는 것은 받은 만큼 나누고 나눈 만큼 받아 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흐르는 물은 못내 아쉽다고 잡아 가두면 언젠가는 넘쳐 흘러 나가듯 가는 세월 못 잊어 붙잡고 있으면 그대로 마음의 짐이 되어 고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물처럼 살라는 것은 미움도 아픔도 물처럼 그냥 흘려 보내라는 것이다. 물처럼 살라는 것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다가 드디어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라는 교훈이다.

필자는 바둑은 커녕 오목도 못 두기에, 수년 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에서도 적용됐는지 모르지만, 이는 프로 기사들이 인생의 교훈과 바둑의 금언으로 애송하는 구절로 바둑의 진리는 평범 속에 있기에 지나친 기교나 기발한 묘수로 단번에 이기려는 것 보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란다. 물이 빨리 간다고 뽐내지 않고 늦게 간다고 안타까워하지 않으며 분별심으로 차별하지도 않으며 바다는 흘러오는 모든 물을 사양않 듯, 젊어서의 선두 다툼이 인간의 성공을 결정하는 게 아님을 명심했음 좋겠다.

한편 필자는 자산이나 재력으로서 누리는 부(富)로 승부를 보기 힘들 경우는 돈 보다 남자의 자존심, 여성도 예외일 수 없지만, 남아로서 누리는 마초이슴(Machoism)격인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상남자(上男子)로 군림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차선책을 권유하고 싶다. 스페인어로 '터프가이'란 의미를 지닌 '마초(Macho:Massive Astrophysical Compact Halo of Object)'는 지나치게 여성을 비하하거나 공격하는 성차별주의자나 무의미하게 거친 매력을 발산하는 온라인 게임 속의 마초 케릭터를 연상시킬 수도 있겠다. 하지만 수저타령 않고 제 손으로 제 밥만 챙길 수 있다면 남성 우월주의자로서가 아니라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신사형 남자" 로 금수저감이 되리란 생각이다.

그래서 끈질기게 노년의 영화 매니어로 남은 필자는 한 때의 브루스 윌리스(Bruce Willis)와 실베스트 스탤론(Sylvester Stallone) 그리고 조니 뎁(Jonny Depp)이나 미키 루크(Mickey Rourke) 정도면 태어날 적 색깔은 몰라도 필자 눈에는 더 값진 수저를 지니고 산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필자는 국가 대표급 A매치와 특별히 관심있는 종목이나 팀 외에는 크게 눈을 뜨지 않는 독특한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근년 들어서는 예사롭지 않다. 자주 여려 종목을 본다.

주장 완장을 찬 토트넘 축구팀의 손흥민(孫興民), 3승을 올린 야구투수 유현진(柳賢振)과 김하성(金河成) 선수, 젊은 탁구선수 신유빈(申裕斌), 배드민튼 챔피언 안세영(安洗靈) 등이 스포츠채널에서 보이면 그들이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으로 낚아 챙긴 금수저에 덩달아 춤을 추고픈 즐거움과 자긍심을 함께 나눈다. 남의 수저를 함께 나누는 황홀감이다. 그밖에도 하나 더 있다. 60년을 넘게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보아온 고려대와 연세대의 매년 열리는 정기전 관람과 응원의 개근상 추억이다.

사학의 최첨단 라이벌 끝판왕전, 학원 스포츠 총아들의 격돌, 사학의 명문 대학스포츠의 양대산맥이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 다음 문제"라 하면서도 축구, 야구, 농구, 럭비, 아이스하키 등 5개종목의 승부에 두 학교는 목숨(?)을 건다. 5종목 중 3패 이상을 기록하는 학교는 총장이 바뀔 수도 있다. 올해도 필자는 당일 독수리를 제압할 호랑이 응원복으로 갈아 입고 80대 이상 백발 응원석의 응원기수가 되어 노년의 금수저를 향유할 마음의 준비가 단단하다.

따라서 승리의 영광은 모교에, 그 훈공은 너희 것이려니, 이 또한 갈고 닦은 실력으로 모교에 올리는 승전고와 꽃다발은 한평생 가슴 깊이 묻고 기릴 수 있는 귀한 수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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