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2023년 9월 15일,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은 인천상륙작전 기념 행사를 첫 주관,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힘에 의한 평화를 구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수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인천항 수로에서 열린 인천상륙작전 전승 행사를 주관한 자리에서 "굳건한 한미연합 방위태세를 기반으로 한미일 안보협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압도적 대응 역량을 확보해 나갈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1960년부터 개최된 이 행사를 대통령이 직접 주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참전 국군과 우엔군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저 하는 윤 대통령의 의지로 기획된 행사로, 한미군 수뇌부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참전용사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한편 인천시는 2025년에 맞게 될 제75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는 참전국의 정상들도 다수 초청하여 1944년 6월 6일 미국과 영국이 주력이 되고 기타 캐나다, 자유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폴란드, 노르웨이 등 8개국의 연합군이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령 노르망디 해안에 15만 6천명이 집결하여 감행했던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오래도록 기념하는 국제적 기념행사와 같이 이를 격상시켜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필자가 겪고 들은 얘기를 모아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 Battle of Inchon)과 1950년9월 15일, 이를 진두 지휘한 전쟁영웅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 General of the Army/1980.1.16~1964.4.5) 스토리를 인천상륙작전 군사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두서없이 정리해 본다.

평생 바다를, 오로지 바다의 지겟꾼 선주들이 뱃길을 일터 삼아 짐을 나르고 돈벌이를 하는 터전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바다는 그밖에도 인간의 먹거리 해산물을 구하는 해전(海田)이요 해저자원의 보고(寶庫)이고 해상 관광이나 레저와 스포츠 광장으로 인간 삶의 공간이란 생각도 든다. 또 국방상 해운을 제4군이라 했듯 오늘은 문득 최근에 복학한 필자의 손자의 전역을 계기로 60년 전 필자의 최전방 군대생활도 향수처럼 떠올랐고 아울러, 국방상 영해의 기능을 다하는 국토 개념과 안보 측면에서 바다의 중요성이 뇌리를 스쳤다. 그밖에도 문득 몇 년 전 개봉된 영화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과 주연을 맡은 '리암 니슨(Liam Neeson)'이 연기를 맡았던 주인공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 Five-Star U.S. Army General)'이 애창했다는 '사무엘 울만(Samuel Ulman)'의 시 '청춘(Youth)'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다시 고찰해 보기로 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의 포성이 울리기 시작한 지 불과 3일만에 우리는 수도 서울을 잃었으며 7월 3일에는 인천까지 점령당했다. 수년 전 자유경제원이 주최했던 '인천상륙작전의 세계전쟁사적 의미' 주제의 세미나에서 당시 양욱(梁旭)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의 수석연구위원이 밝힌 내용을 참고삼아 70년이 흘렀으나 아직 전흔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그때의 전사를 양욱 위원과의 전화 취재를 통해 소상히 재생한다. 6.25가 발발하자 미군의 최초 선발대로 한국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는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7월 5일 오산에서 최초의 전투를 했지만 허무하게 패배했다. 패배한 한국군은 계속 밀려나면서 결국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에까지 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북한군 14개 사단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9월까지 낙동강전선은 붕괴직전의 한국군 5개 사단과 미8군에 의해서 간신히 지탱을 했으나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는 국가가 나섰다. 바로 미국이었다. 스미스 특임대는 허약했지만 미 극동군 사령관은 맥아더 원수였다. 우리 국방부는 북한의 남침에 대비, 우발계획 SL-17을 구상하고 있었다. 최초 기안 1948년에 이뤄졌던 이 문건에는 북한이 침공할 경우 한국군은 조직적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후에 적의 측면을 우회하는 상륙작전으로 반격을 가하는 계획이었는데 한국이 침공을 당하자 맥아더 총사령부는 이 계획 사본을 입수하여 전쟁의 국면 전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블루하트(Blueheart) 작전으로 명명되어 7월4일에 준비되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 최소 7m에서 최대 9m에 이르러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수백 미터의 개펄을 엄폐물도 없이 전진해야만 한다. 개펄에서는 전차나 차량은 이동할 수 없고 도보도 사실상 어렵다. 결국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상륙해야만 했다. 상륙할 장소는 해변의 모래사장이 아니라 방파제와 축대였다.

즉 상륙함을 정박시킨 후 사다리로 올라가야만 하는 등 상륙작전으로서의 악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맥아더는 8월 12일 인천을 상륙목표로 최종 결심, 작계 100-8의 실행을 지시하며 합참에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합참의 반발이 있었고 육군참모총장도 크게 우려를 했지만 결국 트루먼은 맥아더의 선택에 반대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작전 성공확률이 1/5000도 안 된다고 격하했고 한편 잘 못 된 작전이라 되레 기습효과는 엄청날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었다. 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 지도, 함정 접근의 장애물 유무 확인 등 필요한 제반 정보 확보를 위한 노력은 한미 합동으로 이뤄졌고 작전 개시 전 8월부터 한국해군은 영흥도와 덕적도를 탈환했고 8월 24일에 국군의 해군정보국 함명수(咸明洙) 소령이 지휘하는 요원 17명이, 작전명 엑스레이(X-Ray)로 영흥도에 투입되어 사전 정보 획득에 나서 현지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방어진지나 방파제 및 유속이나 수심 등 다양한 정보를 입수했다. 이 과정에서 차량과 장비가 지나갈 정도로 단단한 갯벌의 지형을 찾아내고 팔미도 등대가 건전함도 확인했다.

국군 초계함들이 인민군의 기뢰부설 사실을 감지하고 9월 13일 구축함과 순양함들이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영흥수로 안으로 진입, 해안포대들과 교전이 있었으나 대부분 제압되고 기뢰도 모두 제거되었다. 그러는 사이 상륙부대 본진은 일본의 사세보(佐世保)항에서 9월12일 출발했다. 이제 문제는 상륙유도였다. 이를 위해서 팔미도 등대를 밝혀야만 했다. 이에 따라 트루디 잭슨(Trudy Jackson) 부대는 KLO부대의 도움 아래 영흥도에서 팔미도로 침투하여 작전을 수행했으나 해군첩보부대는 영흥도에서 후퇴를 해야만 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동료들의 퇴출을 지키기 위해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상등병조가 끝까지 퇴로를 지키다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을 했다. 당시 KLO(Korea Liaison Office)부대란 미국 극동사령부의 첩보 게릴라부대로 미군이 관할, 운용했지만 한국인으로 구성됐고,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휴전때까지 계속 활동했다. KLO는 '한국연락사무소', '한국연락반', '켈로부대', '제8240부대'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 동안 수많은 비밀작전을 수행하며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부대 특성상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는 부대로 부대원의 상당수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게 받은 독일군 군복을 입었었다.

드디어 L아워-1950년 9월 15일 03시경 팔미도 등대의 유도에 따라 순양함 4척과 구축함 7척이 수로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함대는 단종진(單從陣/Line of Battle) 전투형태로 이동하면서 월미도에 포격을 가했고 06시가 되자 항공모함들로부터 코르세어(Corsair) 전폭기가 출격하여 포탄과 로켓을 퍼부었다. 마지막으로 상륙로켓함 3척이 해안에 접근하여 4.5인치 로켓을 수백 발 퍼부으면서 제압을 마쳤다. 마운트 매킨리 함에 위치한 지휘부는 L아워(상륙시각)를 06시 30분으로 확정했다. 이에 따라 제1파로 파견된 제1사단 제5해병연대 3대대 해병들은 06시에 상륙정에 탑승하여 비치 그린(Beech Green), 즉 월미도를 향해 진격했다. 제1파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시각은 06시 33분이었다. 제2파와 합류한 상륙대원들은 약 20분의 교전을 통하여 인민군을 제압했고 06시 55분 무선전신국 언덕에 성조기를 꽂으면서 상륙의 성공을 알렸다.

이후 후속 병력들이 상륙하면서 전차와 공병까지 동원되어 08시경에는 월미도를, 11시경에는 소월미도까지 점령을 마쳤다. 비치 그린의 전투에서 인민군은 108명 사망, 150명 실종, 136명 포로를 기록한데 반해 미해병대는 부상자 17명이 전부였다. 12시까지 해병대는 비치 그린에서 완전히 작전소탕까지 마쳤지만 13시부터 간조를 맞이해야만 했다. 이제 다음 목표는 비치 레드(Beach Red)와 비치 블루(Beach Blue)였다. 그러나 물이 다시 찰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공격을 위한 H아워는 17시 30분으로 정해졌다. H아워를 앞두고 병력들은 16시45분, 육군의 수륙양용전차의 출발을 기점으로 활발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포함들은 인천 시내를 사격했고 상륙 로켓함들이 다시 동원되어 20분간 로켓 6천여 발을 인천 시내로 퍼부었다.

비치 레드로 앞장 선 것은 역시 제5해병연대였다. 그 뒤를 미육군 제7보병사단과 국군 제17연대와 해병 제1연대가 함께 했다. 17시 33분 제5해병연대 제1대대 A중대가 비치 레드 왼편에 상륙했다. 예하 돌격 소대들은 상륙함에서 곧바로 사다리를 올려 별다른 문제없이 제방을 넘어 공동묘지 고지로 진격했고 고지가 장악되면서 인민군의 저항은 잦아들었다. 비치 레드의 오른편에 상륙한 제2대대는 운이 좋아 영국 영사관 고지로 향하여 상륙하여 별다른 저항없이 철도를 확보했고 이어서 대한제분 건물까지 확보했다. 점령이 예상 보다 빨라 비치 레드는 병력이 뒤엉켜 혼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문제는 응봉산이었는데 부대간의 위치가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여 어둠이 깔리면서 인민군이 물러난 이후에야 점령이 완료되었다.

한편 인천항 외항과 염전의 동남쪽에 걸친 비치 블루에서도 17시 30분에 맞추어 상륙작전이 벌어져 제1해병연대가 선봉에 나섰다. 이들은 전차상륙함으로 접근하여 다시 상륙장갑차로 상륙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바람과 안개가 깔리고 조류가 빨라지는 등 혼란이 가중되자 상륙 제1파는 향도함의 도움없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조직적인 상륙을 하지 못했다. 일부 상륙장갑차들은 길을 잘못 찾아 인천항 외항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대혼란으로 인하여 이미 어둠이 깔리고 병력의 집결이 한 시간 이상 지연되는 사이에 병력은 피해가 없었으며 대부분의 목표지점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D데이 사상자는 사망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대대적으로 반대했던 이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 됐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된 다음날이 되자, 이미 인천은 해방이 되었다. 미 해병 1사단은 제5연대가 경인국도의 북쪽 루트를 통해 서울로, 제1연대가 남쪽 루트를 통해 서울로 진격하는 사이, 제7연대는 인천수비에 집중토록 했다. 17일부터 진격을 시작한 미 해병들은 이틀간 산발적인 전투를 치르며 18일에는 영등포까지 진격했다.그제서야 북한은 정말로 인천에 상륙작전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군 9사단 87연대 등을 영등포 방어선에 투입하는 등 2선부대를 총동원하여 서울 방어전을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인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북한군 수뇌부는 여전히 주력부대를 낙동간 전선에 묶어 두었다. 미 해병은 9월 21일 제1연대가 영등포 시가전에서 승리하면서 여의도를 거쳐 한강 도강에 성공했다. 북쪽 루트를 타고 온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제1해병연대는 9월 18일 김포비행장을 확보했고 9월 20일에는 행주산성까지 점령한 후에 9월 21일에는 모래내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무악산 일대에 온갖 방어진지를 구축한 북한군 독립 25여단과 78연대의 강력한 저항에 엄청난 고전을 겪는다. 그리고 9월 25일, 미 제 7사단의 병력과 셔먼(M4 Sherman)전차들이 보강되어 국군 17연대와 함께 서빙고, 남산, 장충단을 점령하면서 북한군의 저항도 무너진다. 그러니 이후에도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되어 9월 27일에서야 중앙청을 탈환하고 태극기를 다시 꽂을 수 있었다. 9월 27일 인민군이 서울에서 전원 후퇴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종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결과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 500여 명과 부상 2,000여 명이었지만 적군 15,000여 명을 사살하고 6,000여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 갖는 군사적 의미는 1944년 6월6일 미 영 연합군이 유럽을 탈환시킨 북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Invasion)' 보다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전선의 지연전이라는 지독한 열세 속에서 단 한 번의 군사작전으로 전쟁을 바꾼 지략의 승리였다. 현대에서도 이루기 어려울 정도로 해군-해병대-육군이 하모니를 이끌어내면서 '합동성'을 달성하여 복잡한 작전이 매우 매끄럽게 수행될 수 있었전 작전이었다. 그러나 인천의 성공이 전쟁의 성공을 의미하진 않았다. 맥아더는 이후 인천작전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원산 상륙을 통해 일거에 전쟁을 이기겠다는 맹신에 빠져 기어이 원산상륙을 감행했다. 그러나 지상으로 진격한 우리 국군의 3사단이 상륙병력 보다 먼저 도착함으로써 중요한 전력을 낭비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맥아더 장군의 결단과 실행력은 높이 평가 받지만 게다가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의 핵심인 적 병력 섬멸 보다 적 영토 획득에 집착하는 듯한 현명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단 평가도 받았다.

중국군의 대거 잠입을 알아채지 못 한 채 1950년 11월 24일 전면적인 북진 공세인 '크리스마스 총공세'를 단행했으나 크게 패하면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는 말과 함께 맥아더도 본인의 실패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결론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의 가장 뛰어난 업적이었지만 한편으론 가장 뼈아픈 실패를 불러온 원인이 되기도 했다. 7만 5000명이 261척의 함선으로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은 사전에 침투한 클라크 대위가 밝혀 놓은 팔미도 등대를 활용하여 월미도 상륙을 시발로 여러차례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9월 27일 정오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크로마이트 작전을 성공리에 완료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어 또 하나의 기적을 이루어 냈으나 맥아더는 3차대전도 불사하는 확전주의자 내지는 전쟁광이란 인물로 묘사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맥아더의 주장대로 미군 병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고 만주 폭격과 중국 본토 해안봉쇄를 단행했더라면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고 한국이 통일되었을 지, 아니면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과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장관 주장대로 6.25전쟁이 중국과의 전면전으로 확전되고 결국 소련도 참전하여 3차 대전으로 발전했을지 여부는 오로지 역사의 가정에 속할 뿐이라고 '6.25 전쟁과 미국' 저서에서 남시욱(南時旭) 교수가 밝힌 바 있다. 원자폭탄의 사용을 전제로 한 1차대전 전쟁영웅 맥아더가 합동참모본부에 승인 요청한 만주폭격 구상에는 원폭 투하지점이 무려 26곳에 달했다. 확전론자로서의 맥아더는 실제 중국군의 개입 이후 병력 증원과 만주 폭격을 주장하며 트루먼과 끊임없이 갈등하다가 결국은 유엔군사령관에서 해임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널리 알려진 맥아더 장군과 또 하나의 전쟁영웅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은 누가 선임일까? 두 사람 모두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 육군에서 함께 복무했고 2차대전에 참전했다. 두 사람 모두 원수로 진급했지만 한 사람만이 백악관과 총사령관이 되었다. 조지 워싱턴 이후 11명의 미육군 장군이 대통령직에 올랐다. 대공황을 겪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1910~1925년생 세대, 이른바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 중에서는 맥아더와 아이젠하워가 백악관을 두고 경쟁했지만 맥아더의 10세 아래 부하 아이젠하워가 승리했고 그는 두 번이나 미국의 정치와 군문 최고직에 올랐었다. 미국의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에서 164명 중 맥아더는 1등으로, 10년 아래 아이젠하워는 61등으로 졸업했다.

또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일 때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부관이었다. 맥아더가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대장으로 승진했을 때 아이젠하워는 무명의 중령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2년 뒤인 1941년 아이젠하워는 대령이 되고 곧 준장이 되었으며 1942년에는 소장을 거쳐 중장, 1943년에는 4성 장군, 대장이 되었다. 맥아더는 이때 대장으로 머물러 있었는데 1944년 아이젠하워와 맥아더는 모두 5스타 5성장군, 원수로 승진했다. 하지만 1952년 아이젠하워는 미합중국 3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맥아더는 1951년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UN군 총사령관 자리를 박탈당하고 1952년 퇴역장군이 됐다. 그가 의회에서 연설한 너무나 유명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뿐" 이라 했던 그의 퇴임 연설문 마지막 부분은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며 평생을 군인으로 보낸 노장군의 감회가 감동적이다.

-저는 52년에 걸친 군복무를 끝냅니다. 제가 군대에 처음 입대했을 때, 아직 세기가 바뀌기도 전이지만, 저로서는 소년시절의 모든 희망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웨스트포인트 연병장에서 선서를 한 이래, 세상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그 시절의 희망과 꿈은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 때 가장 유행하던 군가의 후렴구 한 구절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에는 가장 자부심 있게 선언합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 그 노래의 노병처럼 저는 이제 제 군사적 경력을 끝내고 사라지려고 합니다. 신께서 주신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한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말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And like the old soldier of that ballad, I now close my military career and just fade away, an old soldier who tried to do his duty as God gave him the light to see that duty. Good Bye.) - 그리고 "이 세상에 보장된 것은 없다. 오직 기회만 있을 뿐이다"란 회한도 남겼다.

1880년 생인 맥아더는 육사를 수석 졸업하고 1915년 소령, 1917년 대령, 1920년 준장/육사교장(39세), 1925년 소장(45세), 1926년 중장, 1930년 최연소육군참모총장(50세), 1944년 육군원수 등 모두 최연소 기록을 깨면서 육군 최고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그리고 1890년 생인 아이젠하워는 1915년 육사 61등 졸업, 1933년 맥아더 참모, 1941년 대령/준장, 1942년 소장/중장, 1943년 대장, 1944년 육군원수로 불과 3년만에 5성장군까지 진급했다. 50세에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일 때 아이젠하워는 소령계급을 단 전속 부관이었다. 위대한 장군 아이젠하워는 소령만 16년을 달았고 2차대전 때(1939~1945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장본인으로 예편 후 미국의 34대 대통령으로 당선 연임했다. 16년간 소령을 달고 있을 때 가족들에게도 민망하여 군인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그만 둘 생각을 했으나 부인이 "여보, 전 당신을 믿어요. 진급 생각 말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반드시 당신에게 기회가 올거예요"하며 위로했단 얘기는 감동적인 일화로 남는다.

한국전쟁은 남북 쌍방으로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를 냈으며 북한은 인구의 28.4%인 272만명을 사망과 난민으로 잃었고 남한은 133만여 명을 사망자로 잃었다. 국방부 기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 발발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전쟁중 한국 내 미군 사망자수는 36, 574명(적군에 의한 사망 33,741, 비 적군에 의한 사망 2, 833), 부상자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특히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142명, 그 중 35명이 전사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사단장이 전사하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며 자기 자식들마저 참전시켜 전사를 당하게 하는 장군들과 남의 나라 전쟁에 36, 574 명의 전사자를 내고도 태연한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특히 미 8군사령관 밴프리트 장군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중위가 1952년 4월 2일,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 폭격을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세시 김포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 후 실종됐으며 적지에서의 수색작업을 무모하다고 일은 너무나 슬픈 감동적 스토리로 인구에 회자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때가 73년 전, 필자가 9살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52년 12월 퇴역후 미국의 제34대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된 아이젠하워는 한국전 조속 해결을 위해 취임전이라도 한국을 방문하겠단 공약을 지켜 우리나라를 방문했었다. 당시 필자 고향 시골에서도 '아이크(Ike/아이젠하워 애칭)의 방한을 3천만은 고대한다"는 현수막과 선전물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경향 각지에서 열렬히 환영하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 그리고 맥아더 후임으로 리지웨이(Matthew Ridgway) 사령관 뒤를 이어 한국전에서 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Van Fleet) 사령관을 찾아 역시 한국전에 참전, 미 3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본인 아들 존(John Eisenhower) 의 소식을 물으며 나눈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 지상 보도의 일화도 필자는 잊을 수 없다.

<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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