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근년 팬데믹의 짧은 호경기로 개선된 재무 여력에 힘입어 한 숨을 돌리던 우리 해운이 작금 느닷없는 세계경제 위축으로 인한 글로벌 경기 둔화와 해상 물동량 감소에 따라 앞으로의 시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해운 불황과 온실가스 규제로 어려움을 겪으며 업계 장래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전망을 접하니 비록 해운 변방에서나마 관심 많은 퇴역병의 한 사람으로 큰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필자는 46년이란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문득 엊그제 처럼 가까이 느껴지는 '제1회해운의 날' 행사에 생각이 머물자 그 시절 회상의 여로를 달리는 가을 연가같은 판타지에 자기 최면을 걸며 하염없이 반추되는 흘러간 추억의 실타레를 빛 바랜 적하목록을 체크하듯 훑고 헤집어 본다.

'항만청(港灣廳/Korea Port Outhority)'은 1976년 3월 13일, 발족하여 이듬해 12월 6일, '해운항만청(海運港灣廳/Korea Miritime and Port Administration) 으로 개칭됐다. 1977년 3월 13일, 독립 외청 출범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1회 해운의 날'을 개최했던 일과 정부 담당 부서와 함께 한국선주협회(현 해운협회) 몫의 실무를 담당하여 역사적이고도 거국적으로, 참으로 추억에 남는 거창한 행사를 치뤘던 일은 요즘은 모든 게 하루만 지나도 기억에서 사라지지만 그때의 여러 일들은 지금 이 순간도 생생한 기억으로 되살아나고도 남는다.

우선 1976년 3월 13일 항만청이 새로운 해운행정의 최고 집행기구로 출범하기 전, 먼저 정부기구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1955년, 해무청장 산하에 감리과, 해사과, 조선과를 거느린 해운국과 수산국, 시설국 등 3국으로 운영됐다. 이어 1961년 정부조직 개편으로 해무청이 교통부로 개편되어 당시 해운국 해사과는 내항계, 외항계, 선원계, 검사계로 업무가 분장됐다. 1970년 2월 다시 조직법을 개정, 교통부 해운국 산하에는 선박담당관, 통신계획담당관을 비롯하여 내항과, 외항과, 항만진흥과, 항만지도과, 선원과, 선박과를 두고 부산항만관리청과 인천, 군산, 목포, 여수, 마산, 울산, 포항, 제주 등 지방해운국을 신설했다.

필자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선주단체로 직장을 옮긴 1970년대 초반까지는 활자매체의 취재활동에 종사했었다. 당시 군 출신으로 부산시장을 거쳐 1966년부터 제14대 서울시장에 임명돼 불도저란 별명을 얻으며 오늘의 서울특별시 기초를 만든 김현옥(金玄玉)시장 시절, 서울시청을 출입하다가, 이어 재무부 관세국에서 외청으로 독립, 초대 청장으로 발탁된 이택규(李宅珪)의 관세청을 거쳐 김구(金九) 선생 2남으로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김신(金信) 장군이 장관으로 부임한 교통부로 출입처가 바뀌게 됐었다. 희미한 기억으로 정영훈(鄭泳薰) 해운국장과 김완수(金完洙) 육운국장, 김상진(金相珍) 선박담당관, 김병훈(金秉薰) 내항과정, 최각(崔角) 외항과장, 이석환(李錫煥) 선원과장, 김재승(金在昇) 선박과장과 김준경(金準卿) 항만진흥과장, 박수환(朴秀煥) 항만지도과장을 상대로 취재를 했고 역시 군 출신 오용운(吳容雲)의 철도청장과 이한림(李翰林) 사장이 맡은 관광공사까지 커버를 했다.

그리고 1976년 출범 당시 강창성(姜昌成) 초대 청장과 함께 결성된 항만청은 김정학(金正學) 차장, 장영우(張榮宇) 기획관리관, 배광호(裵光鎬) 해운국장, 성한표(成漢杓) 항무국장, 이문섭(李文燮) 시설국장과 민영환(閔泳煥) 부산지방청장과 이종성(李鐘成) 인천지방청장 등이 해운 항만행정의 간부직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통부 시절은 당시 젊은 최훈(崔薰), 최장화(崔章和), 장학범(張鶴範), 이원(李元) 사무관도 기억나고 당시 기자실 출입 기자단 총 27명은 임유순(任裕淳)의 바톤을 이은 선우만진(鮮于萬鎭) 공보담당관이 맡아 활동했고 필자도 육운, 항공, 관광국을 두루 커버하느라고 숏다리로 쏘다니며 무척 애를 썼던 것으로 회상된다.

한편 필자는 시인과 작가 경력으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거쳐 상공부 장관과 부흥부 장관을 역임 후 대한해운공사(KSC) 사장에 취임, 한국선주협회 회장을 맡은 1900년생의 주요한(朱耀翰) 회장의 권유와 한국선주협회의 스카웃 제의에 솔깃해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 나서 겪은 해운계의 가장 큰 변화가 바로 항만청이 발족한 일이라 더욱 기억이 생생하다. 무엇 보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일은 항만청 출현과 온 해운계가 떠들석 했던 '제1회 해운의 날' 행사였던 것 같다. 1977년 3월 12일, 장충동 국립극장서 '사해약진(四海躍進)'이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기념 휘호를 앞세워 국군 보안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육군소장 출신 강창성 항만청장과 해군참모총장 출신 이맹기(李盟基) 선주협회 회장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용배(金容培) 협회 이사장 등이 함께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최경록(崔慶祿) 교통부장관을 주빈으로 모시고 '제1회 해운의 날'이란 역사적 행사를 개최했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이맹기 제독을 회장으로, 김용배(金容培) 대장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사무국의 조사, 홍보 업무를 맡고 있던 30대 중반. 이 회장은 5.16에 참여하여 대한해운공사(KSC) 사장을 역임 후 코리아라인(대한해운)을 창업하여 항만청장과 함께 해운의 날 행사 준비에 열정을 다해 준비하며 청와대를 오간 끝에 조선업과 해운업에 관심이 많은 박 대통령이 쓴 '사해약진' 이란 휘호를 보고 전 해운업계가 환호하며 감격했던 일은 필자뿐 아니라 이를 기억하는 70년대 해운계 출신 시니어들이라면 그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 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그 시절 협회 사무국의 총수, 이사장으로 부임한 김용배 장군은 서울법대를 졸업, 육사 교장과 17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대한중석과 호남비료 사장 등을 지낸 마초형 예비역 대장으로 최경록 장관, 이맹기 회장, 강창성 청장과 함께 해운계의 필자 직속 상관은 별들의 잔치를 방불케 했다. 해운업계의 비상계획부장도 중앙정보부(CIA)나 사관학교 출신의 쟁쟁한 전역 대령급이고 보면 일반병 육군 하사 출신의 필자는 정부 주도 을지연습 같은 예비군 훈련이 실시되는 기간 중 해운항만청의 상황실에 들어서면 현역 시절 1군사령부 예하 독립중대에서 육군 대위를 부대장으로 하늘같이 모시고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던 인제군 원통리에서 복무한 경력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행사 얘기에 앞서 항만청이 출범하자 우선 그해부터 정부의 해운.조선 종합육성방안이 확정되고 대한해운공사가 극동운임동맹(FEFC) 및 동맹내 ACE그룹에 가입하는 계기를 맞아 같은 해 9월에 풀 컨테이선 '코리안 리더호'가 최초로 미국항로에 취항을 개시하기도 했다. 또 정부간해사자문기구(IMCO/IMO 전신)의 스리바스타바 사무총장이 한국을 방문했는가 하면 정부 주도 제1차 계획조선이 처음 발주하게 되었다. '아세아상선(현대상선 전신)'이 설립됐고 미포항 및 온산공업항을 착공하는 등 신설 항만청 출범을 계기로 해운 항만업계가 도약하는 각종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편 제1회 해운의 날이 거행된 1977년 말,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와 온 국민이 한결같이 수출입국 기치아래 그리도 소망하던 100억불 수출이 달성되는 가슴 벅찬 목표를 달성하는 감격을 맞기도 했다.

이어 수출상품 99.7%를 선박으로 운송해온 국가기간산업, 한국해운의 놀라운 업적으로 1995년 1000억불, 2004년 2000억불, 2006년 3000억불, 2008년 4000억불에 이어 2011년에 5000억불을 달성한 후 수출입 무역규모 달러를 유지하고 웃도는 세계 무역 강국으로의 자리를 지켜나가게 됐다. 또 1960년 초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의 효율적 시행으로 산업구조의 개편과 경중공업의 발전 등으로 국내 생산 규모가 급격히 늘어남과 아울러 수출입물량 증가에 의거 원자재 도입량 급증에 따른 해상물동량 적기 수송을 위해 정부는 UN개발계획(UNDP) 기금에 의한 항만개발계획의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결과 항만건설에는 연속적인 집중투자가 불가피하고 우리의 내자만으로는 방대한 투자규모를 감당하기 어려워 대외 장기저리의 차관선을 찾던 중에 IBRD(세계개발은행)가 부산항과 묵호항 건설에 당시 8,000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여 청 탄생의 계기가 된 터였다.

차관 공여 전제조건 '포토 오소리티(Port Authority)' 설립의 권고로 전국 항만의 건설 및 관리업무를 관장할 별도 정부 기구, 항만청 설립을 위해 1975년 12월 31일자로 정부조직법을 개정 공포하기에 이르렀다(법율 제2886호). 드디어 1976년 3월 13일 대통령령 제8019호로 항만청 및 지방항만관서의 직제가 공포되어 '항만청(Korea Port Authority)'과 지방청이 발족함에 따라 그해 3월 19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263번지 소재 삼양빌딩에서 현판식을 갖고 교통부 외청으로 역사적 출범의 기치를 드높혔던 것이다. 이어 해운입국의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77년 12월 16일자로 명칭을 '해운항만청)'으로 변경하게 됐던 것이었다(법률제3011호).

이같이 부산항 BCTOC(자성대컨테니어전용부두) 건설의 자금을 댄 IBRD가 투자금의 환수를 위한 요청에 의해 교통부해운국과 건설부 항만건설국의 기능을 합한 항만청장으로 부임한 강 청장은 업계 순시 첫 마디가 "항만청장은 비록 차관급이지만 대통령께서 수출입국의 목표 달성을 위한 해상운송의 중요함을 고려, 국무회의에 배석토록 하라는 각하의 명을 받았다"는 얘기를 필자도 자주 들었으며 윤필용(尹必鏞) 사건의 보안사 시절 실세를 과시라도 하듯 초대 청장으로써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던 인상을 받았고 퇴임 후에도 회의 때마다 배석해서 열심히 메모하던 기억도 새롭다.

해운계의 행정 수장이 교통부 장관에서 해운항만청장으로 강등된 건지 아님 교통부 해운국장에서 항만청장으로 격상된 것인지 이리송하다는 우스개도 있었다. 여하간 개청 첫돌을 맞아 이날을 기념함과 아울러 범국민 해운사상 고취와 홍보를 위한 목적의 해운의 날을 개최키로 결정되자 다음 해에 열릴 행사계획이 전년 세모부터 요란하게 시작되었다. 행사 날자는 개청 기념일 77년 3월 13일이 일요일이라 하루 앞당겨 12일 토요일로 결정됐다. 정부측은 항만청 국과장급 전체를 위시하여 행사준비 실무책임은 행정관리담당관, 훈포장 상신은 총무과장, 대외홍보는, 정부측은 당연히 공보담당관으로 정했다.

업계 홍보는 조사부장 필자가 실무책임을 맡고 선주협회를 주관단체로 하여 해운.항만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청 산하 전 업체가 참여토록 했다. 소요 경비는 업종의 비중에 따라 적의 배분, 갹출하여 선주협회가 일괄 지출토록 집행을 위임하는 방식을 택했다. 대통령 휘호가 정작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는 몰라 고전을 들추기도 하고 한문 학자를 찾아도 가고 관련있는 원로급에게 해석을 부탁해서 이를 터득하고 난 강창성 청장은 휘호의 뜻을 업계 및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독려를 했다. 중국 고전에 '四海(사해)'는 천하를 일컬음이며, 천하는 곧 세계를 의미하고, 이는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해운의 미래상과 당위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부각시키기로 한 것이다. 필자는 우선 이를 정성들여 복사를 해서 전 회원 선사 사장들에게 배부하고 현관이나 회의실 등 보기 좋은 위치에 걸도록 독려하며 전달했다.

항만청 진영일(陳永日) 공보담당관은 정부 출입 기자단을 상대로, 업계 홍보를 맡은 필자는 전문지 기자들을 상대로 처음 맞는 해운의 날을 전국적으로 최대한 널리 알리란 지시를 받았다. 행사를 앞 둔 한 달 전부터 광화문을 비롯한 경부고속도로 톨 게이트 등 11개소에 대형 아치를 설치했다. 또 서울 시내 5개소에 선전탑을 세우는가 하면 식장인 국립극장에도 거대한 현판을 부착하여 행사 분위기를 띄우는데 최선을 다했고 간간히 행사진행 중간 체크를 위한 점검을 일삼았다. 또 기념 패넌트를 만들고 기념우표를 발행하는가 하면 3만6천갑의 기념 담배를 만들어 일선 말단 직원에서 부터 항만 등대수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전달했다.

드디어 1977년 3월 12일(토) 오전 11시 기념식 당일에는 '해운의 노래'를 작곡하여 연습한 숭의여고생 120명과 경찰악대를 데려오는 등 아침 일찍 부터 전 준비 요원들이 현장에 미리 나와 주빈 동선을 따라 철저하게 리허설도 했다. 당일 기대하던 행사의 막이 오르자 국립극장 행사장은 축제의 물결로 들끓었다. 최장관을 주빈으로 행사가 시작되자 강창성 청장은 "현재 우리의 해운세력은 선복량 3백만톤을 돌파하여 세계 제19위의 해운국으로 발전했고 올해 안에 50만톤을 더 늘려 6억달러의 운임수입을 가득, 1981년까지 선복량 6백만톤, 15억달러의 운임수입을 달성하겠디"고 강조했다. 46년이 흐른 지금, 대표적 경기 민감 업종으로 긴 불황과 짧은 호황을 겪고 한진해운의 몰락 등 격심한 부침을 되풀이 하면서도 오늘날 한국이 세계 G-5 해운세력으로 8000만톤의 선박 보유에 1억톤에 달하는 지배 선단을 보유한 해운강국 세력을 유지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이고 있는 사실은 수출입국, 해운입국의 옛 표상이 살아있다는 증거로 보인다.

수상 내역은 한국 해운 역사상 최초로 밤양전용선(범양상선)의 박건석(朴健碩) 대표와 조양상선(주) 박남규(朴南奎) 대표의 동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77개의 유공, 해운 및 항만 업체와 종사자들이 개인 포상을 받는 쾌거를 맞았다. 61년 총 10만톤에 불과하던 선복량이 15년만에 30배로 늘어났고 해운관서도 외청으로 설립했으니 할 일도 많았겠지만 당시를 회상해 보면, 선박 도입문제 등 현안을 다루는 당국이나 업계의자세들이 진지하고 치밀했고 한 집안 살림을 같이 꾸려가듯 머리를 맞대고 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개청 후 신설 부처라 각 부서별 인력도 많이 필요했기에 행정고시를 거친 사무관도 동시에 다수가 배치되어 활발하게 일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기자실을 떠나 업계 구심단체 선주협회로 앞서 와있던 필자도 한 식구처럼 어울렸었다. 50년이 가까우니 여러 보직을 두루 섭렵하며 관리관급 이상으로 봉직했던 이들도 지금은 모두 퇴임했지만 그 당시 항만청에 왔던 17회 공채 출신 손순룡, 김종태, 김성수, 최정상, 허범도, 이기찬, 안세영, 이정환, 이갑숙, 정이기, 최낙정, 이용우, 서정호, 박원경 등으로 요즘도 더러는 간혹 만나면 70년대의 추억을 함께 더듬는 노스탈지어 말벗 삼아 옛 얘기로 수런대곤 했으나 그마저 최근에는 해양회 서예실이나 가끔 들러 몇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고작이다. 어느덧 여든을 넘고 보니 젊기도 했거니와 46년 전 그때가 참 좋았었던 것 같다는 잊을 수 없는 추억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다는 생각이다.

<편집위원 서대남(徐大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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