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서대남 편집위원

갑진년(甲辰年), 용(龍)띠 새해를 맞아 필자 스스로도 깜짝 놀랄 여든 나이에 3년을 더하고 보니 흔한 상투어, 인생무상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내 삶이 깊숙히 황혼에 기운 게 틀림없나 보다. 따라서 변방 기슭에서나마 반세기를 웃도는 세월을 더러는 보람있고 자랑스럽게, 때로는 덧없이 보낸 해운업계에서의 일생과 그 뒤안길이 노스탈지어로 아롱져 자주 뇌리에 떠올라 이젠 뭔가 지난 세월을 정리해야 할 때에 이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 약관 20대부터 여러 부처를 거쳐 마지막 출입처였던 교통부에서 육운, 항공, 철도, 관광 분야에 앞서 유독 해운과 물류분야에 관심을 갖고 발빠르게 쏘다니며 취재차 또는 업무 수행상 만났던 숱한 바다와 해운 물류계 인물들을 그루핑해서 반세기를 웃도는 옛 시절을 회고하며 추억해 본다.

한국 경제의 도약기 젊은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필자가 해운계 보학(譜學)을 전공했단 말을 들을 정도로 비교적 많은 인사들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첫째, 취재와 보도가 주업인 매스컴에 종사하며 여러 부처를 출입한 취업 직종의 특성상, 둘째는 해운업의 구심점 역할을 다하는 '한국선주협회(지금 한국해운협회)'란 선주단체 근무의 성격상, 셋째는 선박 선원 등 해상업무를 맡았던 보직상, 넷째는 웨이버(Waiver) 업무 담당으로 외국적 선사 및 국제해운 대림점 종사자들의 민원 업무를 맡았고, 또 하나 더 다섯째는 활동 영역의 에스컬레이션적 개성으로 인해 나이와 사회적 직위나 관장 업무에 비해 특별나게 여러 사람들과 교호하며 발품을 많이 판 탓에, 만나서 대화하고 업무나 행사때 인연을 맺은 인물이 관계나 업계에 유달리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타칭 '마당발'이란 얘기를 들으며 지금까지 살아 온 것 같고 역시 결정적 요인은 해운협회가 필자 를 스카웃한 홍보나 조사업무 주특기와는 전혀 다르게 어느날 갑자기, 승선경력과 해상 경험이 풍부한 해기사, 선기장 출신이 맡아야 하는 협회 '해무부장'이란 부서를 맡은 때부터 관장업무가 상전벽해로 디비에이션, 제2의 삶을 살게 됐기 때문이었다. 낙동강과 한강서 나룻배 몇 번을 타 본 경험 밖에 없는 필자가 졸지에 해무부장을 맡고 보니 천지를 모르는 낯선 업무들과 날마다 부딪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선박이나 선원정책 그리고 해운관련 각종 법령과 국제조약이나 협약에 포위당해 오금을 쓸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IMCO(정부간해사자문기구)의 STCW(선원의 교육훈련, 자격증 및 당직에 관한 표준)를 비롯하여 ILO(국제노동기구) 문제, MARPOL(해상오염방지협약), SAR(해상인명구조협약), CORLEG(국제해상충돌예방규칙), GMDSS(국제해상조난안전제도), PSC(항만국통제) 등등 이를 파악하고 팔로잉하기에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우선 한국해대와 목포해대의 승선학과 커리큐럼 전반에 걸친 목차부터 익히며 '서당개 3년 풍월과 식당개 3년 라면'의 어깨너머식 공부를 언론고시나 사법고시를 준비하듯 줄곧 머리띠를 두르고 집에 와서도 금주령을 내리고 예비군 훈련도 연기하며 밤낮 독학을 했다.

그리고 해상경험과 승선경력(?)을 쌓기 위해 틈틈이 양개 해대의 한바다호와 유달호 등의 재학생 원양실습에 합류, 동남아 일원과 인도의 갠지스와 캘커터, 버마의 랑군을 비롯하여 키룽과 나카사키, 홍콩, 코베 등지의 항만을 선원수첩 없는 실습생으로 견학을 했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업무 숙지의 일환으로 관선을 하거나 예인선에 오르고 도선선에 편승, 파일러트와 함께 래더를 타고 갑판에 올라 도선 현장을 견학도 하며 짝퉁 해기사로서 마도로스 경력을 익히기에 전력을 다했다. 삼천포항 파일럿 스테이션에서 연료탄을 싣고 입항하는 한해대 13기 허진구(許璡九)선장과 본선에 합류해서 코파일럿팅 도선 현장을 견학하며 화력발전소를 찾은 기억도 엊그제 같다.

세계적 국제기구인 IMCO(IMO)나 ISF 및 LLOYD 등의 총회와 국제회의에 참석도 하고 선원 및 항운노조와의 단체협약 및 KR을 위시한 예도선 조직이나 단체의 업무는 물론, 항만요율 조정과 웨이버 업무에도 전력하며 짜가(?) 해기사가 진골로 영역을 넓혀가기에 바쁜 일과로 수년을 강행군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했는데 알고서도 어려운 바다에 배를 띄워 돈벌이를 하는 해운기업의 가장 핵심적인 근간이 되는 본선 자체에 대한 지식이나 이를 운행하는 승선 요원들의 교육 훈련 및 선박과 선원에 관련되는 각종 법령 및 안전문제와 보험문제, 그리고 국제항로에서의 제반 협약 이행과 대책 수립업무가 나날이 끊임없이 큰 과제로 닥쳤다.

당시 산별 노조 중 10만 조합원을 거느린 막강 전국선원노동조합을 상대로 사용자 측의 노사대책 수립과 시행, 그리고 선종별 선형별 단체임금협상은 너무나 벅차, 고무새총도 버거운 필자에게 LMG나 박격포를 안겼으니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의과대학을 나오지 않은 돌팔이 의사가 메스를 잡고 수술 환자 앞에서 당황하듯 선박과 선원에 대한 현안 당면문제를 두고 긴장하며 제앞을 못가리고 혼쭐나게 수 삼년을 지내다 보니 지성이면 감천이려니 그래도 꾀가 생기고 요령도 늘어 드디어 반풍수가 지관이라도 된 양 행세하는 비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또 교통부 출입 기자 시절 해운계를 중점적으로 취재하며 익힌 낯도 있거니와 업무 수행상 당시 내로라 하는 해기사 출신들과 함께 주요 정책 입안에 참여하다 보니 해운, 선박, 선원, 국제문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실무적으로 깊숙히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승선 경험이랍시고 자주 배도 타보며 육상 근무에 접목하고 보니, 협회가 소집하는 각종 회의나 민원업무 처리차 사무국을 찾는 주니어 해기사 출신들은 해무부장인 필자가 어젠더를 택해 체어맨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으레 해기사 출신으로 알고 "몇 기(期) 이십니까?"로 묻는 질문에는 한결같이 미리 준비된 모범 답안 첫번째가 "난 와일드 카드, 조커 기수다"였다.

즉 필요나 상황에 따라 어느 기수에고 끼어 넣을 수 있는 기수란 뜻이었다. 두번째는 "한국해대는 16.5기, 목포해대는 11.5기다"였다. 1942년 1월생이니 한국해대라면 16기나 17기 상당이고 목포해대라면 11기나 12기 상당이란 뜻이렸다. 그래서 알만한 사람끼리는 다 아는 우스개로 "그때 그때 다른 롤라코스트 기수, 유일하게 소숫점 기수 16.5기와 11.5기"로 농담을 하며 이는 지금도 통하고 있는 절친들과의 조크다. 한편 당시는 급격히 늘어나는 수출입 화물과 선복량을 충족시킬 해상직원의 교육과 양성이 수요를 따르지 못 해, 협회 정책기구인 해무위원회를 열어 선사 사장들과 담당 중역들이 연일 모여 그 대책에 골몰하던 때가 생각난다.

한국해대 단기 해기사 양성 코스인 전수과의 부활, 부산과 인천에 선원학교 신설, 해기연수원의 설립과 기능확충, 해기사의 해외취업 억제 등 부족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열불나게 머리 맞대고 대책수립에 불철주야 모두가 애쓰던 모습과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그래도 재미있어 했던 그때가 보람찬 추억으로 영혼을 적시며 마음 한켠을 적셔온다. 특별히 잊혀지지 않고 생각나는 일은 협회 회장단이 중심이 되어 한해대 연습선 '한바다호' 운영 지원을 위해 '실습선 후원회'를 만들어 국내에 입항하는 5,000G/T 이상의 상선들은 무조건 척당 20,000원씩을 강제 징수키로 하고 필자 해무부장이 직무규정에도 없는 악명 높은 세리(稅吏) 노릇을 했던 일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목해대 유달호까지 확대 적용했던 일도 흐뭇했고 자체 실습선으로 소화 못 하는 실습생들을 국적선사에 의뢰하여 억지 분산 실습을 시키던 고충은 참으로 너무나눈물겨웠고 지금도 가슴 찡한 추억으로 남는다.

따라서 가끔 중앙 여러 행정부처를 비롯, 해운과 관련된 교통부, 철도청, 해운항만청, 해양수산부, 국토해양부 등 해운정책 관련 행정당국과 업계 실무를 거치면서 취득한 실무보다 우선 한 시대를 함께 했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일방적인 환상대화를 나누며 그려 볼 때가 잦은 건 아마도 나이탓? 초창기 한국해운을 이끌어온 인물 가운데 해기사를 중심으로, 올들어 72기를 배출한 한국해양대학 출신 중 우선 1기에서 10기까지의 졸업생, 소위 싱글 기수들 중 인연이 닿았던 선배들과의 만남과 교분과 업무 등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회상하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한다. 또한 친소에 관계없이 취재 기자 시절이나 업무 수행을 통해 필자의 뇌리에 남아있는 일방적인 기억을 되살려, 육상 근무 인물 중심으로 소설로도 모자랄 숱한 사연을 지면 관계상 거명정도로 대신하는 아쉬움도 밝혀둔다.

어쩌면 필자 스스로의 삶과 과거를 훑어 되돌아보는 자전적 의미의 회고록을 엮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짧지 않은 지난 세월동안 지상 보도나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지만 이미 작고하신 분들껜 먼저 다시 한번 이 기회에 정중히 묵념하며 삼가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한편 생사 여부와는 관계없이 필자가 그동안 해운계에 근무하면서 짧게 혹은 길게 얼굴 맞대고 함께 활동했던 싱글 기수들과의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그 편린들을 슬라이드처럼 엮어 회억의 파노라마로 퍼즐 맞추기를 하려드니 당시의 정확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소속과 직위는 떠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안기수(非期數)' 필자 보다, 많게는 15~20년, 적게는 7~10 연상의 선배요 멘토에 해운계 한가족으로 그 대열에 끼어 함께 보낸 세월은 돌이켜보면 한마디로 큰 영광으로 점철되고도 남는다.

또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해기사 양성기관으로 손꼽히는 상선사관학교 한국해대가 1945년 11월의 역사적 출범과 개교의 주역이었던, 동경고등상선 출신의 기관장, 해당(海堂) 이시형(李時亨) 초대학장과 11대 학장을 지낸 삼주(三洲) 윤상송(尹常松) 박사를 비롯, 임기택(林基澤) 세계해사기구(IMO) 사무총장(항해과 29기), 그리고 문성혁(文成赫) 직전 해양수산부장관(항해과 32기) 등 한국해대를 거쳐간 기라성 같은 큰 별들도 차례로 거명할 뒷날을 약속한다. 아울러 차제에 필자가 우스개 삼아 평생 외는 말, '한국해대와 목포해대의 명예졸업생'과 '한국해기사 양성의 양대 산맥인 한해대와 목해대의 종신 홍보대사', 그리고 비록 짝퉁에 무면허 해기사지만 그래도 자가 부여한 '해기면장은 항해, 기관, 통신 등 트리플, 3개면허 소지자'를 자처한다는 유머와 희망과 사랑도 감히 덧붙인다. 또 하나 명예졸업장을 받은 필자가 2023년 국립목포해양대 '자랑스런 해양대인상'을 수상하고 명예의 전당에 헌정됨을 계기로 목포해양대학 출신들과의 업무와 교분도 게재할 계획도 밝힌다.

【 1기 】필자가 1960년 후반에 만나 업무상 또는 그 시대를 함께 하고 기억에 남는 1기생들은 주로 항해과 출신으로 김동화(金東華) 라스코해운 대표, 박현규(朴鉉奎) 고려해운 전무, 범양전용선 박현호(朴鉉皓) 전무, 손태현(孫兌鉉) 한국해대 11대학장, 양학권(梁學權) 조광해운대표, 이준수(李俊秀) 한국해대 13대학장 , 이용규(李龍奎) 부산항 도선사, 정희정(鄭熙亭) 도선사협회장, 허동식(許東植) KR회장과 그리고 기관과 김상진(金相珍) 교통부 선박담당관 등이다. 박현규 한국해사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은 고려해운, KCTC를 거쳐 아직도 살아있는 한국해운의 전설적 현역으로 건재하고 근년100수로 작고한 손태현 학장은 마지막까지 집필을 계속했고 운전면허도 갱신, 핸들을 잡았단 소문도 들었다.

부산과 서울서 자주 뵌, 천성이 학자타입 이준수 학장의 어진 모습과 필자 부산 근무 때 중앙동 주변서 최재수 (崔在洙), 허일(許逸) 교수와 함께 막걸리를 대작하던 추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교통부 출입기자 시절 김신(金信) 장관과 정영훈(鄭泳薰) 해운국장과 함께 일하던 선박 담당관 보직일 때 첨 만났고 부산지방청장과 KR 회장으로 활동했던 거제 출신 김상진 회장은 긴 세월을 두고 만나면 늘 70년대를 얘기했다. 국내 처음으로 한국선급(KR)을 만들어 동분서주 골몰하던 넉넉한 품성의 허동식 이사장, 도선사협회장을 맡아 학계 정세모(鄭世模) 교수와 김길성(金吉成) 도선사를 실무로 대동, 선주협회측 실무책임 필자의 파트너로 대결시켰던 정희정 회장과는 도선요율 줄다리기를 일삼던 때도 엊그제 같다.

결국 마무리는 최학영(崔學永) 후임 회장을 통해 선주협회와 협의 끝에 한국해사재단을 탄생시켰던 핸섬보이(?) 정 회장이 회의때마다 폴드식 일제 간다 돋보기를 쓰고 나타나 넘 신기하던 모습 또한 50년이 된데도 기억 생생, 눈에 선하다. 그리고 협회 회의에 참석한 박현호, 박현규 형제가 동급생이란 사실도 볼 때마다 참 신기했고 또 양학권 도선사는 아들과 손자 등 3대가 KMOU 동창생이라 화제였다. 혹시 짝퉁도 해기사 족보에 넣는다면 필자 역시 3대가 해기사란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단 해기사 집안의 진화론과 전통을 잇겠단 희망사항이 요즘 코로나로 시끌한 바람에 그 추이가 어수선할 따름이다.

【 2기 】항해과는 아진해운(?)으로 기억되는 김익남(金翊南), 김수금(金洙錦) 인천항도선사, 김재승(金在昇) 선박과장과 검사측도과장, 박민균(朴敏均) 인천항 도선사, 서병기(徐丙機) 동지상선 대표, 송경배(宋敬培) 조양상선 부산소장, 신태범(愼泰範)고려해운 부사장, 오세일(吳世一) 캡틴석유화학, 이정열(李廷烈) 대한선박 상무, 이종성(李鐘成) 극동 쉘, 최용도(崔用道) 여수항 도선사, 홍세주(洪世疇) 등이 기억나고 기관과는 김주년(金周年) 한해대 교수, 동서해운 이전의 박재혁(朴在赫) 해운공사 상무(?), 박순석(朴順錫) 해기사협회 전무, 배광호(裵光鎬) BCTOC 이사장, 심상호(沈相昊) 고려예선 사장, 오용한(吳用漢) 한국선급 상무를 만나 일했던 기억이 난다.

1970년대 선주협회 부회장 자격으로 조양상선 박효원(朴孝源) 부사장과 흥아해운 조희량(曺禧亮) 전무, 사무국 김병두(金昞斗) 전무와 함께 협회를 중심으로 외항해운업계 전체 살림을 일일이 참견하고 챙겼던 신태범 부사장은 KCTC 회장으로 요즘도 매일 출근, 작고한 박재혁 동기와 함께 바둑도 즐겼고 지금도 건재하다. 해대교수, 해기사협회장, 상꼬(三光)를 운영하던 서병기 사장은 당시 ILO와 ITF 문제 중요성을 업계에 부각시키기 위해 1차 통로인 선협 해무부장 필자를 자주 찾아 개인 레슨을 하거나 명동 사보이호텔로 불러 융숭한 대접(?)을 하며 국제노동기구와 운수노조 및 편의치적선 문제의 심각성을 역설하던 열성, 해기사협회장을 상근직으로 바꿔 활동하던 모습이 마냥 그립고 또 오세일 선장의 철제 의수(義手)를 응시하며 술잔을 함께 기울이던 모습도 아련하다.

성격은 급해도 다정다감했고 해기사협회와 노동조합을 오가며 업무상 참 자주 만났고 많이 배려도 해주던 박순석 전무 및 위원장은 근로자 입장을 대변하는데 열정적이었고, 90년대 초 필자 부산 근무 시절 3년 자주 삼계탕집서 만나 업무를 함께 논의했던 심상호 사장, 가끔 예선업 종사 팀들과 친선 방문차 여수항을 찾으면 즐비하게 어촌 음식상을 차려 맞아주던 최용도 도선사가 '여수 밤바다'란 유행가 속에 아련히 떠오른다. 또 '홍세주'란 본인의 성명을 "홍세두야요"로 구개음화식 발음을 한대서 웃음을 자아냈던 홍세주 사장 등 어려운 시절에 해운한국의 한가족으로 함께 했던 모습을 지켜 봤던 필자는 아흔 중반을 넘은 작고 혹은 생존 선배들 나이를 생각하면 숙연한 마음이 앞선다.

【3기】한국해대 싱글 기수 중에서 제3기는 항해학과 30명, 기관학과 21명에 조선학과가 신설되어 15명 정도 등 총 66명이 졸업, 숫적으로 아주 적었고 따라서 필자가 교분을 나누거나 함께 업무를 같이 한 인사는 다른 싱글 기수에 비해 매우 적었다. 항해과는 27년생으로 남성해운, 금명해운을 거쳐 한국선박 대표를 역임했던 박태홍(朴泰鴻), 대한해운공사를 거쳐 부산항 도선사로 일한 심상일(沈相一) 선장과 역시 70년대부터 부산항 도선사로 제2대 전국도선사협회장을 역임한 이세희(李世熙) 선장, 인천항 김남흥(金南興) 도선사 정도가 항만 취재시절과 협회 업무 수행 시절 기억된다.

청주상고 출신으로 해운공사를 거쳐 인천항 도선사로 재직하며 전국도선사협회장을 역임한 이용우(李庸祐) 선장과 그리고 전술한 바 있는 2기 최용도(崔用道) 선장과 함께 여수항을 꾸준히 지킨 황호채(黃鎬采) 도선사는 선배들이나 동기생들 보다 출생이 빠른 25년생으로 도선 업무 외에 국제라이온스협회 지구종재와 적십자사 등을 통한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활발히 했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3기 중 유일하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기관과 출신 손근배(孫根培) 인천항 갑문 소장의 첫 만남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새로운 도크시설과 함께 잊을 수 없다.

갑문소장을 마친 뒤에, 필자에게도 자주 작품을 선물하며 서예 재능을 뽐냈던 이성림(李盛林) 전무에 이어, 한국도선사협회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90년대 이천금강병원 상임고문을 지낼 때도 해항회 모임이나 기타 소규모 해운 관련 모임에 후배들과 어울렸고 가끔 회식 자리에도 나와 아흔이 넘은 나이를 잊고 사는 노익장은 후배들 부러움의 대상이라며 선호하지도 않는 억지 술잔을 필자가 권하기도 했다. 한편 3기부터 신설된 조선학과 출신으로는 (주)한국선박기술을 운영했던 김철준(金喆俊) 회장이 유일하게 기억에 저장돼 있다.

【4기】항해과로는 우선 한국해대를 나와 해운공사와 코리아라인을 거쳐 아진해운을 창업했고 해운산업합리와 과정서 합병된 두양상선 사장을 맡아 해기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선주협회장에 등극, 필자가 사무국 상무이사 시절 직접 모시고 업무 지시를 받은 조상욱(趙商郁) 회장이 기억난다. 때 맞춰 해운공사, 해양경찰, 고려해운, 삼광기선(三光汽船)을 거쳐 인천항 도선사로 전국도선사협회장을 맡아 동기끼리 요율 다툼을 벌이며 어색해 했던 전북고 출신의 최학영(崔學永) 선장이 기억난다. 이해가 엇갈린 선주단체와의 요율 문제로 끝없는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희정 회장이 마무리 짓지 못한 압무를 이어 받은 최회장이 도선사협회장에 선출된 건 아이러니하다는 소문히 파다했었다.

절대적으로 당연히 요율인상을 억제해야 하는 입장의 선주 단체와의 협상 상대인 도선 단체장에, 안면 작전으로 동기를 선출하여 맞서게 하는 것은 선주에게 단연 불리하다는 여론이 팽배했으나 결국은 해사재단을 탄생시켰고 서로 상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실무 뒷치닥거리를 했던 필자 기억을 간지럽힌다. 관계쪽으로는 동해청장을 거쳐 부산항무국장을 역임하고 하역협회와 항만협회에서 일하던 강석천(姜錫千) 이사장의 단아한 모습이 떠오른다. 항무국장 시절 협회 최재수(崔在洙) 전무와 부산 출장을 가게 되면 전관인지 전임예우로 식사 대접을 해주던 기억과 모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를 취득한 기록 및 30년전 당시로선 거액의 전재산 3억원의 장학금을 후배들에게 기부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그 밖에는취재차 만난 해운공사 백용흠(白龍欽) 전무가 당시 4기 동기들 보다 6~7년이나 연상이란 기억이 앞서고 박태안(朴泰安) 한국해사연구소장, 황보대선(黃甫大宣) 등 몇 분이 떠오른다. 기관과에서는 경주고 출신으로 포항해사국, 인천해운국표지과, 부산해심을 거쳐 한국선급에 근무하던 박상훈(朴相勳) 인천지사장과는 각종 회의서 만난 기억이 우선 떠오르고, 아세아상선 박종문(朴鍾文) 해사부장, 선박검사관으로 출발, 지방해운국을 돌고 송출 선원도 했던 구강회(具江會), 대전사범을 나온 교사 출신으로 후진과 해운업계에도 크기 기여를 했던 삼부해운 김태인(金泰麟) 회장, 그리고 ABS 최초 한국지사 회장직을 맡았던 신시범(愼蒔範) 회장을 첨 뵀을 때당시 2기 신태범 고려해운 전무의 친형이란 얘기를 듣고는 너무나 신기해서 놀랐던 일이 새삼스럽다.

조선학과 출신으로는 필자가 50년 전 관세청 출입기자 시절, 초대 이택규(李宅珪) 청장, 최운지(崔云芝)차장 무렵에 부임한 송병순(宋炳循) 세무국장이 떠오르고 프로필 기사 답례로 촌지를 받은 기억도 새롭다. 뒤에 관세청장, 광주은행장, 은행감독원장 등 해양대 출신으로 드물게 금융계 고위직을 두루 맡았었던 송국장은 역시 관세청장을 지낸 김욱태(金煜泰) 관세감독관과 함께 초기 관세행정을 도맡았었다. 관복을 벗고 난 뒤에 대동관세사무소를 차려 활동하고 있어 울산서 감격적으로 재회하기도 했던, 당시 기관과 13기 김동수(金東洙) 담당 사무관과 각별히 친해지자 열심히 보도자료를 챙겨주는 바람에 특종을 많이 써 민완기자로 부러움을 샀던 흐뭇한 옛 추억도 감동스럽다.

또 조선과출신으로 해운공사 상무이사와 코리아라인 전무이사를 거쳐 동방해운을 설립하여 대표직을 맡아 경영하던 조원석(曺元錫) 사장은 드물게도 어느 해 가을 주말에 시골 연고지 마을에 한국선주협회 사무국 총수였던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예비역 대장 김용배(金容培)이사장을 비롯한 임직원 전체를 전용버스를 보내 후대하며 위로 격려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삼 고마웠단 생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조 사장은 한국해운중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포워딩업계를 발전시킨 공로도 컸었다.

【5기】항해과에선 한때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해운업도 경영했던 삼익주택과 삼익상선의 이종록(李鐘綠) 회장이 크게 돋보였고 선주협회 의결기구인 감사로도 참여했다. 제8대 모교 총동창회장을 역임했고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중견 삼익상선과 삼익아파트로 한때 상당한 명성을 쌓았던 이 회장의 듬직한 모습은 아주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또 자주 업무상 접했던 KR의 선급관리부장과 런던사무소장을 거쳐 KR의 부회장을 역임한 신호철(申浩澈) 국제신사를 잊을 수 없다. 검사요율 때문에 갑의 입장에 있은 탓인지 띠동갑 필자를 친구처럼 친절히 대해줬던 참으로 후덕했던 신 부회장의 늘 여유롭게 미소띈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국제해사기구(IMO)의 기술회의 참여는 물론 국제선급연합회(IACS)의 한국대표로 참석하며 국제업무에 매진한 그는 드디어 1998년에는 세계 선급의 수장 IACX의 의장에 선출되어 세계 선급을 다스리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이어 ISO 9000 품질검사에도 합격하여 KR의 IACS 정회원자격 유지에도 기여했고 27기 후배 오공균(吳恭均) KR회장이 IACX 회장직에 오르는 길도 텄다. 또 김윤석(金允錫) 회장과 함께 천경해운의 해외취업선원 업무를 총괄했던 38대 한덕수(韓悳洙) 국무총리의 실형으로 중앙관상대 기정과 이스턴쉬핑 선장을 거친 한관수(韓管洙) 부사장은 항해 15기 이중희(李重熙) 해무부장과 함께 필자와 해취 해기사 수급문제로 이해가 엇갈려 가끔 논쟁을 벌이던 기억이 새롭다.

극동해운 선장, 조선공사, 아진해운, 신한해운, 천경해운,대양선박, BCTOC 등을 거쳐 80년대 초에 해기사협회 전무이사로 부임, 해무부장으로 해상직원 수급과 노사협의 업무를 전담하는 필자와 관련이 많았던 정진원(鄭鎭元) 선장이 생각나고 해운공사, 해양경찰, 대양상선, 성창해운 선장을 거쳐 이맹기(李孟基) 해군참모총장이 전역후 설립한 코리아라인서 15기 박태오(朴泰五) 부장 및 해군사관학교 출신 송기원(宋基元), 김갑중(金甲中), 김정화(金正和) 부장과 함께 자주 봤던 한국선무, 해외선박서 일했던 조용한 모습의 정병연(丁炳連) 전무가 기억에 남는다. 또 1990년 중반 부산 근무 시절,14기 신석흔(辛錫昕) 선장과 15기 이윤규(李允珪) 선장이 도선사협회 회장을 맡아 일할 무렵 사무실을 찾아가거나 회식을 함께 할 때 부산항 도선사로 근무한 김원중(金元中)선장과 도남섭(都南燮) 선장과도 만날 때마다 필자 보직상 친밀히 아껴줬던 생각이 난다.

기관과로는 대한해운공사와 일본 협성기선을 거쳐 1기 김동화 사장과 함께 라스코해운서 일한 황병도(黃昞燾) 전무가 을지로 천경해운 빌딩(?)인가 어디서 근무했던 것으로 희미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늘 자주 보며 해기사 양성 문제나 수급을 논의하는 교통부나 해운항만청 회의에서 낯 익은 수일상운의 이범균(李範均)사장의 과묵한 모습도 생생하게 아롱진다. 또 해운공사, 극동해운 기관장을 거쳐 영신상운, 현익운수에서 일할 때나 한국선원대리점협회와 그리고 선박대리점협회 소속 신분으로 국적선사와 대립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허동식 신호철을 비롯한 싱글 기수가 많았던 KR에서 김재도(金在道) 상무, 정연세(鄭然世) 회장과 더불어 대전으로 사옥을 옮겨갈 때 필자가 이전 행사에 참가했던 기억이 새롭지만 부산으로 옮긴 후에는가 본 적이 없다.

【6기】항해과 6기라면 먼저 필자와 띠동갑, 함경도 사투리의 실버팍호 선장, 범양전용선 방석훈(方錫勳) 해무감독이 떠오르고 해사 관련 선주협회 제반 업무라면 실무 담당 심부름꾼인 해무부장 필자와 제일 많이 각종 업무를 함께 하던 생각이 난다. 오일쇼크로 선박을 매달 계선지 물색을 위한 타스크 팀장 방 상무와 고현만 득량만을 헤매며 어려움을 겪던 추억, 부사장으로 퇴직 후도 가끔 보면 반가웠는데 아흔도 못 채웠으니 애석하다. 해취선 브라이트해운에서 하선한 1항사, 현 선주협회 김영무(金英武)상근부회장의 쥬니어 시절, 배재학당(?) 후배라며 필자에게 소개하여 같이 일하게 된 에피소드도 기억에 남아있다. 또 대한통운, 영풍상사, 흥아해운, 금용해운을 거쳐 삼익상선 전무로 와서 사장과 부회장에 올랐던 동원선박 김충곤(金忠坤) 사장의 당당한 모습도 눈에 선하다.

1970년 제7대 한국선주협회장으로 활약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위 한병기(韓丙起) 회장이 경영한 삼양항해 선장을 거쳐 조양상선의 이사와 전무직으로 선주협회 회의에 자주 참가 여러 현안문제를 논의했던 김용기(金容期) 삼익선박 전무가 가끔 생각난다. 항만요율 등 각종 협정요율을 협의하는 등 함께 일을 하면서도 해기사 출신으로 그간 한해대 16기 정도로 알았던 필자가 10년을 낮춰 봤을 정도의 홍안으로 해기사 출신답지 않게 조용히 함께 일했던 기억으로 점철된다. 그 밖 항해과 출신으로는 부산해운 조정진(趙貞鎭) 대표, 조덕곤(趙德坤) 산울림사 대표 등이 희미하게나마 뇌리를 스친다.

기관과 출신으로는 서울대 화공과 합격을 포기하고 해대를 택한,코리아라인 시절부터 해기사 수급문제 등을 필자도 끼워 함께 논의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알려진 박종규(朴鍾奎) 한국선무 회장이 생각나고 근황도 궁금하다. 중요 사안을 결정하는 회의시 진행 과정 기록을 맡아 주로 듣는 입장이었던 필자는 속삭이듯 논리를 펴며 조용히 결론을 유도하던 박회장으로부터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많은 것을 배웠었다. 또 6~70년대 속결 경제개발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산별노조의 기세를 꺾기 위해 산별노조를 기업별 단위노조로 약화시킬 무렵에도 노사간 임금 협정을위한 단체협약을 두고 실랭이를 벌이던 시절 사용자측 실무 책임자인 필자는 당시 방해창(方海昌) 전국선원노조위원장 및 예하 조직원들과 처절하게 격돌해야 했던 기억은 난공불락 항운노조와 함께 이젠 추억의 장에 묻혔다.

그리고 해운공사를 거쳐 11~12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고 필자가 귀여움도 많이 받았던 초계(草溪) 왕상은(王相殷) 회장과 함께 협성선박에 오래 몸담았고 협성마리타임을 창업하기도 했던 김병수(金炳銖)회장 역시 띠동갑 30년생으로 우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필자와 키 높이가 비슷해서인지 친절했고, 대리점 업무를 볼 때도 매사 다정하게 대해줬던 것 같아 근황이 궁금하다. 또 부산에 이어 선주협회 인천소재 해운사 점소들을 업무로 엮어 현지 불편을 덜기 위해 운영되던 인천지구협의회 의장을 오래 맡았던 범양상선 손주용(孫柱鏞) 인천지점장, 삼광 개척자 2기 서병기 사장의 바톤을 이어 23기 박남수(朴南洙) 상무와 동지상선을 경영하던 최응기(崔應璂) 사장, 강희경(姜熙景) 대한해운 상무(?)가 희미하게 기억에 남는다.

【7기】70년대에는 해양계 대학 출신으로 외항해운업체 선주가 되어 선주협회 회원사로 등록된 회사는 4기의 두양상선 조상욱 사장과 7기 중앙상선의 김동기(金東基) 사장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무교동 효령빌딩에 사무실을 둔김 사장 심부름이나 인천항 도선사로 일한 당시 26기 김명석(金明石) 영업부장을 보러 가끔 갔었다.전남 광주서 태어나 전주북중을 나와 동시 합격한 서울대 정치과를 접고 해대를 택했고 모교 교수로 재직중 한국 해법과해상법학을 정립시킨 선장 출신 배병태(裵柄泰) 박사는 학회 세미나와 발표회 및 각종 행사와 모임등에서 영어에도 뛰어난 낯익은 얼굴로 선사도 경영하고 KMI원장도 역임했는데 몇년 전 작고하시어 본보에 필자가 배 박사를 일생을 정리하여 게재한 적이 있다.  그 밖에 기관과는아진해운 조석행(趙碩行), 범양상선 부산지점장 장태묵(張泰默) 상무이사 등이 떠오른다.

기관과 출신으로는 한국해대 민우홍(閔右弘) 교수와는 42일간을 망망대해에서 함께 생활한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1979년 12월, 35기들과 버마의 랑군, 인도의 캘카타, 일본의 나가사키, 대만의 키룽을 도는 한바다호 원양실습선에 오르니 일반 상선과 다른 체계로 연습선의 특성상 15기 허일(許逸) 선장, 22기 배종욱(裵鍾旭) 기관장 위에 연습감이란 최상위 직책을 민교수가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직급은 몰라도 그때 기억나는 스텝들은 항해과 28기 곽규석(郭圭錫), 박석주(朴錫柱), 기관과 문경만(文慶萬) 그리고 항해과 30기 김시화(金是和), 31기 이중우(李重雨), 32기 이태우(李太雨) 등이 생생히 기억나는데 그들은 나를 알까 말까다. 또 14대 학장을 역임한 홍영표(洪永杓) 교수가 기억에 남는데 어언 세월이 수없이 흐르고 보니 그 시절 기억이 흐리기만 한다.

【8기】항해과 8기 중에서는 제일 많이 만나고 업무상 또는 자상하게 대화를 자주 나눈 이재우(李再雨) 목포해양대 교수가 항상 생각난다. 학장이나 총장직엔 운이 없었지만 '영미해양문화산책', '바다와 문학', '바다와 사람', '바다와 배 그리고 사람'을 비롯하여 특히 해양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바다의 명시', '문학 속의 바다'와 '존메이스필드 해양명시선' 등 해양계 대학에서 일반 대학의 영문학 교수 못지 않게 바다와 해양을 소재로 한 영미 문학에 독보적 존재였다. 필자가 7~80년대 특강이나 업무로 목포해대를 방문하면 업무상 관련있는 다른 보직 교수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함께 했던 다정함을 잊을 수 없다. 해기사 양성 및 교육에 관한 저서 외에 영어와 관련된 저서로 'IMCO 영어연습'을 비롯 '항해영어', '실용 해사영어회화'와 'IMCO영어의 응용과 실제' 등이 발간되면 상경시 필자에게 전해주던 기억 생생하다.

또 서울대 상과대 출신으로 필자가 상사로 모셨던 해운공사 런던지점장을 지낸 김희석(金熙錫) 상무의 바톤을 이었고 귀국하여 범양상선을 거친, 당시 영어 능통하고 인상 좋은 해외통, 청주고 출신의 김성응(金星應) FEFC(극동운임동맹) 한국대표는 선주협회와 같이 서소문동 배재빌딩에 사무실이 같이 있어 더욱 친했고 항해과 26기 유동영(柳東永) 부장이 함께 일해 아래 윗층을 자주 오르내린 기억도 또렷하다. 호주운임동맹, ANZESC 한국대표도 겸직한 김 대표는 무엇보다 UNCTAD코드가 규정한 정기선동맹의 40% 국적선 적취문제를 해결하는 공로도 인정받고 국민훈장 석류장도 수상한 딸 다섯의 아버지였다.

구주동맹 18년을 마친 후 김대표는 미국 영주권을 얻어 양국을 오가며 노후를 보낸다는 소식만 들린다. 또 1916년생으로 조선공사와 한국일보사장을 지낸 남궁련(南宮鍊) 해운공사 사장이 49년에 극동해운을 설립하여 겸임을 하던 시절 졸업후 해군장교를 거쳐 동사 신라호에 승선했던 항해과 8기 백웅기(白雄基) 선장은 모교 연습선 반도호(半島號)의 선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VLCC 2척을 컨소시엄으로도입하여 유공해운 설립 때 주역을 맡아 상무이사(?)로 재직중일 때 필자가 업무상 자주 만났고 크지 않은 체구에 성격이 조용하여 협회내 유조선협의회 회의시에 빈번히 출석했으며 마지막에는 계열사 경진해운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 얼굴이 기억나는 항해과로는 왕상은(王相殷) 회장 휘하의 협성해운에서 일할 때 알던 훤출한 김성수(金聖洙) 전무이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기관학과 8기로는 한국해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후 초대 총장직을 역임한 박용(舶用) 기관학의 세계적 거성 전효중(全孝重) 박사가 우선 떠오른다. 조선공사와 서독에서 익힌 기관의 실무를 바탕으로 동경대학의 유학을 거쳐 외국 학술지와 국내 학술지에 70여편의 학술논문이 게재되는 세계적 석학으로 선박 기관학의 독보적 학문 영역을 쌓은 학자로 회자됐다. 그리고 필자가 해무부장 업무를 맡아 일할 때 연습선 한바다호 후원금 전달 업무 등으로 기억되는 제16대 신민교(辛玟敎) 학장실을 방문했던 기억도 엊그제 같다는 생각이다. 봉투만 전하고 점심 대접은 못 받은 기억이 새롭고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지만 필자가 자주 언급하는 신학장 시절 한바다 원양실습 승선의 추억은 두고 두고 추억으로 점철된다.

또 목포해대를 업무차 방문하면 반가이 맞아주던 김명호(金明鎬) 교수와 신학재(愼學宰) 교수를 잊을 수 없다 특히 신 교수는 유달호의 실습과장을 맡고 있었고 이 한 척으로는 면허취득을 위한 승선 실습의 전체 인원을 감당하기 어려워 국적선사에 분산 실습 의뢰를 해야 했고 야속하게도 선사들은 양성된 해기사를 필요시 채용은 하되 부담되는 승선 실습은 회피를 하기 때문에 이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는 대학 실습과와 필자가 죽고 살기로 피나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지금도 가슴 저미는 찡한 추억으로 회상된다. 두 교수 역시 대학에서 후학 교육을 천직으로 했던 것 같고 당시 곁에서 실습에 도움을 많이 줬던 항해과 22기 기회원(奇會元) 교수와 항해 28기로 4대 총장을 지낸 신철호(申哲浩) 교수, 실습계장 김건형(金建亨) 주임, 그리고 목포해대 모교 사랑의 전설적 열성맨, 통신과 17기 출신 총동창회 정해표(丁海杓) 사무총장의 협조와 남다른 열성이 지금도 안부를 나누며 옛 추억을 회상한다.

또 조달청, 해운공사를거쳐 전국해원노동조합연맹 연수교육원장 시절에 알았고 나중에 한승선박을 거쳐 대영선박이란 회사의 경영에도 참여한 것으로 기억되는 김성재(金成在)전무이사는 사용자 단체의 실무책임자로 노사간의 협의나 단체협약 체결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알았었다. 그리고 수산청과 수협 및 동아건설을 거쳐 KR 컨테이너부장 근무 시절 알게 된 고홍석(高洪錫) 상무도 기관과 8기 출신으로 함께 수행한 업무는 기억이 남지 않지만 당시 KR은 필자가 선박검사요율 협정(?)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면 기라성 같은 조선학회 등의 학자나 기타 이사 단체들은 인상을 제시하는 요율 원안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선주를 위한답시고 매번 필자 홀로만 고군분투, 미움을 받은 기억도 떠오른다.

【9기】필자는 싱글기수 중 항해나 기관이나 9기 출신들과 가장 많이 인연을 맺었던 것 같다. 우선 선주협회 출입 시절 알고 지내던 영어교사 출신의 이인구(李仁求) 차장은 필자가 조사부 신설 요원으로 스카웃 돼 합류하자 부장으로 승진하여 함께 70년대를 열심히 뛰며 일했다. 뒤에 국제해운 정수문(鄭秀文) 사장 눈에 들어 이적했으나 일찍 타계했다. 그래서 학회나 세미나 등에서 자주 뵙고 지금도 안부를 나누며 지내는 민성규(閔星奎) 한해대 교수는 당시 '해운경제학'이란 저서를 발간하여 필자가 이의 홍보와 보급에 일조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어 해기사로서 공채 고시에도 합격, 아주 드문 기록을 세워 교통부 공직에 몸담았다가 한국해대 교수로 오래 근무한 임동철(林東喆) 박사는 지금도 필자를 아껴주는 의리있고 인정 많은 학자로 가끔 궁금한 일이 있으면 자주 서로 통화하고 안부를 전하며 지낸다.

그리고 해운조합을 거쳐 텐트사업으로 성공한 최계순(崔桂淳) 사장은 그 뒤 오래 뵌 적이 없어 얼굴이 희미하고, 또 경복고 출신으로 해기사 자격으로 국회 입법조사국에 근무하는 것이 특이하게 생각됐던 권상하(權相河) 국장은 나중에 KMI 주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 마지막 뵀지만 듬직한 귀공자 풍채가 눈에 선하고 당시 젊은 필자더러 서공(徐公)으로 부르던 전형적 영국 신사풍의 진수를 풍기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으로 기억에 계속 남고 근황이 궁금하기만 하다. 해운항만청 선박과와 측도과의 선박직으로 근무시 처음으로 알았던 김용휘(金龍輝) 과장, 뉴코리아해운을 창업했던 김윤희(金允熙) 회장, 부산해난삼판원의 김상수(金相洙) 조사관, 그리고 해운공사를 찾으면 늘 허스키한 음성으로 친절히 맞아주며 서양풍의 얼굴이 영화 매니어 필자 눈에는 커크 더글라스를 닮은 것으로 생각되어 지금도 옛 모습이 생생한 황수영(黃壽永) 상무가 생각난다.

황 상무 관련 부서에는 뒤에 동호선박을 거쳐 인천항 도선사를 지낸 12기 정연직(鄭然直) 선장, 대한상선으로 옮겨간12기 최정익(崔正翼) 이사, 해무부장 후에 부산지점을 맡았던 13기 현정춘(玄正春) 지점장, 두양상선으로 옮겨간 14기 노하석(盧夏錫) 이사, KPI 산파를 맡았던 20기 윤민현(尹珉鉉) 전무, 진급이 빨랐던 22기 이원행(李原行) 이사 등이 막강 해공에 포진해 있어 업무차 자주 회동했다. 특히 타코마 조선소로 옮겨 간기관과 22기 정학구(鄭鶴九) 과장은 경남고 출신으로 특히 필자와 술 친구로도 오래 친했던 현 상무와 같이 선박 보험의 멘토인 항해과 20기 윤민현(尹敏鉉) 상무와함께 늘 한 조직처럼 일했던 기억이 눈 앞에 아직도 선하다.

그리고 학계에서는 필자가 해무담당으로 수행 업무상 더욱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목포해대 4년제 승격 후 1995년 초대 총장에 선출된 오정철(吳正喆) 교수와 1985년부터 한국해대 제17대 학장을 역임한 양시권(梁時權) 교수 등 해운한국의 해기 인재 양성의 양대산맥에 자리매김 했던두 대들보 교수를 잊을 수가 없다. 또항계내업 요율을 조정하기 위해 부산에 가면 12기 기관과 삼호선박 이헌탁(李憲逴) 사장과 같이 대포 한잔도 함께 했던 삼성항업의 김동광(金東光) 사장과 해운공사, 고려해운, 삼양선박을 거쳐 용마선박을 창업했던 한재희(韓在熙) 회장도 업종이 달라 자주 상면 기회는 없어도 얼굴은 기억난다.

기관과 출신으로는 70년대 중반쯤에 조양상선에 근무하는 낯익은 이름이 있어 직접 찾아가 확인을 한 결과 동명이인은 아니고, 필자가 태어난 고향 경북 선산 소재 선산중학교를 다닐 때 영어를 가르친 바로 그 고재일(高在日) 영어교사가 조양상선 전무이사로 재직중이라 너무나 놀라웠던 기억이 새롭다. 그밖에 옛 양재원(梁在元) 사장과 함께 동서해운을 운영하다 현재도 동신선박의 명예회장으로 출근을 하며 며칠 전에도 필자와 만난 이대우(李大雨) 회장의 구수한 입담은 예나 다름 없다. 그리고 한국전력과 라스코쉬핑 기관장 및 대한유조선을 거쳐 호남탱카에 근무하던 최석주(崔錫柱) 부사장, 호남탱카와 대양선박을 거쳐 범양상선 포항지점장을 지낸 정대길(鄭大吉) 이사도 기억에 남는다.

학계에서는 모교 18대 학장을 역임한 하주식(河注植) 교수와 목포해대 제4대 학장을 지낸 조창희(趙彰熙) 교수가 생각난다. 특히 조 학장은 실습문제 등으로 밀접한 업무관계가 있기 때문이긴 했지만 시골 농부같이 소탈한 대학교수로 누구에게나 격의없이 대해주며 함께 현안 문제를 함께 해결했고 잊을 수 없는 별도의 추억들이 너무나 많아 작고 전 투병중일 때 통화가 마지막이 되고 말아 더욱 안타깝다. 면허 취득에 절대 필요 불가결한 재학생들의 승선실습 협조에 감사하는 보답으로 목포 산 낙지를 공수하여 선주협회 회의실에서 각사 해무담당들을 불러 풋 고추에 된장 찍어 병소주를 사다 낙지파티를 하던 기억은 이름하여 너무나 훈훈한 산학협동의 표상으로 여겨져 목포해대라면 늘 낙지파티가 지금도 회자되는 추억이다.

게다가 한번은 출장차내려가 목포밤바다 야경을 보러 갔다가 취중에 유람선상에서 머리를 크게 다쳐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여의사 조학장 부인에게 직접 응급치료를 받은 기억은 필자의 영원한 추억으로 반추된다. 마지막으로 기관학과 9기 졸업생으로 삼양선박 사장으로 있다가 한국해대 출신으로는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금배지를 달았던 대구 계성고를 나온 김진기(金進基) 의원이 해기사의 최초 국회 진출이란 기록을 세워 화제였고 이어 부산 직선에선 낙선했지만 김의원은 정창물산도 창업했던 것으로 기억되며 목포해대 전신 목포해양고 출신의 김옥두(金玉斗) 의원도 뒤를 이어 해양계 대학 출신으로서는 첫 국회 진출로 양 대학의 첫 국회 진출로 해운업계의 화제와 관심을 모았었다.

【10기】우선 수차 전술한 교육과 실습관련 및 양성 해기사의 선사별 배정 업무와 해외취업 인력 정책 수립 등으로 항해과 10기로는 당시 실습과장직을 맡았던 민병언(閔炳彦) 교수가 제일 많이 생각난다. 실무 연락 책임자 이은영(李殷永) 주사를 필자와의 연락병 내지는 메신저로 두고 당시 열악한 해기사 양성교육 환경이나 국적선사 수급과 해외취업의 균형 등 해기사 정책 전반에 걸쳐 현안문제가 쌓여도 소리 소문 없이 거친 보직에 걸맞잖게 조용히 업무를 처리하던 민 교수와 함께 한 숱한 세월이 손에 잡힐 듯 한데 손꼽아 보니 어언 40년은 족히 흐른 것 같고 뜻밖의사고로 타계했단 소식을 접했던 기억은 나중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필자의 승선 첫 경험, 한바다호 추억과 함께 필자의 눈시울을 오래 적신다.

그리고 선주협회 회원 선사에서는 자주 머리 맞대고 일했고 2차 오일쇼크때 계선지를 찾아 현지 출장으로 남서해안 일대를 뒤지고 누볐던 범양상선의 부산고 출신 윤희대(尹熙大) 이사가, 선장직을 마친 뒤 육근을 시작한 경남상고를 나온 13기 이윤우(李潤雨) 선장출신 부장과 함게 동행했던 일은 숱한 에피소드와 함께 지금도 가끔 그 시절 추억을 반추하며 이 부사장과 술잔을 기울이며 되내이고 파안대소한다. 윤 이사가 성이 같고 얼굴도 닮았으니 필자에게 당시 유명배우 윤일봉(尹一峯)의 아우라고 해서 깜빡 속았던 기억도 난다. 또 정준섭(鄭準燮) 사장과 북창동 합동해운에 근무하다가 아세아상선 설립시에 합류, 현대상선 전무이사를 지낸 체격부터가 VLCC급인 이승우(李承雨) 선장은 50년 전부터 함께 한 일도 많은데 몇해 병상에서 투병하다 별세하셌다고 하니 오로지 안타깝기만 할 따름이다.

또 교통부, 극동해운, 조양상선, 태영상선을 거쳐 여수소장을 지낸 전주 신흥고를 나온 호남탱카의 황부영(黃富英) 상무는 필자가 주재하는 회의 때마다 선의의 태클(?)을 걸었던 기억이 오래 남고 대구 계성고를 나와 교통부, 쌍용해운을 거쳐 합리화로 묶은 두양상선 사장을 지내고 현일해운 대표를 맡았던 김봉운(金鳳雲) 사장, 그리고 (주) 하남의 홍광희(洪桄喜)전무이사, 경주고를 나와 극동선박, 조선공사를 거친 천일해운 정연통(鄭淵通) 사장은 부장 시절부터 만났었다. 또 포항해운국, 라스코 선장을 거쳐 필자 부산 근무 시절 만났던 양진학(梁鎭學) 도선사, 신한해운, KR 정부대행소장 등을 역임한 한창훈(韓昌勳) 부산지점장이 생생히 기억나고 한국해대 윤점동(尹點東)교수와 목포해대 제3대 학장을 역임한 최영석(崔泳錫) 교수, 그리고 언론사 체육분야 유명인사 서울신문 체육부 고두현(高斗鉉) 국장도 기억에 남는다.

10기 기관과로는 우선 목포해양대학교가 전문대학으로 승격 후 제2대 학장에 취임한 1980년부터 필자와 한 조직의 일원처럼 서울과 목포를 자주 오가며 함께 일을 했던 임정배(任正培)학장이 그립고 보고 싶다. 나지막한 체구에 전라도 사투리가 잘 어울리는 임학장은 9기 조학장에 앞서 선주협회 회원 선사와의 실습 보은의 인연, '낙지 학장'의 원조였고 기회 있을 때마다 동향의 소치(小痴) 허련(許鍊) 화백의 복사판 그림을 자주 선물로 들고 와서 졸업생들의 실습이나 취업을 독려하던 모습이 너무나 눈에 선하고 무척 생각난다. 한편 고려해운 전무를 거쳐 KCTC 대표를 맡았던 이승은(李承垠) 사장, 대한해운공사에 승선후 흥국상사와 동서해운을 거쳐 KR 해양설비부에서 일한 이성호(李成浩) 상무이사도 살아 생전엔 가까웠던것 같다.

한편 교통부 해운국 산하 부산, 목포, 마산을 거친 해운항만청의 선박직 붙박이 임완수(林完洙) 선박과장 및 측도 과장과는 짝퉁 해기사 필자와 선박의 기술 분야 행정을 함께 했던 일과 온순한 성격 기억도 또렷하다. 태영상선과 한진해운 울산사무소장을 거쳐 한진중공업으로 옮겼던 갈종수(葛鐘洙) 전무이사나 고려해운을 거쳐 삼익상선 및 고려기공을 경영했던 한병진(韓秉進) 대표도 해운불황이 극심했던 시절 배를 달아매려 해안일대를 다니며 계선지 헌팅을 함께 다녔던 기억이 새롭고 장흥 녹동항에서 출장길에 즐긴 큰 새우 맛은 지금도 입맛을 감치던 옛 기억이생생하다. 특히 갈 전무나 한 사장은 선주협회 업무에 협조적이었고 지금이라도 덥썩 손을 마주 잡고 싶지만 40년은 흐른 것 같은데 필자가 기억에 있을까 궁금도 하다.

​또 경동고교 출신으로 극동해운을거쳐 제일항역을 창업하고 범한항공에도 재직한 항공화물주선업협회 박광현(朴光鉉) 회장도 어렴풋이 얼굴이 떠오른다. 또 필자가 출입기자 시절, 추억이 너무나 많은 관세청의 부산세관 오순희(吳淳熙) 세관장이 조선학과 4기 송병순(宋秉循) 관세청장에 이어 당시 관세청의 고위직 간부였다. 그 밖에도 일선 세관에 근무하는 한해대 출신이 더러 있었지만 필자가 출입 시절은 싱글 기수를 찾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마지막 한때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박영복(朴永復) 기관과 10기는 이름만 듣고 얼굴은 모르는 화제의 인물로만 기억하고 있다.

끝으로, 싱글 기수라면 9기까지로 끝내야할 것 같긴 하지만 필자 뇌리에 떠오르는기억 중에는 아마 36기 정도까지는 생각나는 인물이 상당히 많아 이를 중간에서 그냥 끝내기가 아쉬운 마음 추스리고 달래며 우선 이번 기회에는 10기를 추가하여 옛 추억으로 만나보고 싶었던 욕심을 솔직히 밝힌다. 아울러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앞서 도입 부분에서 전술했듯이 50여년간을 취재로, 업무로, 친목으로 두루 만났고 그 인연 하나 하나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이 나이에도 바둥댄다. 그래서 필자는 메마른 우리의 가슴에도 시심과 뮤즈의 밀알을 심어 시상(詩想)의 화단을 가꾸고 지금까지 죽은 자의 무덤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해운계의 낭만파들을 불러 모아 로망의 소낙비를 흠뿍 맞으며 해운계 우리 모두가 아직은 살아있는 최후의 낭만주의자가 되어 영원한 '최후의 로맨티시스트'로 남고 싶다.

<서대남(徐大男)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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